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에 속아 세계대전의 참화 부른 '챔벌린 유화책'
정치 명문가의 막내, 국내 정책 괜찮았던 재상
1차대전 악몽에다 공산주의 확산이 더 두려워
히틀러도 어느 정도 먹여주면 만족할 것 여겨
나치의 체코·폴란드 침공 뮌헨협정 '휴지조각'
협상 가능한 상대인지 제대로 판단하는게 중요
냉철한 눈, 열린 귀, 불편한 진실 꿰뚫는 용기를
네빌 챔벌린(Arthur Neville Chamberlain, 1869~1940).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Chamberlain'은 원래 '왕실 침실 시종(chamberlain)'에서 유래한 성씨다. 중세 유럽에서 왕의 사적인 공간을 관리하던 신하를 뜻한다. 그런데 '왕실 시종'이라는 뜻의 성씨를 가진 남자가 정작 히틀러(1889~1945) 앞에서 시종처럼 굴었다.
실제로 그는 1938년, 세상이 불구덩이로 치달을 때 협상 테이블에 앉아 히틀러의 손을 꼭 잡고 돌아왔다. 손에는 종잇장 하나. 입에는 웃음 한 바가지.
"나는 독일에서 평화를 가지고 명예롭게 돌아왔습니다."(I have returned from Germany bringing peace with honour!)

그는 누구인가? 우산을 든 남자
챔벌린은 1869년 영국 버밍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프 챔벌린(Joseph Chamberlain, 1836~1914)은 당대 영국 정치의 거물이었고, 형 오스틴 챔벌린(Austen Chamberlain, 1863~1937)은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집안이 워낙 출중하다 보니 네빌은 늘 "그 챔벌린 집안 막내"로 살았다. 우산을 즐겨 들고 다니는 깡마른 신사. 그게 세상이 기억하는 챔벌린의 첫 인상이다.

유화책, 달래고 달래다 불에 타다
1930년대 유럽은 가스통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형국이었다. 히틀러는 1933년 독일 총리가 된 뒤(1934년 총통 겸직) 베르사유 조약(1919년)을 휴지조각 취급하며 군비를 늘렸고, 1936년엔 라인란트를 접수했으며, 1938년엔 오스트리아를 통째로 삼켰다.
그래도 영국과 프랑스는 가만 있었다. 왜? 첫째,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의 악몽이 너무 생생했다. 둘째, 소련(1922~1991년)의 공산주의가 더 무섭다고 여겼다. 셋째, 그리고 챔벌린의 핵심 신념, "히틀러도 어느 정도 먹여주면 만족할 것이다"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유화책(appeasement)'이다. 한국말로 옮기자면 '달래기 정책',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눈 딱 감고 줘버리기 전술'이다.
챔벌린은 1938년 9월, 히틀러를 세 차례나 직접 만났다. 세 번째 만남이 뮌헨협정(1938년 9월 29~30일)이다.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네 나라 대표가 모였다. 피해 당사국인 체코슬로바키아(1918~1993년)는 회의장 밖에서 기다렸다. 즉, 남의 땅을 주인 없이 나눠준 것이다. 독일어권이 많다는 핑계로 주데텐란트(체코 서부지역)를 히틀러에게 넘겨줬다.
협정문에 서명하고 런던으로 돌아온 챔벌린. 공항에서 종이를 흔들며 외쳤다.
"평화! 우리 시대의 평화!"
히틀러는 그 순간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이랬을 것이다.

역사의 심판, 우산은 폭풍을 막지 못했다
뮌헨협정 이후 정확히 6개월 만인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전부를 집어삼켰다. 협정? 휴지. 약속? 폐기. 챔벌린은 그제야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 해 9월, 독일이 폴란드(1918년 재건국)를 침공하자 영국은 선전포고를 했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이 시작된 것이다.
챔벌린은 1940년 5월 총리직을 내려놓았다. 후임은 윈스턴 처칠(1874~1965). 처칠은 챔벌린에 대해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전쟁과 치욕 사이에서 치욕을 선택했다. 그리고 전쟁도 얻었다."
뼈가 있는 농담이다. 아니, 농담이 아니다. 사실이다.

그러면 챔벌린은 나쁜 사람이었나?
여기에서 잠깐 공정하게 따져보자. 챔벌린이 단순히 겁쟁이였거나 어리석은 사람이었을까?
꼭 그렇지는 않다. 그에게는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은 70만 명 이상을 잃었다. 그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또 전쟁을 택하기란 정치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전쟁을 막으려 했다. 다만 방법이 틀렸다. 악의 없이 틀렸다는 것이 더 비극이다.

한국에 던지는 질문, 우리의 챔벌린은 누구인가?
자, 여기에서 이야기를 한국으로 옮겨보자.
"그건 1930년대 유럽 이야기 아닌가요?"
맞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너무 낯익다.
한반도는 지금도 '달래기냐 맞서기냐'의 오랜 논쟁 속에 있다. 북녘의 핵 위협 앞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의 눈치 보기 속에서, "일단 줘보자" 대 "절대 안 된다"의 싸움은 국내정치의 단골 메뉴다. 어느 쪽이 챔벌린이고 어느 쪽이 처칠인가를 놓고 여야는 서로 상대방을 챔벌린으로 지목하며 싸운다.
그런데 챔벌린의 역사가 우리에게 묻는 건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다.
"상대가 정말 협상 가능한 존재인지, 그것을 제대로 판단하고 있는가?"
유화책이 나쁜 것은 '달랬기' 때문이 아니다. 상대의 본질을 오판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무조건 강경하다고 능사도 아니다. 상대가 협상 가능한 존재라면 처칠처럼 굴다간 괜한 불을 키운다. 결국 핵심은 판단력이다. 그리고 판단력은 정보에서 나오고, 정보는 열린 눈에서 나온다.
챔벌린의 또 다른 문제는 비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처칠은 의회에서 여러 차례 유화책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하지만 챔벌린은 그를 "전쟁광"으로 무시했다. 반대 목소리를 막거나 무시하는 순간, 지도자는 자기 믿음의 거품 속에 갇힌다. 뮌헨에서 히틀러를 만나고 돌아온 챔벌린은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협상이 아니라 확인을 하러 간 셈이었다.
지금 한국 정치에서 그런 장면은 없는가? 자신의 판단을 검증하는 비판을 "적의 편"이라며 쳐내는 지도자, 혹은 지지자들. 챔벌린이 처칠을 "전쟁광"이라 불렀듯, 반대편을 '종북'이나 '좌빨'로 규정하며 들으려 하지 않는 풍경. 거울 앞에 서보시라.

우산 한 자루의 무게
챔벌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언제나 들고 다니던 검은 우산. 그 우산은 폭풍을 막지 못했다. 아니, 폭풍이 올지조차 예보하지 못했다.
역사는 챔벌린에게 가혹하다. 어쩌면 너무 가혹할지도 모른다. 그는 평화를 원했다. 다만 평화는 소원만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냉철한 눈, 열린 귀, 그리고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는 용기가 함께 해야 한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오래된 격언이 있다. 챔벌린은 그 반대를 살았다. 전쟁을 두려워하며 평화를 흥정했고, 결국 전쟁을 불렀다.
한국은 지금 어떤 우산을 들고 있는가. 그 우산이 폭풍 앞에서 버텨낼 것인가. 챔벌린의 이야기가 단순한 역사 퀴즈가 아닌 이유가 거기 있다.


"시민언론 민들레는 상업광고를 받지 않는
독립언론입니다.
시민들의 작은 후원이 언론 지형과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후원 참여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