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의거 부상자’ 변승기 씨 별세 [떠난이의 향기]

최석환 기자 2026. 5. 3.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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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총격에 쓰러졌던 변승기 씨 1일 별세
3일 3.15민주묘지 안장…3.15 관련자 62번째
1960년 3.15의거에 참여하고 3.15의거기념사업회·3.15의거부상자회 회장을 역임했던 변승기 씨가 지난 1일 별세했다. 향년 81세. 고인은 3일 영결식에 이어 국립3.15민주묘지(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동)에 안장됐다.
1960년 11월 27일 연예인 김진규·최은희·문정숙·장동휘·박노식·황해 씨 등이 3.15의거 부상자 위문을 목적으로 도립마산병원을 방문했다. 왼쪽부터 하총치·한순국·황해·변승기 씨. /3.15의거기념사업회

부정선거에 맞서다…총탄에 쓰러져 다리 절단

변 씨는 1945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해방 후 마산으로 이주했다. 그 뒤 마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마산동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마산상업고등학교 진학을 희망했다.

변 씨는 고교 입학 합격자 발표 하루 전날인 1960년 3월 15일, 역사적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당시 마산시 신포동(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신포동1가)에서 어머니, 아버지, 형, 이렇게 넷이서 살았는데, 그날 저녁 밥을 먹다가 집 밖에서 이상한 기류를 느껴 친구와 함께 거리로 나섰다.

그는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민과 학생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며 마산시청으로 향했다. 경찰이 최루탄과 공포탄을 쏘며 진압에 나섰지만,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장군천 다리 인근 사거리에서 상황이 급변했다. "포위됐다"는 외침 속에 대열이 흩어졌고, 변 씨는 장군천 다리 방면으로 친구와 함께 도망치다 총격을 당했다. 담장을 넘으려는 순간 실탄이 왼쪽 허벅지를 관통했다. 대동맥이 끊어졌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친구가 부축하려 했지만, 경찰이 달려들더니 "X같은 XX들 집에 곱게 박혀있을 것이지 죽어봐라"라는 말과 함께 때리기 시작했다. 발로 짓밟았다.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경찰은 등에 총구를 들이밀더니 시청 방면으로 변 씨 일행을 몰고 갔다. 그 과정에서 변 씨가 갈증이 심해 물을 달라 애원했지만, 돌아온 것은 모욕뿐이었다.

결국 변 씨는 시청 주위에 방치된 채 의식을 잃어갔다. 뒤늦게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상태는 이미 악화한 뒤였다. 여러 차례 수술에도 혈류가 끊긴 다리는 썩어 들기 시작했다. 총상 22일 만인 4월 7일 한쪽 다리를 절단했다.

절단·수술 반복 끝에 다시 사회로

절단 이후에도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감염과 골수염이 반복됐다. 5~6차례 수술에도 상태는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끝내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돼 세 번째 큰 수술을 받았다.

긴 치료 덕에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장애를 피할 수 없었다. 퇴원 후 부산 재활병원에서 재활치료를 거쳐 다시 학업에 복귀했고, 마산상고·경남대 상학과에 진학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공부만이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고 변승기 전 3.15의거기념사업회·3.15의거부상자회 회장. /경남도민일보DB

졸업 후 경남은행에 입행했다. 은행원으로 일을 시작해 서서히 조직 안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장애를 안고도 묵묵히 맡은 일을 수행했다. 지점장까지 올랐다. 어려워도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자신을 일으키는 일이라고 여겼다.

변 씨는 문학 활동도 병행했다. 그에게 글쓰기는 단순 취미가 아니라, 자신이 겪은 역사를 기록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었다. 그가 쓴 시에는 상처를 넘어 3.15의거 당대 기억과 시대적 아픔이 녹아 있다.

1981년 <현대문학>에서 등단했다. '한 마리 외로운 새야', '무제', '겨울바다', '항구', '시월상달', '겨울장미' 등을 발표하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다. 훗날에는 마산문인협회장을 맡아 지역 문학계를 이끌었다. 마산시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또 시집 <그대 이름 다시 부른다>를 출간해 개인 삶과 기억을 정리했고, 특히 올해 3월 15일에는 3.15 서사시집 <마산시민의 함성으로 밝힌 민주의 횃불>을 냈다. 이는 3.15의거를 직접 겪은 당사자로서 남긴 기록이자, 후대에 전하는 메시지였다.

변 씨는 생전에 "총 맞은 다리보다 더 아픈 것은 그날의 기억"이라고 회고했다. 변 씨가 2010년 9월에 남긴 3.15의거 증언록(<우리는 이렇게 싸웠다>)에는 이런 문장이 남아 있다. "오늘, 살아서 그날의 처절했던 3.15의거를 증언할 수 있게 된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지금 매우 행복하다."

거리에서 총탄을 맞고 쓰러졌던 10대 소년은 독재 권력에 맞섰지만, 생애 후반에는 과거 행보와 결이 다른 행보로 지탄받기도 했다. 그는 2025년 4월 <경남도민일보>와 인터뷰에서 12.3 불법 비상계엄을 두고 "계엄령 선포에 아무 문제가 없고 오히려 잘했다고 본다"며 옹호했다.

아울러 전직 대통령 윤석열 씨 파면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소를 두고서는 "빨갱이 집단이나 다름없다"거나, "내 생각이 3.15 정신과 배치된다고 보지 않는다", "3.15 정신을 잘 계승하고 있으므로 내 의견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1일 별세하자 창원 파티마병원장례식장에 빈소가 마련됐고, 3일 국립3.15민주묘지관리소 주도로 3.15기념관에서 영결식이 엄수됐다. 고인은 3.15 영령들이 안치돼 있는 국립3.15민주묘지에 안장됐다. 3.15 관련자로는 62번째다.

/최석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