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공군 6년, 대한민국 공군 19년… ‘미그기 귀순’ 이웅평

이한수 기자 2026. 5. 4.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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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2002년 5월 4일 48세
1983.3.4 북한 귀순용사 이웅평 대위 기자회견. (제공=문화체육관광부)

“서울 인천 경기 지역에 공습 경계 경보를 발령합니다. 국민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1983년 2월 25일 오전 민방위 본부는 다급한 목소리로 되풀이 방송했다. ‘훈련’이 아닌 ‘실제 상황’이라고 했다. 북한 전투기 1기가 남하 중이었다. 미그기 조종사 북한 공군 대위 이웅평(1954~2002)이 귀순한 것으로 밝혀졌다.

1983년 2월 26일자 1면.

“북괴 공군 조종사인 상위 1명이 중공제 미그19 전투기 1대를 몰고 25일 오전 10시46분 휴전선을 넘어 귀순해왔다고 국방부가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이 미그19기는 오전 10시 45분쯤 해주 상공을 지나 연평도 방향으로 남하 중인 것을 아군 공군기가 출격, 유도해 오전 11시 4분쯤 서울 남방 〇〇기지에 착륙시켰다는 것이다.(…) 귀순자는 북괴군 상위(우리 계급 중위와 대위 사이) 리웅평씨(29)인 것으로 발표됐다. 리웅평 상위의 귀순은 비행기를 몰고 귀순한 북괴 공군으로는 지난 50년 이후 6번째이며 70년 12월 3일 박순국 소좌(소령)의 귀순 이후 13년 만이다.”(1983년 2월 26일 자 1면)

당초 계급은 상위로 알려졌으나 조사 결과 대위로 밝혀졌다. 이웅평은 귀순 동기로 “현재 북한에서 남침 전쟁 준비를 위해 전 국민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있는 숨 막히는 상황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전 민족에게 위기를 알리고 새로운 세계의 삶을 찾아 월남키로 결심했다”(1983년 2월 27일 자 1면)고 밝혔다.

1983년 3월 5일자 1면.

귀순 48일째 되는 날 신동호 조선일보 논설주간이 이웅평 대위와 인터뷰했다.

“-텔리비전에서 비친 이 대위의 모습이 전혀 꾸밈이 없고 자연스럽게 느껴졌읍니다. 또 하나는 어떻게 말을 잘하는지 놀랐어요. 누구나 마이크를 들이대면, 말이 막히게 되고 더듬거리게 되는데 전혀 그런 것이 없이 표준말에 가까운 알아듣기 쉬운 말씨였어요. 그래서 분단 38년이 됐어도 똑같은 우리말이 있음으로 해서 통일에의 어려움 중 하나는 덜었다고 자부하게 됐읍니다. 이 대위는 천성적으로 언변이 좋은 것입니까? 아니면 학습 탓인가요.

“북이라는 게 뭐, 다, 사람들 정치 학습을 많이 시키다 보니까 입만 까져 가지고 실속 없이 그런 게 좀 있읍니다. 국어시간 이외에 조직별로 정치 학습을 세게 시킵니다. 여기선 세습 체제라고 하지만, 거기선 유일적 후계자 계승 체제에 대한 학습을 많이 시키지요. 저보고 말 잘한다고 하지만 나는 발표 능력이 없는 축입니다.”

1983년 4월 13일자 5면.

이웅평은 “평창(平昌) 이씨 웅(雄) 자 돌림”이며 2남 5녀의 장남이라고 밝혔다. 부모 관련 질문에는 입을 닫았다.

“이웅평씨는 부모 얘기를 극력 피했다. 다만 남동생(웅철·25세·하사관)만이 마음에 몹시 걸려 지금쯤 형 때문에 숙청당했을 걸 생각하면 괴롭다고 했다. 북에서 외교관들의 가족 동반을 허용치 않고 인질로 남기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겠다고도 했다. 그 자신이 탈출의 결심을 오래전부터 했으면서도 가족 때문에 고민하고 마음이 약해지거나 주저하게 되더라고도 했다.”(1983년 4월 13일 자 5면)

이웅평은 북에 가족을 남기고 왔지만 남에서 가족이 생겼다. 1983년 5월 3일 대한민국 공군 소령으로 임관하고 1년여 후인 1984년 11월 아홉 살 아래인 21세 여성과 결혼했다.

