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도중 돌아가신 부모님, 딸의 아픔, 억울한 옥살이…오뚝이 ‘치킨왕’의 감사와 나눔 [온기]

김도윤 2026. 5. 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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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溫記): 따스함을 기록하다]
치킨 프랜차이즈 가마치통닭 창업자 김재곤 회장
역경 딛고 일어선 원동력 “포기하지 않으니 결실”
지적장애 가족들 후원, “아픔 알기에 돕고 싶었어”
가마치통닭 창업주 김재곤 회장이 지난달 24일 오전 본사 집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헤럴드경제=김도윤 기자] “다섯 번의 어려운 고비를 넘어서 여섯 번째 만에 제가 완전히 회복되고 일어설 수 있었어요.”

지난달 24일 서울 서초구 가마치통닭 본사 집무실에서 만난 김 회장은 자신의 삶을 ‘5전 6기’라고 설명했다. 다섯 번 무너지고 여섯 번째에 완전히 일어섰다고 했다. ‘온기’를 나누는 지금의 그를 설명하려면 그 5번의 좌절을 먼저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다.

그는 10월이 되면 유독 춥게 느껴진다고 했다. 1972년 10월 그의 양친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1958년생인 김 회장은 그때 겨우 14살이었다. 서울 동신중학교에 다니던 중학생 김 회장은 수업 도중 부모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없는 돈에 도움을 받아 경희대학교 병원 영안실에서 장례를 치르고 친척들의 도움으로 고향 선산에 부모님 유골을 모셨습니다. 며칠을 울면서 지냈어요.”

장례를 치르고 나니 현실이 남았다. 소년가장으로서 숙식과 빨래 그리고 생활고를 감당해야 했다. 혼자서 여의찮았다. 동생들은 친척들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어린 동생 둘은 큰 집으로 갔다. 그는 신문을 돌리며 학교에 다녔고 신문 배달로 2000원을 벌며 20원짜리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동아일보 석간신문을 돌리고 학교를 마치면 곧장 지국으로 향했다. 남대문시장에 있던 닭집에 취업해 하루 4시간 쪽잠을 자고 종일 닭을 잡고 배달하기도 했다. 처음에 5000원이던 월급은 1년을 버티자 1만원으로 올랐다. 하지만 그 돈으로는 동생들과 함께 살 수 없었다. 그는 닭집을 나와 레스토랑에서 1년간 서빙했고 낮에는 학원에 다니며 운전면허를 준비했다.

김재곤 회장은 지난 3월 8일 인천 해인교회를 찾아 삼계탕 1000마리를 기부했다. [해인교회 제공]

두 번째 시련은 27살이던 1984년 4월 찾아왔다. 중동 취업을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2년간 해외에 나가 돈을 벌어 전셋집을 마련하고 개인택시를 사겠다는 꿈을 품었다. 대형 1종 면허를 따고 대우건설 해외 파견 시험과 신체검사까지 통과했다.

그러던 어느 새벽 배달을 하며 마지막 거래처로 향하던 길이었다. 고갯길에서 중학생 두 명이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다 그의 트럭을 쏜살같이 지나서 옆에 있던 택시 트렁크를 들이받고 넘어졌다. 그가 몰던 트럭엔 사고 흔적조차 없었다. 학생들은 2주 치료가 필요한 가벼운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택시기사는 학생들에 대한 책임을 피하려고 김 회장이 뺑소니한 것처럼 거짓 진술했다. 이 일로 서대문구에 있는 서울구치소에 두 달간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미 지난 10년을 힘들게 살아왔는데, 내 인생을 망친 저 사람들한테 복수하고 나도 인생을 여기서 끝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괴로웠던 경험이었죠.”

김재곤 가마치통닭 회장. 임세준 기자

시련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애지중지하던 10살 손아래 막냇동생이 숨졌다. 동생은 중앙대 전기과에 진학해 2학년 때는 학년 수석대표로 장학금도 받은 수재였다. 어느 날 동생이 사라졌단 연락을 받았고, 수소문하다가 서울의 어느 절벽에서 실족해 사망했단 사실을 알게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결혼 후 얻은 첫딸은 7개월 무렵 몸이 뒤틀리고 눈동자가 돌아가는 경련을 일으켰다. 서울대학교병원을 찾았다. 악성 간질과 뇌성마비라는 의사의 진단을 들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김재곤 회장이 지난 2023년 12월 지역 내 경로당을 찾아 닭을 선물하고 있다. [가마치 제공]

이 마저도 모자랐는지 또 하나의 마지막 시련이 남아 있었다. 성공 뒤에 느닷없이 찾아왔다. 목우촌과 마니커 충주공장 대표이사로 일하던 중 회사가 매각되며 일을 그만둬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는 이 기회에 개인 양계사업으로 노후를 준비하고 수익으로 선교활동을 하겠단 일념으로 큰 대출을 받아 충청북도 충주에 1만평(3만3057㎡) 부지를 매입하는 계약을 했다. 양계장을 조성하기 위해 필요한 환경평가 등 필요한 절차를 모두 마쳤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주민들의 민원과 반대를 직면하면서 사업은 고꾸라졌다.

