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케이션 하나 없이 4일 만에 뚝딱…AI, 콘텐츠 제작판 바꾼다
초상권·저작권 침해 논란도
콘텐츠 제작 현장에 인공지능(AI) 기술이 빠르게 파고들면서 기존 산업 지형도가 흔들리고 있다. 로케이션 촬영과 대규모 시각효과(VFX) 작업이 AI로 대체되면서 제작비와 기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고, 그간 높은 비용 탓에 엄두를 내기 어려웠던 공상과학(SF)·판타지 장르의 문턱도 낮아지고 있다. 다만 기술 도입이 빨라질수록 현장 인력의 일자리 문제와 배우 초상권·저작권 침해 등 문제가 새로운 숙제로 떠오르고 있다.
3일 콘텐츠 업계에 따르면 CJ ENM은 지난달 30일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CJ ENM 컬처 토크' 행사를 열고 AI 장편영화 '아파트'를 공개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볼 수 있는 주인공이 이사한 아파트에서 기묘한 사건과 마주하는 한국형 오컬트·스릴러물로, 배우의 실제 연기만 실내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뒤 모든 배경과 시각효과를 AI로 구현했다.
이번 작품에는 구글의 AI 솔루션인 이마젠(이미지 생성), 나노 바나나(이미지 보정·최적화), 비오(영상 생성)가 적용됐다. 모든 배경 이미지를 이마젠과 나노 바나나로 제작한 뒤 이를 3차원(3D)으로 구현하고, 각 컷의 구도에 맞춰 비오로 영상화하는 방식이다.
AI 기술이 영화 제작에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속도와 접근성이다. 기존에는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리던 제작 기간이 대폭 단축되고, 개인이나 소규모 제작사도 영화 수준의 콘텐츠 제작에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 영화 '아파트'의 경우 전체 촬영 기간은 단 4일 걸렸다. 총제작비는 5억원으로, 기존 영화 대비 5분의 1 수준이다.
특히 하나의 실내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뒤 다양한 배경을 AI로 입히는 방식이 적용되면서, 물리적 로케이션이나 대규모 세트 구축이 사실상 필요 없어졌다. 정창익 CJ ENM AI 스튜디오 팀장은 "AI를 활용한 제작에서는 주인공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만드는 것과 그 주인공이 괴수를 물리치는 장면에서의 제작비 차이가 별로 없다"며 "제작비가 많이 들어 만들기 어려웠던 판타지나 공상과학(SF) 등 장르물 제작도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기대만큼 우려도 커지고 있다. 중국 콘텐츠 플랫폼 아이치이는 최근 배우 100여명의 얼굴과 음성을 데이터화한 '연예인 라이브러리' 구축 계획을 공개하며 파장을 키웠다. AI를 활용해 영상 제작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취지였지만, 배우들은 초상권 사용에 동의한 적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저작권 문제 역시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AI가 학습한 데이터의 출처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중국 바이트댄스가 지난 2월 공개한 영상 생성 AI '시댄스 2.0'을 둘러싼 논란이 대표적이다. 해당 모델은 사진 한 장과 간단한 명령어로 완성도 높은 동영상을 만들 수 있어 주목받았지만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기존 콘텐츠를 무단 학습해 파장을 일으켰다. 할리우드 스튜디오와 배우 조합 등이 법적 조치를 예고하자 바이트댄스는 뒤늦게 저작권이 보호되는 콘텐츠를 무단 사용하지 않도록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우려를 반영해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는 내년에 개최되는 제99회 아카데미(오스카상) 시상식에 AI 캐릭터나 챗봇이 쓴 시나리오를 수상 후보에서 배제하는 내용이 담긴 새 규정을 공개했다. 연기 부문에서도 영화의 공식 출연진 명단에 기재되고 본인 동의하에 인간이 직접 연기한 역할만 심사 대상에 포함된다.
생성된 결과물의 권리를 누구에게 귀속시킬 것인지에 대한 기준도 아직 명확하지 않다. AI 결과물을 '공동 저작물'이나 '편집 저작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법적 기준은 여전히 논의 단계다. 여기에 AI 확산으로 보조 출연자, 촬영 스태프 등 현장 인력의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그럼에도 AI 기술의 확산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단기적으로는 기존 제작 방식을 보완하는 수준에 머물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AI와 실사 촬영이 결합된 하이브리드 제작이 표준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백현정 CJ ENM 콘텐츠이노베이션담당은 "1980년대 컴퓨터그래픽(CG) 기술 등장으로 콘텐츠가 드라마틱한 성장을 했던 것처럼 AI는 CG 다음 세대 기술이 될 것"이라며 "앞으로 일반 영화와 AI 영화를 구분하는 경계가 사라지는 시대가 빠르게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혜선 기자 hslee@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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