1983년 5월 4일자 2면.

“귀순 용사 이웅평(30) 공군 소령이 오는 11월 2일 오후 1시 공군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신부는 공군사관학교 박예재 교관(국사 담당)의 장녀 선영 양(21·건국대 사범대 음악과 3년). 이 소령은 박씨의 집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배우다 선영 양을 소개받아 사귀어 온 것으로 알려졌다.”(1984년 10월 18일 자 10면)

이웅평은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2학년으로 편입해 학업도 이어갔다. 1987년 북한을 집단 탈출한 김만철씨 일가족이 일본·대만을 떠돌자 한국행을 설득했다. 이웅평은 “나는 부모님을 두고 와 죄책감을 느끼는데 당신은 노모까지 모시고 와 왜 고생시키려 하느냐”고 했다고 한다. KAL기 폭파범 김현희는 우리 당국의 심문에 묵비권을 행사하다가 이웅평·김만철·김신조 등이 설득하자 입을 열었다.

1992년 1월 31일자 18면.

이웅평은 1992년 1월 1천 시간 비행 명예 기장을 받았다. 귀순 후 1800회에 이르는 전국 순회 강연을 한 공적이 평가받았다. 대한민국 공군으로는 비행기 조종을 하지 못했다. 공군대학 군사 정세 담당 교관 등으로 근무했다. 이에 대해 농반진반의 대답을 했다.

“현재 공군대학에서 군사 정세 담당 교관으로 일하는 이 중령은 85년 중앙대에 편입해 정치외교학을 전공했으며, 90년부터 공군대학 지휘관 및 참모 과정을 마쳤다. 그동안 비행기는 전혀 조종하지 않았다. 이 중령은 “비행기를 다시 몰고 북으로 갈까 봐 겁이 나서 비행기 조종을 시키지 않은 것 같다”고 농담을 했다.”(1992년 1월 31일 자 18면)

1995년 10월 3일자 25면.

1995년 10월 대령 진급이 결정됐다. 그러나 이듬해 B형 간염이 발병했고 간경화증으로 악화됐다. 1998년 10월 뇌사자의 간을 이식받아 건강을 되찾았다. 투병기를 담은 책 ‘기수를 삶으로 돌려라’를 출간했다.

“이 대령은 혼수상태에서 ‘저승사자’를 보고 다빈(14) 준기(13) 두 자녀에게 유언장을 남기고, 부인은 현충원에 가서 장지를 보고 오기까지 했다. 그러다 98년 10월 10일. 이 대령은 서울중앙병원에서 뇌사에 빠진 20대 주부의 간을 기증받아 이식 수술을 받았고, 2개월여 동안 중환자실에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고비를 넘긴 끝에 생명을 되찾았다. 지금은 체중도 78㎏까지 늘었고, 서울로 근무지를 옮겨 정상 출근을 한다.”(2000년 6월 15일 자 45면)

건강한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내 간 이식 거부 반응이 나타났다. 수술 후 3년여 지난 2002년 5월 4일 간 기능 부전증으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공군 임관일 다음 날이었다. 북한 공군으로 6년, 대한민국 공군으로 19년간 복무했다.

2000년 6월 15일자 45면.

“일부 군 관계자들은 그가 북한에 두고 온 가족과 남한 생활 적응 문제 등으로 술을 많이 마셔 간이 나빠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귀순 직후부터 그와 가깝게 지냈던 공모(48)씨는 “이씨는 술은 많이 마시지 않았다”며 “술보다는 스트레스가 병인(病因)일 것”이라고 말했다.”(2002년 5월 6일 자 17면)

1996년 5월 29일자 3면.

1996년 5월 23일 북 공군 대위 이철수가 미그19기를 몰고 탈북했다. 이웅평 이후 13년 만이었다. 이철수도 대한민국 공군 소령으로 임관했다. 26년 복무하고 2022년 공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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