막대한 대출금을 갚지 못하지 집은 경매 위기에 놓였다. 빚만 29억원. 매달 이자만 1000만원을 내야 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젊은 시절처럼 막일이라도 하며 빚을 갚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매일 기도원에서 새벽기도를 올렸다. 희망의 빛은 갑자기 찾아 왔다. 어느 날, 김포에서 도계장을 운영하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가동률이 떨어졌으니 운영을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인생 막장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본 순간’이라 했다.

친구의 요청을 받아들여 영업본부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양계업계서 일하며 알게 된 지인들이 돕겠다고 연락해 왔다. 적자에 허덕이던 도계장은 흑자로 돌아섰다. 이것은 완전한 재기의 발판이 됐다. 이후 가마치통닭을 론칭했고 전국구 브랜드로 일궈냈다.

회사 사훈 “정직과 성실을 자본 삼아 이웃에게 나눔을”

산전수전 고난을 이겨내 온 김 회장은 이제 사회적 약자로 시선을 돌린다. 그는 지적장애 자녀를 둔 가정들을 돕고 있다. 뇌전증과 뇌성마비를 앓는 딸을 돌보며 비슷한 처지의 엄마, 아빠들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 딸처럼 정신적 지체를 가진 사람과 가족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그래서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의 딸은 처음에 ‘길어야 2년쯤 산다’는 말을 들어야 했지만 가족의 극진한 보살핌 덕에 40살이 된 지금도 건강히 살고 있다.

그는 말할 수 없고 스스로 몸을 가누기 어려운 아이를 키우는 10개 가정을 선정했다. 주변 지인들을 통해 소개받고 추천받았다. 그리고 올해부터 2곳의 가정에 매달 간병비 100만원을 대기 시작했다. 형편이 어려워 보호자가 홀로 돌봄을 감당해야 했던 가정이다. 생계를 꾸려 나가려면 밖에 나가 일을 해야 하는데, 아픈 아이를 돌보느라 일자리도 찾지 못하는 처지의 이들이었다.

그의 목표는 모두 10개 가정을 돕는 것이다. 매달 300만원씩 지원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가 지금 지원하는 두 가정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김 회장은 감정에 휩싸여 잠시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그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처럼 주는 사람도 모르게 주고 받는 사람도 누구에게 받는지 모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혹시나 도움을 받는 분들이 마음이 상하진 않을까 조심스럽다”고 했다.

김 회장의 온기는 교정시설과 재난 현장으로도 발걸음이 넓어졌다. 지난 4월에는 경기 여주의 소망교도소를 찾아 수용자들을 격려하며 “미움과 원망 대신 용서를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지난 2월에는 서울 서초구에 있는 다니엘복지원에, 지난해 3월에는 강원 산불 피해 지역에 각각 지원을 이어갔다.

김 회장은 ‘작은교회 살리기 운동연합’, ‘전국노숙인시설협회’, ‘사회적협동조합 희년’ 등을 통해 취약계층 지원도 지속하고 있다.

지난해 6월부터는 매달 1000~2000봉의 삼계탕을 정기 후원하고 있는데 서울역·영등포 무료급식소를 비롯해 수원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 인천 재물포 밥집, ‘내일을 여는집’ 등 전국 약 40곳의 노숙인 시설과 급식소로 전달된다. 연간 기부 규모는 생닭 10만 마리 이상이다. 폐지 수집 노인, 가정폭력 피해자, 자립 노숙인 등 지역 취약계층의 식사 지원도 이어가고 있다.

김 회장은 여러 번 넘어졌고, 그럼에도 늘 재기했다. 혼자만의 힘으론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고 믿는다. 절망의 순간에 그를 도운 이들을 잊지 못하는 그는 “고마움을 어려운 이웃과 나누는 데 쓰고 싶다”고 말했다.

[헤럴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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