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의 시대, 안보의 홀로서기 [기고]

최근 중동 정세는 동맹의 본질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호르무즈해협을 둘러싼 긴장 속에서 각국은 미국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위기 상황에서도 자국 영공 통과조차 허용하지 않는 사례가 빈번히 나타났다. 이는 긴밀한 동맹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각자의 국익을 중심으로 가동된다는 냉엄한 사실을 보여준다. 비록 미 행정부의 정책 기조가 내부 여론에 따라 가변적일 수는 있으나 ‘철저한 이해관계 중심’의 외교 시대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국제 정치의 상수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 앞에서 필요한 것은 감상적 기대가 아니라 냉정한 인식이다. 동맹은 선의에 기대어 유지되는 관계가 아니라, 역할과 책임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같은 구조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미국의 확장억제는 여전히 우리 안보의 중추지만, 그 기반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보다 현실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 동맹은 일방의 보호가 아니라 상호 역할 분담 위에서 성립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흐름은 한반도에서도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그동안 북한 억제에 초점을 맞췄던 주한미군은 이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속에서 보다 넓은 지역을 고려한 전략적 자산으로 운용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임무의 추가를 넘어선 전략적 방향의 근본적 전환이다. 실제 전력 운용에서도 한반도라는 지리적 고정 관념은 점차 약화되고,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이동·재배치되는 '전략적 유연성'이 강화되는 추세다.
한편 미국의 전략 문서들은 북한 억제의 1차적 책임을 한국군이 담당해야 한다는 방향을 점차 명확히 하고 있다. 이는 전력 운용의 중심축이 서서히 한국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미군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전략적 역할을 수행하고, 한국군은 한반도 방위의 핵심을 맡는 구조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동맹의 약화라기보다 ‘역할 재조정’의 성격이 강하며, 동시에 우리의 책임과 부담이 그만큼 커졌음을 의미한다.
돌이켜보면 '공짜 안보'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형태로든 안보 비용은 분담되어 왔다. 한국 역시 이제는 단순한 보호 대상을 넘어, 동맹의 균형을 함께 떠받치는 핵심 축에 서 있다. 세계적 수준의 국방력과 산업 역량, 그리고 K방산의 경쟁력은 이러한 위상 변화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한다.
지정학적 조건 또한 우리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고 있다. 한반도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충돌하는 요충지다. 여기에 반도체와 배터리 등 첨단 공급망에서의 위상까지 더해지면서, 한국은 더 이상 강대국 틈바구니의 '종속 변수'가 아닌, 우리의 선택으로 질서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과 정교한 방향 설정이다.
따라서 우리의 전략적 지향점은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해야 한다. 자주적 군사 능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동시에, 동맹과의 연합 억지력을 더욱 세련되게 발전시켜야 한다. 또한 핵심 산업의 전략적 가치를 외교적 지렛대로 활용하는 균형 잡힌 접근이 긴요하다.
이제 '미국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수동적 통념에서 단호히 벗어나야 한다. 동맹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과거의 우정이 아니라 현재의 실력이다. 감상적 의존성이나 구태의연한 동맹관으로는 내일의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 우리가 스스로를 지킬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동맹도 비로소 건강하게 기능한다.
오늘의 한국은 도움을 구걸하는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수준의 국방력과 경제력을 갖추었으며,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위치에 섰다. 이는 단순한 성취를 넘어, 그에 걸맞은 무거운 책임과 역할을 요구받는 단계에 진입했음을 뜻한다.
지금은 의존과 자립 사이에서 머뭇거릴 때가 아니다. 우리는 이제 스스로 안보를 책임져야만 하는 냉혹한 시험대에 떠밀려 있다.

범공천 전 육군대학 전쟁사 교수·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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