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게놈 첫 해독·합성생명체 탄생 이끈 크레이그 벤터 별세

인간 게놈 지도 작성에 혁혁한 공을 세운 미국 유전학자 존 크레이그 벤터가 4월 29일(현지시각)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향년 79세로 별세했다.
J. 크레이그 벤터 연구소(JCVI)는 같은 날 성명을 통해 최근 진단받은 암 치료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부작용이 발생해 입원 중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벤터는 1995년 숙주 없이 스스로 살아가는 세균인 헤모필루스 인플루엔자균의 전체 게놈 서열을 세계 최초로 해독했다. 생물의 유전 정보 전체를 한꺼번에 읽어낸 이 성과는 다른 병원체와 동물의 게놈 해독 경쟁을 불러일으켰다.
국립보건원(NIH) 재직 시절에는 세포 안에서 실제로 활동 중인 유전자 조각을 찾아내 표시하는 발현 서열 태그(EST) 기법으로 인간 유전자를 대량 발굴하는 방법을 개척해 게놈 지도 작성 속도를 크게 앞당겼다.
1998년 인간 게놈 해독을 목표로 민간 생명공학 기업 ‘셀레라 지노믹스’를 공동 설립한 뒤에는 '전장 유전체 산탄총 시퀀싱(whole-genome shotgun sequencing)' 기술을 독자 개발했다. 게놈 DNA를 잘게 쪼개 무작위로 읽은 뒤 컴퓨터로 순서를 맞추는 방식으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빠른 속도로 인간 게놈 해독을 가능하게 했다.

미국·영국 과학자들이 주도한 국제 컨소시엄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와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2000년 6월 26일 백악관에서 두 기관이 나란히 인간 게놈 초안 완성을 발표했다. 두 팀은 이듬해 각각 학술지 ‘사이언스’와 ‘네이처’에 연구 결과를 게재했다. HGP는 2003년 전체의 92% 해독 완료를 선언했고 나머지는 2021년 마무리됐다.
벤터 연구팀은 이후 부모 양쪽에서 물려받은 염색체를 각각 구분해 읽는 방식으로 개인 유전 변이를 보다 정밀하게 담아낸 고품질 인간 게놈도 처음으로 완전 해독했다.
2006년 JCVI를 설립한 뒤에는 합성생물학에 도전했다. 2010년 마이코플라스마 미코이데스 박테리아의 전체 게놈을 컴퓨터로 설계·합성해 다른 세균 세포에 이식, 스스로 증식하도록 작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유전 정보를 디지털로 설계하고 화학적으로 만들어 생명을 인공적으로 구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 첫 사례였다.
톰 엘리스 영국 임페리얼칼리지 런던 교수는 네이처에 "당시 다른 어떤 연구보다 100배는 야심찬 시도였고 이 분야에 훨씬 많은 관심을 끌어모으는 데 실질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다만 일부 과학자들은 이를 '합성 생명체'로 규정하는 데 이견을 제기하기도 했다.
요트 '소서러 2호'로 2004년부터 4개 대륙 해역을 누비며 수집한 표본에서 수백만 개의 신규 유전자를 발굴했다. 미생물을 배양하지 않고 환경 시료에서 DNA를 직접 추출·분석하는 메타유전체학 기법을 활용한 결과였다.
벤터는 JCVI 외에도 신세틱 지노믹스, 휴먼 롱제비티, 다이플로이드 지노믹스를 잇달아 공동 창립하며 유전체학과 합성생물학을 실제 의료에 적용하기 위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앤더스 데일 JCVI 대표는 성명에서 "크레이그는 고정관념을 깨고 과감하게 행동하며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낼 의지가 있을 때 과학이 발전한다고 믿었다"며 "그의 리더십과 비전이 유전체학을 재편하고 합성생물학의 발전에 불씨를 지폈다"고 말했다.
문태석 JCVI 합성생물학 교수는 네이처에 "유전체학에 혁명을 일으킨 진정한 선구자이자 혁신가였다"며 "유전체학과 합성생물학 연구자 모두에게 큰 손실"이라고 말했다.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출신인 벤터는 베트남전 해군 의무대 복무 중 병사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의학 연구자의 길을 택했다. 미국 샌디에이고캘리포니아대(UC샌디에이고)에서 1975년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8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과학 훈장을 받았다.
2023년 네이처 인터뷰에서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바닥나기 전까지 연구를 멈추지 않겠다"고 밝혔던 벤터는 평생 연구를 내려놓지 않은 채 눈을 감았다.
[조가현 기자 gahy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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