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수 박사의 조선왕릉 이야기] 34. 조선왕릉 혜릉

하인수 문학박사 (풍수지리 전공) 2026. 5. 3.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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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 혜릉의 비극…단의왕후 삶과 초라한 왕릉의 진실
남편·자식 복 모두 잃은 왕비, 세자빈 신분 장례가 남긴 흔적
장명등 없는 유일한 조선왕릉…풍수적으로도 기운 빠진 능역
▲ 혜릉 전경(궁능유적본부)

혜릉은 제20대 경종의 정비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의 단독능이다. 경종의 첫 번째 부인인 단의왕후 심씨는 청은부원군 심호의 딸로서 숙종 12년 1686년 5월에 태어나 숙종 22년 1696년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11세에 간택(揀擇)되고 15세에 혼례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승하로 3년 상을 치른 후 18세에 혼례를 올렸고, 혼례를 올린 지 4개월 지나 아버지 심호가 사망한다. 경종이 보위에 오르기 2년 전인 1718년 단의왕후는 갑자기 혼절하더니 31세의 나이에 요절한다. 소생 없이 승하하여 같은 해 4월 19일 동구릉에 모셔졌다. 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에 병으로 죽어 자손이 없는 원(園)이었지만, 경종이 즉위하면서 왕후로 추존되고 원(園)은 능(陵)으로 추봉되었다.

▲ 능침(궁능유적본부)

어려서부터 매우 슬기로우며 예쁘고 온순하여 11세에 간택(揀擇)에 뽑혔다. 윗분들을 받들어 섬기는 데에는 정성과 효도가 돈독하고 지극하였으며, 세자인 동궁(東宮)을 섬기는 데는 반드시 공경하고 삼가서 곡진하게 예절을 갖추었다. 임금이 매우 아끼고 중하게 여겼는데, 상(喪)을 당하니, 임금이 통곡하고 애도하였다고 실록에 기록하고 있다.

▲ 정자각
▲ 향어로

왕세자빈 심씨가 승하하자, 숙종은 승하 열흘 후 택지(擇地)에 대해 하교하는 등 많은 관심을 보이지만 아무리 왕이라 해도 신분에 따른 절차에는 어찌해 볼 방법이 없던 것으로 보인다. 2월 24일 묘소 도감(墓所都監)에서 빈궁(嬪宮)을 장사 지낼 땅을 택점(擇占)하였는데, 모두 세 곳이었다. 그 도형(圖形)을 바치자, 숙종이 명하여 동구릉 18대 현종 숭릉(崇陵) 안의 유좌(酉坐)의 언덕에 쓰도록 정하였다. 그런데 각 도(道)의 승군(僧軍) 1천 명을 조발(調發)하되, 양식을 스스로 준비하여 1개월 동안 부역(赴役)하도록 한다는 교지를 내린다. 운명한 단의왕후는 당시 세자빈 신분이었다. 신분에 따라 국장 절차 등 모든 것이 달랐다. 왕, 왕후, 대비, 대왕대비가 승하하면 국장의 예에 준하여 국장도감(國葬都監)이 설치된다. 그러나 세자빈이 죽으면 묘소도감(墓所都監)이 설치된다. 국장도감이 설치되면 그에 걸맞게 역군을 징발(徵發)한다. 최소 3천 명이 동원되어 한 달 정도 공역을 한다. 그러나 묘소도감으로 장례를 치른 단의왕후의 경우는 승군(僧軍) 1천 명이 동원되어 15일만 공역을 하였다. 택지에서도 모든 면에서 불리하였다. 지아비 세자는 병약했고, 자식도 없었다. 또한 숙종은 왕위를 병약한 세자가 아닌 연잉군에게 넘겨줄 생각을 하던 때였다. 조정 대신들은 이러한 상황을 모를 리 없었고, 왕릉터로는 부족한 이곳에 적당히 조성한 것이다. 혜릉 조성 이후 동구릉에 조성한 왕릉이 원릉, 수릉, 헌종 경릉 등 3기가 더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주변에 왕릉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의로 혜릉을 여기에 조성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 무석인((궁능유적본부)

이 와중에 숙종이 아끼는 영조 생모 숙빈 최씨가 세자빈 승하 후 1개월이 지난 3월 9일 죽는다. 한 달 사이 국상에 준하는 상을 두 번 당한 조정은 단의왕후의 원(園)과 숙빈 최씨의 파주 소령원(昭寧園)을 조성하기에 벅찼다. 동구릉 18대 현종 숭릉 왼쪽 산자락에 조성한 혜릉은 숭릉에서 내려온 청룡 자락이 66.5m의 봉우리를 형성하였는데, 이 봉우리가 혜릉의 현무봉이 된다. 숭릉의 청룡 밖에 혜릉을 조성한 것이다. 혜릉은 외형상으로 매우 후부한 백호를 갖춘 능으로 볼 수 있는 자리이다. 그러나, 혜릉의 백호는 숭릉의 청룡이 되기 위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안산은 구릉산 정상에서 북동진하여 건원릉과 목릉을 지나 남진하여 동구릉 관리사무소까지 내려온 동구릉 전체의 외청룡맥이다. 그리고 청룡이 낮고 짧아 건원릉에서부터 내려오는 골짜기 바람길이 된다. 무엇보다 목릉에서 시작된 개천이 좌청룡 경릉 골짜기의 천과 합류하여, 혜릉 앞에서 매표소 쪽으로 흘러 산수동거(山水同居) 형태로 기운이 유출되는 형국이다. 한마디로 혜릉은 지룡(支龍)이 스스로 혈을 만들기보다는 숭릉의 외청룡으로서 역할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2년 후 지아비 경종이 즉위하면서 능으로 추봉되었지만 능역이 너무 좁고, 능으로서 위엄이라든지 석물의 웅장함은 찾아볼 수 없다. 지나가는 산줄기 자락에 그냥 얹어 둔 것처럼 풍수적으로 보기에 너무 초라한 곳에 조성한 왕릉이다. 조선왕릉 장명등(長明燈)은 태조 건원릉부터 문인석과 문인석 사이 상계(上階)에 고정되어 설치했다. 그러나 혜릉은 설치 흔적은 있지만 장명등(長明燈)이 없는 유일한 조선왕릉이다. 장명등은 풍수 발복 효력을 북돋워 주기 위한 석물 장치이다. 누군가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장생 발복을 막기 위해 장명등을 훼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문석인. (궁능유적본부)

처음에 빈궁의 시호를 '온의(溫懿)'로 정하였는데, 숙종이 명하여 고쳤다. 덕성이 너그럽고 온화하고 거룩하다는 의미에서 '단의(端懿)'로 고쳐 정하였다. 조선왕릉 중 사릉, 공릉, 순릉, 온릉 등과 더불어 초라한 능의 하나이다. 조선왕조 당시에는 왕비나 세자빈일지라도 남편 복이나 아들 복 중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나마 단의왕후 능은 경종 즉위 후 원(園)에서 능으로 추존되었지만, 경종은 이복동생 연잉군[후의 영조] 그늘에 가려 힘이 없었고, 존재감도 없었다. 남편 복도 부족하고, 자식 복마저 없는 초라한 혜릉이다. 한마디로 왕릉 아닌 왕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