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사랑해서 헤어질 수 없다"던 남자의 진심은 [이수진의 이혼 이야기]

이수진 2026. 5. 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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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사랑한다"며 이혼을 거부하던 남편이 양육비 지급과 재산분할 앞에서 돌변하자 법원이 아내와 아이들의 권리를 인정하며 이혼을 판결했다./남도일보·AI 생성 이미지

"저는 여전히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왜 헤어져야 하나요?"

이혼 사건을 다루다 보면 '단골 손님'처럼 등장하는 키워드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 이혼을 원하는 쪽도, 이혼을 거부하는 쪽도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듭니다. 어떤 이는 사랑하는데 왜 헤어져야 하냐 호소하고, 어떤 이는 사랑하면 놓아 달라며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사랑을 부릅니다.

중고등학생 자녀 둘을 키우는 40대 여성인 제 의뢰인은 이혼을 원했습니다. 상대방인 남편은 의사로 남 부러울 것 없는, 사회적으로 번듯하게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누구 하나 부럽지 않은 화목하고 풍족한 가족이었습니다. 하지만 화려한 겉면과 달리 실상은 남편의 아내에 대한 무관심과 무시로 점철된, 곪아가는 가정이었습니다. 외벌이 남편은 아내를 가사노동만 하는 무능한 존재로 치부했고, 생활비 지출 하나하나에 트집을 잡으며 아내의 숨통을 조였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이어진 잦은 외박은 일상이었습니다.

모멸감에 지친 아내가 이혼하겠다며 소송을 냈습니다. 남편은 강하게 맞섰습니다. 남편은 '가족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반드시 가정을 지키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왜 소송을 시작했는지, 마음 속 얼마나 깊은 원망이 쌓여 있는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보통 이혼 소송은 짧아야 수 개월, 길면 수 년이 걸리는 지난한 싸움입니다. 그 과정에서 처음엔 보이지 않던 다양한 면모가 드러나곤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소송에서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내에게 지급되던 양육비가 중단된 것입니다.

당장 생활이 막막해진 의뢰인의 항의에 남편으로부터 돌아온 답은 '안 준다'가 아니라 '못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일을 그만뒀다"며 이혼 소송으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커 도저히 일을 지속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양육비는 소득을 기준으로 산정되는 게 맞지요? 저는 지금 소득이 없어서 양육비를 드리기가 어렵습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전문직 면허가 있으면 법원이 현재 소득만으로 판단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자 남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아픈데요. 아파서 일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에요."

남편은 재산 문제에서도 '더 이상 가족에게 양보할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결혼할 때 마련한 아파트는 혼인기간 시세가 크게 올랐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부모님의 도움과 자기의 벌이를 앞세워 아이들과 함께 살아야 할 아내 몫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할 수 없다던 사람이 돌연 아이들의 밥값, 학원비, 집값 앞에서는 자기 자신이 가장 우선했던 것입니다.

남편의 '진짜 속 마음'은 그 스스로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법원은 남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양육비에 있어서 남편이 일을 그만두게 된 이유와 현재 상황을 떠나 그가 앞으로 가정을 위해 짊어져야 할 의무를 저버려선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재산분할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내와 아이들의 주거 안전성을 우선해서 판단했습니다. 제 의뢰인은 길고 지친 싸움 끝에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됐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법정에서 이토록 공허하게 들릴 때가 없습니다.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줄 듯 말하던 그 뜨거운 고백이, 양육비와 재산분할이라는 현실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목격하는 일은 늘 씁쓸합니다. 끝까지 잘잘못을 가려 한 푼이라도 손해 보지 않으려 애쓰는 그 처절한 사투를, 과연 아이들은 어떤 시선으로 기억하게 될까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그 지독한 이기심이 남기고 간 자리가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풍경입니다.

이수진 변호사 ·법무법인 수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