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광주‘송강로’의 주인공 송강 정철 [도로명 속 남도 역사인물]

노성태 2026. 5. 3. 08:10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송강로

가사 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을 기린 도로가 그의 호를 따 이름 붙인 '송강로'다. 송강로는 원효사로 올라가는 무등로가 김덕령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 입구에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부터 충장사, 분청사기 전시실, 금곡마을과 무등산 수박 공동 집판장을 거쳐 충효동의 충효교 다리를 막 지나 가사문학관 앞 남면 지곡리 삼거리까지로, 총 4,289미터다.

송강로는 무등산의 아름다움 뿐 아닌 광주를 대표하는 많은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길이다. 길가에 이미 언급한 충장사, 분청사기 전시실을 비롯하여 충효리 정려비, 김덕령 장군 생가터, 환벽당이 있고, 가까이에 풍암정, 식영정, 서하당, 가사문학관, 소쇄원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금곡마을에서는 무등산 특산물인 무등산 수박을, 광주호 주변에서는 광주호 호수 생태원도 만날 수 있다.

이 길이 송강 정철을 기리는 송강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길 주변에 남은 정철의 흔적과 관련이 깊다. 정철은 16세 때 담양 창평에 내려온 후 무등산 자락에서 학문을 닦고 시조와 가사를 쓴다. 그 흔적이 환벽당 주인 김윤제와 만난 조대와 용소이며, 최초의 가사인 '성산별곡'의 배경이 된 식영정, 서하당이다.
송강 정철

송강로의 주인공 정철

조선 시가 문학의 대표적 형식은 시조와 가사이다. 가사는 시가 문학에서 서사 문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문학 형식으로, 운문 형식에 산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짧고 단편적인 심상을 노래하는 시조보다 길고 풍부한 주제를 다루고자 탄생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송강 정철은 조선 시대 대표적인 가사 문학의 대가였다.

정철(鄭澈, 1536~1593)은 중종 31년(1536) 서울 장의동에서 돈녕부판관 정유침의 4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다. 큰누이가 인종의 후궁이며, 막내 누이가 계림군 유의 부인이어서 어린 시절 후일 명종이 된 경원대군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10세 때 을사사화로 매형 계림군이 역모로 처형당하고, 아버지가 유배길에 오르면서 고된 유년 시절을 보낸다. 아버지의 유배가 끝난 16세 때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게 된다. 이곳에서 환벽당 주인인 김윤제와 만나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 년을 보낸다. 여기서 임억령에게 시를 배우고 양응정·김인후·송순·기대승 등에게 학문을 배운다.

명종 7년(1552) 17세에 김윤제의 외손녀인 문화 유씨(柳氏) 강항(强項)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둔다.

26세 때 진사시에 급제하고 27세 때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로 관직에 나아간다. 이후 이조정랑, 홍문관 전한, 예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지낸다. 서인의 영수로 명종 시대부터 선조 시대까지 붕당 정치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파직과 유배를 거듭한 다. 만년에는 남인의 모함으로 강화도 송정촌에서 칩거하다 선조 26년(1593)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송강 정철의 문학은 높게 평가되지만, 정치인 정철에 대해서는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한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1589년(선조 22)에 발발한 정여립 모반 사건(기축옥사) 당시 위관(委官)이 되어 천여 명이 넘는 동인계열 관련자들을 처형하고 축출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그 속에 이발·이길 형제 등 광산 이씨들도 포함되어 있다.

정철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수많은 시조와 가사를 남긴다.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4편의 가사와 107수의 시조가 그것이다. 이 작품들은 사후 편찬된 '송강가사', '송강별집추록유사', '송강집' 등에 실린다.

정철은 탁월한 비유법과 우리말 어법 파괴와 같은 파격적인 언어 구사,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린 작품들로 우리나라 시조와 가사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특히 4편의 가사는 우리나라 가사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김만중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우리나라의 참된 글은 이 세 편 뿐이다"라고 극찬한다.

