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젤과 오데트가 성을 나설 때…정구호가 그리는 ‘발레리나 해방일지’ [인터뷰]
26일 예술의전당 ‘테일 오브 테일스’
김지영, 강미선이 엮는 하나의 감정
![정구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대한민국발레축제 ‘테일 오브 테일스’를 통해 20년 만에 발레 무대에 돌아온다. [대한민국발레축제 제공]](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3/ned/20260503174814881kfwr.jpg)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아름다워 보이기만 했던 발레리나 짊어진 가혹한 운명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미니멀리즘의 절정’, ‘무대 위 탐미주의자’인 정구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20년 만에 발레 무대로 돌아온다. 서울시무용단 ‘일무’, 국립무용단의 ‘향연’ 등을 연출하며 한국무용계의 코어로 자리했던 그는 올해 대한민국발레축제를 통해 신작 ‘테일 오브 테일스(Tale of Tales)’ (5월 21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를 선보인다.
국립발레단의 창작 발레 ‘포이즌(Poison)’ 이후 오랜만에 올리는 무대에서 정구호는 완전히 색다른 스토리텔링 방식을 택했다. 그는 발레리나가 중력을 거스르는 에테르(고전 발레가 지향하는 ‘공기 같은 가벼움’)적 아름다움 이면에 가려진 무용수의 실존적 고통을 들여다봤다. 이를 위해 그는 클래식 발레의 ‘네 개의 성지’로 불리는 고전을 재해석했다. ‘라 실피드’, ‘잠자는 숲속의 미녀’, ‘백조의 호수’, ‘지젤’을 해체해 그 중심에 선 여주인공들의 감정을 다시 들여다본 것이다. ‘고전’ 안에 갇힌 여성을 조명하되, ‘고전 발레’가 요구한 발레리나의 의미를 길어올려 ‘해방’의 길을 찾는 서사다.
이 작업을 시작하며 정구호는 “‘축제의 성격’과 ‘발레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했다”고 한다. 그가 찾은 답은 “ 발레리나에게 주어진 역할이 시대의 거울이자, 그들을 옥죄는 가혹한 무게였다”는 것이다.
작품의 핵심은 ‘발레 속 여성’이다. 그는 자료 조사 과정에서 발레 안에서 발레리나가 가진 역할의 중요성과 무게를 새롭게 발견했다.
“발레리나라는 존재가 극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지만, 동시에 그들이 수행해야 하는 롤은 시대를 반영하는 동시에 굉장히 가혹해요. 어려운 동작, 정해진 힘든 감정, 그리고 스토리를 끝까지 책임지고 끌고 가야 하는 의무…. 저는 이것을 발레리나에게 내려진 ‘무거운 철퇴’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단순히 기술적인 완벽함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용수가 맡은 역할을 수행하며 겪는 ‘내면의 감정’에 집중하고자 했다. 무대 위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조차, 발레리나는 형식이라는 엄격한 틀 안에서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다는 통찰이다.
작품의 형태는 낯설다. 네 개의 유명한 발레 작품들이 마치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가 정구호의 손길을 거쳐 하나의 흐름으로 엮인다. 그는 이를 ‘감정에 대한 동작의 분석적 재해석’이라고 했다.
![정구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대한민국발레축제 ‘테일 오브 테일스’를 통해 20년 만에 발레 무대에 돌아온다. [대한민국발레축제 제공]](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3/ned/20260503174815215qwzt.jpg)
‘테일 오브 테일즈’는 총 6장으로 구성된다. 서곡과 종곡, 4개의 본 장면이다. 첫 장과 마지막 장을 제외한 가운데 4개 장면은 각 클래식 발레의 하이라이트를 그대로 가져오거나 짜깁기했다.
정구호는 “표면적으로는 기존 작품들의 조각을 모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단순한 하이라이트 모음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정구호가 작품에서 바라본 것은 여주인공들의 감정이다. 첫 번째 작품부터 네 번째 작품까지 감정이 변화하고 전이되는 궤적을 보여준다. “감정에 따른 동작을 세밀하게 쪼개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을 통해 “익숙한 동작에서 새로운 감정의 깊이를 보게 될 것”이라는 의도다.
시각적으로 눈에 띄는 변화는 의상이다. 무대 위 무용수들은 고유의 색채가 지워진 ‘튀튀’를 입는다. 정구호는 화려한 색감이라는 장식적 요소를 과감히 소거해, 관객의 시선이 무용수의 근육과 감정의 파동에 머물게 했다. 발레리나의 숙명적 난이도를 극대화해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이 처한 고독한 투쟁을 미니멀리즘으로 시각화했다.
캐스팅 역시 당대 최고의 무용수인 김지영 강미선이 나눠 연기한다. 캐스팅의 기준은 테크닉. 정구호는 “한 주인공이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이어서 풀어나가기를 원했는데, 발레 동작이 어렵다 보니까 한 주인공이 하기가 쉽지 않아 둘로 나눴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연기하나 이 둘은 하나다. 그는 “무용수는 달라져도 서사 속 주인공은 한 명이다. 그가 여러 발레의 세계를 투어하듯 감정을 완성해 나가는 것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테일 오브 테일스’는 동화처럼 아름다웠던 발레리나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박수와 함성 속의 우아한 동작들은 여성 무용수들에게 지워진 무거운 의무의 산물이었다고 무대는 이야기한다. 김주원 감독은 “여자 무용수에게 주어진 배역은 지극히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며 실연의 상처에 죽음으로 향하거나 기다림의 연속이나,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발레리나들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투쟁하며 무대 위에 선다”고 말했다. 무대가 요구하는 아름다운 몸과 고난도 테크닉을 수행하기 위해 수십 년을 분투하며 삶의 주체성을 잃지 않는 이들의 뒷면을 이제야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비극으로 끝맺던 고전의 서사는 정구호의 무대 위에서 비로소 주체적인 데가제(해방)를 맞는다. 억압된 의무의 틀을 벗어나 자유를 향해 발을 내딛는 발레리나의 마지막 도약은 그 자체로 거대한 해방의 서사다. 정구호는 “주체적 선택으로 해방을 맞이하는 발레리나들의 여정이 시각적으로도 구현될 것”이라며 기대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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