뉴멕시코 사막이 바꿔놓은 그림 [류지연의 MMCA 소장품이야기(16)]
아크릴물감과 사막의 빛이 만든 변화
30대 최욱경의 내면 독백과 예술 열정
MMCA 서울 ‘…하이라이트’ 전시 중

최욱경(1940~1985)은 유럽행이 주를 이루던 1960년대 일찍이 미국 유학을 택한 화가다. 그림 외에도 문학적 감수성으로 시집을 냈고, 미술교육자로도 활동한 다재다능한 예술가였다. 그런 최욱경이 1976년 10월부터 열 달 정도 뉴멕시코에 머물렀다. 그때 당시 처음 나온 아크릴물감을 접했는데, 유화물감보다 빨리 마른다는 특성 때문에 자주 쓰게 됐다. 주로 미국 동북부에 생활하던 작가는 이 시기 서남부 지역을 경험하며 “아름다운 햇살, 허허로운 벌판과 사막, 시각적으로 전에 맛볼 수 없었던 공간에 접한 감동을 캔버스에 담았다”했고 “생활 주변에서 발견하는 아이언판, 플라스틱화판, 베니어판 등을 시도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 무렵 로스월 뮤지움앤 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는데, 이 전시가 이후 1978~1979년에 걸쳐 한국에서 열린 ‘뉴멕시코의 인사’(미국문화원, 서울,대구,부산 순회전)로 이어진다. 출품작 대부분이 대작(大作)이었는데, 작가는 큰 화면을 그리는 동안 무한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고 다듬어가는 과정 역시 색감이나 공간 사용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고 밝힌 바 있다. “내가 살아온 순간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 한 작품들”이라는 작가의 설명처럼 사막을 주배경으로 삼아 구부러진 곡선과 바람이 흩날리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선, 햇살 가득한 자연의 색채는 유희적이면서 유기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뉴 멕시코의 자연환경에서 받은 영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작가는 화면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대각선을 즐겨 그렸는데, 이같은 대각선 처리는 화면의 안정감을 자아낸다. 색 자체로 형태를 이루고 있어서 보기에도 시원시원하며 공기를 가르는 듯한 청각과 시각의 조화를 느낄 수도 있다.

최욱경의 그때 나이는 30대 후반. 작가로서 당당한 예술성을 확립하던 시기였으므로 더욱 대담한 표현을 할 수 있었다. 충만한 의욕으로 내면과 감정을 강렬하게 쏟아내는 표현주의적인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험과 감각을 전달하는데 있어 아직 다 표현하지 못한 감정이거나 끝내 말로 다 정리되지 않은 단면들이 있음을 제목을 통해 말하고자 한 모양이다. ‘미처 못 끝낸 이야기’라는 제목은 젊은 나이에 나갔던 해외 유학과 치열한 창작활동을 이어나가면서 스스로 되뇌는 내면의 독백과 같이 어떠한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 기억, 경험의 조각들을 화면에 펼쳐보이면서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라 앞으로 더 나아가려는 감정상태를 암시한다. 그만큼 최욱경에게는 자신의 잠재성에 대한 확신이 가득찬 시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강렬한 조형의 힘은 작가의 의식 내부에서 분출한 것이지만 동시에 뉴멕시코의 광활한 공간에 새롭게 눈을 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대도시 위주로 생활했던 작가에게 뉴멕시코의 강렬한 햇살과 청량한 공기는 자극이 됐음이 분명하다. 예술가들이 새로운 장소에서 지낸다는 것은 단순하게 이동과 체류의 경험을 넘어, 창작의 새로운 재료를 발견하고 예술적 감각과 인식을 확장하는 계기이다. 새로운 장소에서 우리는 감각이 깨어나고 공기의 냄새, 바람, 빛의 움직임, 일출과 일몰의 시간, 흙의 질감, 사람들의 생김새와 행태 그 모든 것이 관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낯선 자극은 고정관념을 깨트리고 시각적 언를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장소마다 위도, 경도, 나아가 기후가 다르기 때문에 특정한 장소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빛의 스펙트럼은 화가의 팔레트를 바꿔놓을 수 있는 단초이기도 하다. 또한 그 장소에서만 지니고 있는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서사가 축적되어 있으므로 단순히 경관으로서의 장소 개념이 아니라 독특한 분위기, 즉 아우라는 작품에 깊이와 진정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모티프가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환경에 처했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나’의 모습은 예술가로 하여금 익숙한 사회와 환경에서 벗어나 자신을 다른 차원으로 바라보게 한다. 다시 말해 낯선 곳에서의 고독과 해방감은 예술가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하며 그 장소에 대해 투영된 예술가 자신의 새로운 자아를 표현하도록 이끌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1979년 귀국해 영남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됐는데, 이후 자연스럽게 한국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되었다. 따라서 뉴멕시코 이후 한국 자연을 담은 회화 작품에서 보여지는 화려한 색과 유려한 필치는 한국 자연의 색감으로 발전했다.

한편, 최욱경에게 큰 자극을 주었던 뉴 멕시코 지역은 사실 미국 출신 뿐만 아니라 많은 현대미술가들에게도 새로운 영감을 주었던 지역이다. 가장 대표적인 화가가 조지아 오키프. 오키프 작품의 특징은 사막의 광활하고 비어있는 공간감, 강렬한 빛과 색채, 형태의 단순화와 추상성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는 풍경 속에서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한 고독한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이는 최욱경의 생기 넘치는 화면과 차이가 있다. 최욱경이 뉴멕시코에서 체류할 당시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을 보았을 것이므로 두 작가의 차이점을 올해 11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릴 ‘조지아 오키프와 미국 모던아트’ 전시를 통해 비교해보면 좋을 듯하다.
최욱경의 ‘미처 못 끝낸 이야기’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상설전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전에서 만날 수 있다.
★ 최욱경(1940~1985) : 1940년 서울에서 출생해 서울예고와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했고, 1963년 도미(渡美)했다. 1963년부터 66년까지 미시간주 크랜브룩 미술아카데미 회화과 석사과정 및 뉴욕 브룩클린미술관 미술학교 등에서 수학했다. 1965년 ‘작은 돌들(Small Stones)’이라는 영문 시집을 출간했고 1968년 뉴햄프셔의 프랭클린 피어스 대학 조교수로 임용돼 미술교육자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1972년부터 1974년 초까지 한국에 머무르다 다시 미국으로 출국해 1978년까지 미국, 캐나다, 노르웨이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1972년 ‘앨리스의 고양이’를 비롯한 시 45편을 수록한 국문 시집 ‘낯설은 얼굴들처럼’을 출간했고, 애틀랜타 미술대학과 위스콘신 대학에서 강사로 재직했다. 1979년 귀국 후 1985년 작고할 때 까지는 영남대와 덕성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의 산과 섬을 주제로 한 회화 작업 제작에 몰두했다. ‘상파울루 비엔날레’(1981), 뉴욕에서 ‘한국 현대 드로잉전’(1981), 교토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위상전’(1982), 파리의 ‘살롱 도톤’(1982) 등 해외에 한국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국제 전시에 다수 참여했다. /류지연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자료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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