'성산별곡'은 그가 25세 때 처가 당숙인 김성원이 장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서하당의 절기별 아름다움과 풍류를 노래한 작품으로, 조선 시대 사대부의 자연관과 풍류를 엿볼 수 있다. '관동별곡'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 내금강, 외금강과 관동 팔경을 유람하고 지은 것으로, 절경을 보고 풍류를 즐기는 한편, 관찰자로서의 자신과 풍류객으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사미인곡'은 정철이 50세 때 조정에서 물러나 불우하게 지낼 때 선조에 대한 연군의 정을 남편을 잃은 여인의 마음에 빗대 노래한 것이며, 속편 '속미인곡'과 함께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린 한국 문학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조대와 용소

송강 관련 유적

송강로 주변에는 정철과 관련된 유적·유물도, 전설도 남아 있다. 그중 하나가 환벽당 주인 김윤제와 정철의 만남을 간직한 낚시터 조대(釣臺)와 연못인 용소(龍沼)다.

환벽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종 때 나주 목사를 지낸 사촌 김윤제(金允悌, 1501~1572)가 지었고, 환벽당 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환벽당 바로 아래에 사촌 김윤제가 정철을 처음 만난 장소인 용소다. 사촌 김윤제와 송강 정철의 만남은 극적이다. 그 극적인 만남이 이곳 용소에 전설로 남아 있다.

정철은 을사사화 이후 할아버지 묘가 있는 고향 담양에 내려와 살고 있었는데, 당시 16살의 정철이 순천에 사는 형을 만나기 위해 환벽당 앞을 지나게 된다. 이때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다 창계천의 용소에서 용 한 마리가 놀고 있는 꿈을 꾸게 된다. 꿈에서 깨어난 김윤제가 급히 용소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비범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그 소년을 데려다가 여러 가지 문답을 하는 사이에 그 소년의 영특함을 알게 되었고, 순천에 가는 것을 만류하고 슬하에 두어 제자로 삼게 된다. 후일 김윤제는 정철을 그의 외손녀사위로 삼고, 온갖 경제적 지원을 해주었고, 그리고 10여 년 뒤인 27세에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한다. 그가 바로 송강 정철이다. 용소 옆에는 송강이 이곳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잡았다는 조대가 있다.
식영정
성산별곡 시비

과거에 장원급제하기 직전, 정철이 자주 찾았던 정자가 식영정이었다. 그리고 식영정에서 바라본 경관은 정철이 지은 최초의 가사 '성산별곡'의 가사가 된다. 성산별곡은 "어떤 지날 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棲霞堂) 식영정(息影亭)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하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그토록 낫게 여겨, 적막 산중에 들고 아니 나시는고..."로 시작된다.

식영정은 원래 서하당 주인인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다. 식영정(息影亭)이라는 이름은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으로 임억령이 지었다. 식영정 바로 옆에는 김성원이 자신의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고 이름 붙인 또 다른 정자가 있다. 소실된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는데 '서하당유고' 행장을 보면 "경신 공삼십육세 축서하당우창평지성산 위종노계…(庚申公三十六歲 築棲霞堂于昌平之星山 爲終老計…)"란 기록이 있어, 김성원이 36세 되던 해(1560년)에 식영정과 서하당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서하당 김성원은 송강의 처외재당숙으로 송강보다 11년 연상이었으나 송강이 성산에 와 있을 때 같이 환벽당에서 공부하던 동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 네 사람을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하여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은 것은 유명하다. 이 '식영정이십영'은 후에 정철의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된다.

정철이 남도 땅에 남긴 가장 대표적인 흔적은 '사미인곡(思美人曲)'을 지은 송강정이다. 서인이었던 정철이 동인들과 권력 싸움에서 밀려 낙향하였을 때 초막을 짓고 죽록정(竹綠亭)이라 불렀다.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1770년(영조 46)에 세운 것인데, 그때 이름을 송강정으로 고친다. 지금도 정자의 정면에는 '松江亭(송강정)'이라고 새긴 편액이 있고, 측면 처마 밑에는 '竹綠亭(죽록정)'이라는 편액이 함께 걸려 있어 역사의 변천을 보여준다.

둘레에는 노송과 참대가 무성하고 앞에는 평야, 뒤에는 증암천이 펼쳐져 있으며, 멀리 보이는 무등산의 그림자가 수려하다. 정철은 이곳에서 '사미인곡'을 짓는다. 현재 정자 옆에는 '사미인곡' 시비가 세워져 있다. '사미인곡'은 제목 그대로 연군지정(戀君之精)을 읊은 노래이다. 그 수법은 한 여인이 남편을 이별하고 사모하는 정을 기탁해서 읊은 것인데, 송강 자신의 충정을 표현한 노래라 할 수 있다.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