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여백에서 춤을 출까요, 달리기를 할까요

초록이 한껏 몸을 부풀리고 있습니다. 프랑스 시인 필리프 자코테는 “그 모든 색 중에서 녹색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초록수첩’, 류재화 옮김, 난다 펴냄, 2025)라고 말했습니다. 늦봄이라 불러도 좋고 초여름이라 불러도 좋은 계절입니다. 연두는 초록으로, 초록은 진녹색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잎과 잎이 겹쳐 또 다른 초록을 만들어내는 일은 신비롭습니다. 초록으로 뒤덮인 땅에 꽃가루가 내려앉고 군데군데 민들레가 노랗게 피었습니다. 빽빽하게 자라난 것들과 띄엄띄엄 자리 잡아 존재를 드러내는 것들. 그 사이를 걸어가며 일상을 돌아봅니다.
시도 그렇습니다. 시집을 펼치면 어떤 시는 글자가 빼곡하고 어떤 시는 글자보다 여백이 넓어 보입니다. 시의 두드러지는 점 중 하나는 연과 행일 텐데요. 어릴 때는 글자가 많지 않다는 이유로 시를 좋아했습니다. 시를 읽고 쓰면서는 글자를 둘러싼 여백 또한 시라는 것을 깨달았고요. 그래서 시는 글자만 빠르게 읽어 내려가선 안 됩니다. 그 여백을 충분히 즐겨야 해요. 빈 공간을 천천히 오랫동안 거닐어야 합니다. 마치 봄과 여름 사이를 즐기는 우리처럼요.
빈 공간을, 천천히 오래
왜 연과 행을 나눌까요? 시가 노래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행이 끝나는 자리는 악보의 쉼표와 같지요. 그래서일까요. 문장을 짧게 끊고 몇 줄씩 묶으면 시가 된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연과 행을 나눌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좋아하는 시를 꺼내 읽어보세요. 이 시는 왜 여기서 행을 나누었을까? 왜 연을 이렇게 갈랐을까? 혹은 왜 나누지 않았지?
그 답은 대개 리듬, 이미지, 의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셋은 쉽게 분리되지 않습니다. 어느 쪽에 무게가 더 실려 있는지 보시죠. 리듬부터 생각해봅시다. 산문은 문장부호를 따라 호흡합니다. 쉼표에서 쉬고, 마침표에서 멈추지요. 시는 문장부호만으로 숨 쉬지 않습니다. 독자는 행이 끝나는 자리에서도 머무릅니다. 같은 문장이라도 어디서 행을 바꾸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울림이 생기는 이유입니다. 호흡을 빠르게 할지, 느리게 할지, 어디에 틈을 낼지 고민해야 합니다.
행은 특정 단어를 밀어올리기도 합니다. 행의 첫머리나 끝에 놓인 단어는 중간에 있는 단어보다 독자에게 더 강하게 다가갑니다. 행을 어디서 가르느냐에 따라 단어가 커지기도 작아지기도 하지요. 이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행에 하나의 이미지를 온전히 담을지, 아니면 그 이미지를 더 잘게 쪼개어 차례대로 도착하게 할지 선택해야 합니다. 의미 역시 마찬가지예요. 익숙하고 예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을 나눌지, 낯설고 이질적인 방식으로 나눌지에 따라 시의 결이 달라집니다.
행만 이야기한 것 같은데요. 연 구분도 중요합니다. 연과 연 사이, 그 빈 공간에서 독자는 달리기도 하고 밥도 먹고 꿈도 꿉니다. 앞 연을 곱씹으며 경험을 끌어오고, 생각을 펼치고, 이미지나 감각을 동원하고, 상상도 합니다. 그러다 다음 연을 읽으며 방금까지의 혹은 기존의 생각이 더 커지거나 깨지는 순간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때 독자는 시 속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연과 연 사이에 독자가 어떤 시간을 보내게 할 것인지 역시 고민해야 합니다.
다시 돌아가서, ‘왜 여기에서 행을 나누고 연을 구분했을까’라는 질문은 ‘무엇을 어떻게 쓰고 누구에게 가닿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나눈 행과 연이 의도와 맞아떨어지는지 짚어가면서 여러 번 고쳐야 합니다. 소리 내어 읽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귀가 알아차리는 어색함이 있습니다. 다 쓰고 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세요. 내 의도가 반영됐는지 확인해봅시다. 물론 의도대로 읽지 않아도 괜찮지요.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의도가 도달한 곳을 확인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귀는 알아차려요, 그 어색함
아직 쓰기에 익숙하지 않다면 다른 시를 많이 읽어보세요. 행과 연을 어떻게 나누었는지 살피며 그 ‘효과’를 느껴보세요. 정답은 없습니다. 왠지 어렵고 멀게 느껴지는 시일수록 더 들여다보세요. 익숙하고 편안한 것과 불편하고 먼 것을 모두 가까이 두어야 합니다. 익숙하고 편안한 것이 늘 좋은 것도 아니거든요. 그것들을 깨뜨릴 때 여러분의 시가 한 번 더 나아갑니다.
그럼 실제 시를 한번 볼까요? 제 시의 일부를 가져왔습니다. 아무래도 마음대로 쪼개고 뭉치려면 제 시가 편하니까요. 잘 쓴 시라서가 아니라 예시를 보여주려고 들고 온 거예요. ‘여름, 연루’(권누리 외 7명 지음, 빠마 펴냄, 2025)라는 기후 시 앤솔러지에 실린 시 ‘아주 작은 목격’의 1~2연입니다.

