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가장 부유한 노인들이 오고 있다

윤홍우 기자 2026. 5. 3.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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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우 정치부장
자산 축적한 386세대 은퇴 본격화
청년, 취업난 등에 보편 복지 반감
부유한 노년시대엔 복지 달라져야
기초연금 ‘하후상박’ 개편 등 절실
한국개발연구원(KDI) 이승희(왼쪽), 김도헌 연구위원이 지난해 2월 정부세종청사에서 KDI FOCUS ‘기초연금 선정방식 개편방향’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에 집 한 채 갖는 일이 청년들에게 꿈이 된 시대에, 가장 두터운 자산을 가진 세대가 노년 복지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다. 올해부터 만 65세가 되는 1960년대생, 이른바 386세대다. 최근 만난 한 재정 당국 고위 관계자는 이를 두고 “역사상 가장 부유한 노인들이 오고 있다”고 했다. 산업화의 결실과 안정적 일자리, 부동산 가격 상승의 수혜를 함께 누린 세대가 기초연금 수급 연령대에 편입되면서 세대 간 불균형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고 있다.

386세대의 생애 궤적은 한국 경제의 고성장 흐름과 맞물려 있다. 이들이 사회에 진출하던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는 연 10% 안팎의 고성장이 이어지던 시기였다. 대학 졸업장이 안정적인 취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부동산을 통해 자산을 크게 늘릴 기회도 있었다. 대한민국 가계 자산의 상당 부분이 5060세대에 집중돼 있다는 통계는 이들이 과거의 노인 세대와는 다른 조건에서 노년을 맞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들의 삶에도 엄청난 굴곡이 있었다. 부모 부양과 자녀 교육을 동시에 떠안았고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몸으로 부딪히며 이겨냈다. 치열하게 일하며 대한민국을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는 데 기여했다. 그 노력과 성취를 가볍게 볼 수 없다. 다만 냉정하게 짚어야 할 사실도 있다. 이들은 고생 속에서도 자산을 축적할 수 있는 시대적 기회를 가졌다는 점이다.

문제는 다음 세대가 마주한 현실이 전혀 다르다는 데 있다. 압축 성장의 시대는 끝났고 잠재성장률은 낮아졌다. 안정적인 일자리는 줄었고 인공지능(AI)의 확산으로 청년들의 사회 진입의 문턱은 더 높아지고 있다. 서울 중위권 주택 가격이 12억 원에 이르는 상황에서 집 한 채를 마련하는 일은 사실상 꿈이 됐다. 결혼과 출산, 내 집 마련, 노후 준비가 한꺼번에 멀어진 세대다.

그런데 우리의 기초연금은 여전히 과거의 빈곤한 노인상을 전제로 작동하고 있다. ‘소득 하위 70%’에게 지급되는 현재의 방식은 세대 간 정의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던진다. 상당한 규모의 부동산을 보유한 은퇴자에게까지 젊은 세대의 혈세로 현금을 지급하는 것이 과연 빈곤 구제라는 제도 본연의 목적에 부합하는가. 이재명 대통령이 올해 초 개편 논의를 꺼낸 것도 이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제도 개편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손을 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기초연금은 노년층이 매달 체감하는 현금 급여다. 동시에 노년층은 투표 참여율이 높은 유권자 집단이다. 정치권이 선거를 앞두고 가장 조심스러워하는 의제가 될 수밖에 없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국회에서 기초연금 개편 논의가 쏙 들어간 것도 이런 정치적 부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개혁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기초연금은 이제 ‘정밀한 타기팅’으로 전환해야 한다. 연령과 소득 하위 70%라는 기준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부동산 자산의 실질적 가치까지 엄격히 반영해야 한다. 수도권에 고가 주택을 보유한 시니어에게는 주택연금 등 자산 유동화의 길을 넓혀주되, 기초연금 수급 대상에서는 과감히 제외하는 정교한 설계가 필요하다. 이렇게 아낀 재원은 실제 노인 빈곤층에게 더 두텁게 돌아가야 한다. ‘하후상박’의 원칙을 분명히 세워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손대지 않으면 재정 부담은 더 커지고 개혁의 비용도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386세대의 역할도 필요하다. 민주화를 이끌고 국가 성장을 견인하며 누구보다 뜨거운 정의감을 보여줬던 이들이 이제는 세대 간 공존을 위해 연대의식을 발휘해야 한다. 자산 여력이 있는 은퇴 세대가 조금 더 넓은 시야로 제도 개편을 받아들이고 정치권이 그 동의를 바탕으로 빈곤 노인에게 더 두터운 지원을 설계할 때 기초연금은 세대 갈등의 불씨가 아니라 세대 연대의 장치가 될 수 있다. 그것이 386세대가 이룬 눈부신 성취를 다음 세대와 함께 지켜가는 길이다.

윤홍우 기자 seoulbird@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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