(1)은 원문입니다. 이미지대로 행을 나누었습니다. 호흡도 비교적 안정적이지요. 독자의 읽는 흐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1연에서 숲을 보여주었다면, 2연은 그 숲에 발을 들이는 장면입니다. 의미에 따라 연을 나누었습니다. 2연을 보시면 흙과 이끼에서 나무뿌리로, 부드러운 것에서 단단한 것으로. 숲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발에 닿는 것들이 달라지지요. 이에 따라 행을 나누었습니다.
(2)는 행을 덜 나눈 버전이에요. (1)과 비교했을 때 숲이 한눈에 펼쳐지고, 숲으로 들어가는 걸음이 조금 더 빠르게 느껴지지요? 1연에서 바람과 새와 소리가 한 호흡으로 이어지면서 숲의 전체 분위기가 단번에 들어옵니다. 2연 끝 ‘인사’도 (1)에 비해 더 도드라집니다. 행이 거기서 시작되면서 그 단어가 혼자 남겨지기 때문이에요. 같은 ‘인사’인데도 무게가 다르게 느껴지지요.
(3)은 원문을 조금 더 잘게 쪼갠 것입니다. 행 하나에 동사 하나씩만 남기다시피 했습니다. ‘흔들고’ ‘밟고’ ‘꺾으며’가 각각 따로 서면서 동작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보입니다. 숲을 침범하는 느낌도 들고 숲을 지나는 시간이 느려지는 느낌도 들지요. 같은 장면인데 (2)와 (3)이 이렇게 다른 속도로 읽힙니다.
즐겁게 소리 내다보면
세 버전 중 제가 고른 것은 (1)이지만, 그것은 제 선택일 뿐이에요. 중요한 것은 행과 연을 다르게 놓았을 때 시가 실제로 달라진다는 것, 그 차이를 직접 느껴보는 것입니다. 자신이 쓴 시 한 편을 꺼내 이처럼 세 가지 방식으로 다시 써보세요. 각각을 소리 내어 읽다보면 어떤 방식이 자신의 의도에 가장 가까운지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어디서 숨을 고르고 어디서 달려갈 것인지, 그 선택이 모여 시가 됩니다. 여백은 잠깐의 안식처예요. 독자는 그 안에서 쉬고, 상상하고,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합니다. 여백을 살피며 시를 써봅시다. 반대로 여백에서 뛰놀며 시를 읽어봅시다. 더 즐거울 거예요.
박은지 시인·‘여름 상설 공연’ 저자
독자 글
이번에도 일곱 분이 시를 보내주셨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답 메일을 보냈습니다. 혹시나 메일을 받지 못한 분이 계시면 han21@hani.co.kr로 연락 주세요. 봄을 주제로 쓰신 분이 많았는데, 같은 계절을 두고도 이렇게 다른 자리에서 다른 목소리로 써오셨구나 싶어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이번에 보내주신 시들을 읽으며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는데요. 모두 무언가를 오래 바라본 사람의 시라는 것입니다. 아들의 눈동자, 봄비 맞는 벚꽃, 매일 딛고 지나치는 돌계단, 수년을 곁에 둔 화분. 그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오래 들여다본 것 앞에서 시가 시작된다는 걸 이번 시들이 보여주었습니다.
감정을 말로 설명하고 싶은 마음도 여러 시에서 느껴졌습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독자가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자리가 줄어듭니다. 시는 감정을 전달하는 것도 좋지만, 감정이 일어나는 장면을 만드는 게 더 좋거든요. 설명하려는 마음이 올라올 때, 그 마음을 잠시 눌러놓고 그 감정이 깃든 구체적인 장면이나 감각을 한 번 더 떠올려보세요. 이미 여러분 곁에 시가 있습니다.
5월에는 서하람님의 시를 함께 읽고 싶습니다. 돌계단이라는 사물에 말을 거는 방식이 좋았습니다. ‘울퉁불퉁한 모서리’의 ‘동그란 곡선’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합니다. 모순된 것들을 동시에 품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하람님의 시를 읽으며 돌계단의 힘을 느껴봅시다.
돌계단에게
매일 거기에 모여 있는 너희를 바라본다
어느 숲속 어드메에서 곱게 캐온 너와 너의 친구들
쪼르르 나란히 올라선 모습이 정겹다
울퉁불퉁한 모서리지만 어딘가 동그란 곡선들
오히려 더 정답다
너희를 딛고 힘차게 위아래로 지나가는 사람들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다정한 말을 건네는 너희들
지구의 많은 것을 오래 품고 지탱할 줄 아는 너희가
나는 세상 무엇보다도 든든해서
갑자기 와락 안아주고 싶어진다
들리지 않아도 들리는 듯한 목소리를 따라
내 고민을 주절주절 늘어놓고 싶어진다
오늘도 거기에 버티고 서 있어 주어서
눈물겹게 고맙다고
고백하는 어느 한낮의 오후.
서하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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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글을 보내주세요
이번 달에는 연과 행에 집중해 시를 써봅시다. 먼저 초고는 자유롭게 쓰세요. 여러분의 리듬대로 쓰셔요. 초고를 완성한 후, 한 행에 담긴 것을 둘로 쪼개거나, 여러 행을 하나로 합치거나, 연과 연 사이의 빈 공간을 옮겨보세요. 같은 문장인데 달라지는 차이를 직접 느껴보는 것이 이번 달의 과제입니다. 다시 초고의 연과 행으로 돌아가도 괜찮아요. 시를 보내주실 때 원래 버전과 고친 버전을 함께 보내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이번에도 다섯 분의 시에 개별 피드백을 드릴 예정입니다.
주제: 행과 연에 집중해 시 쓰기(자유 주제)
분량: 제한 없음
마감: 2026년 5월17일
보낼 곳: ha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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