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미술품에는 피의 뜨거움이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

이한수 기자 2026. 5. 3.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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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61년 5월 3일 72세
야나기 무네요시

일본 미술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는 1921년 1월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을 위해 조선에 도착했다. 도쿄대 철학과 출신으로 도요(東洋)대 교수로 있던 그는 “조선 미술품에는 조선 민족의 마음의 맥박과 피의 뜨거움”이 있다고 했다.

“류종렬(柳宗悅·야나기 무네요시)씨가 경셩에다 죠션민족미슐관이라는 것을 셜립하기 위하야 금 십일일 밤 칠시 오십분 남대문 도착렬차로 입경하게 되얏는대 동씨가 이와갓흔 예술뎍 공헌을 조션에 베풀녀 하는 것은 자택에 만히 모두아 두엇던 죠선 미술의 작품에셔 여러가지 감상과 깨다름을 엇어 그 미슐품에는 조션 민족의 마음의 맥박과 피의 뜨거움이 오히려 남어잇슴을 알아내게 되고(…)”(1921년 1월 12일 자 석간 3면)

1921년 1월 12일자 3면.

당시 기사는 야나기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논조로 서술했다. “조션 민족을 지내처 보지 안이하고 뜨사잇게 보며 깁히 살피는 동시에 무한한 늣김을 가지고 어대까지던지 직성(直誠)스럽게 동정하야 죠션 민족의 한과 할니는 눈물을 씨셔 주려고 하는 일본 학자 즁에셔도 가장 유명한 동양대학 교수 류종렬씨”라고 설명했다.

야나기는 조선일보 기고를 통해 미술관 설립 이유로 “조선의 미(美)를 멸손(滅損)치 않도록 하려고” 한다고 밝히고 “그 미술관에 의하여 조선 민족 미술사의 편찬이 성취되기를 독망(篤望)”(1921년 1월 15일 자 석간 4면)한다고 했다.

1921년 1월 15일자 4면.

야나기가 설립을 추진한 조선민족미술관은 1924년 4월 9일 경복궁 내 집경당에서 개관했다. 성악가인 야나기의 부인 가네코(兼子)가 음악회를 열어 얻은 수익을 비롯해 각계 성금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총독부 산림과 직원으로 조선 도예 전문가인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도 힘을 보탰다. 야나기가 수집해 이곳에서 전시·소장했던 미술품은 해방 후 한국에 그대로 남았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일제는 경복궁 앞에 1926년 총독부 건물을 세우고 광화문을 철거하려고 했다. 야나기는 “만약 조선이 발흥하고 일본이 쇠퇴해 일본이 조선에 합병되고, 에도(도쿄의 옛 이름)의 궁성이 폐허가 되며 그 자리에 서양풍의 큰 총독부 건물을 짓게 된다고 상상해 보라”(2025년 8월 14일 자 A17면)고 일갈했다. 광화문은 철거 위기를 면하고 이전 건립으로 확정됐다.

1977년 8월 11일자 3면.

야나기는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일본 지식인이었다. 광화문 철거 위기 때 말한 것처럼 한국이 일본을 합병했다면 어떠했겠느냐고 역지사지로 생각할 줄 아는 지식인이었다.

“(1919년) 5월 20일 자 요미우리신문에는 민예 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기고문을 남긴다. “물질도 영혼도 그들의 자유, 독립을 강탈하였다. 조선인들이여, 일본인들이 그대들을 모욕하고 고통스럽게 하여도 그들 가운데 이와 같은 일문(一文)을 남긴 자가 있음을 알아주오. 일본이 정의로운 인도(人道)의 길을 걷고 있지 못함에 대한 명백한 반성이 우리 일본인 사이에도 있음을 알아주오.”(2019년 2월 22일 자 A35면)

2001년 6월 27일자 38면.

야나기에 대한 비판적 의견도 있다.

“그는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으로 당시 전무했던 조선 미술사 연구에 기여했다. 그런데 그는 조선 미술을 ‘비애미(悲哀美)’로 규정했다. 조선인을 ‘연약하고 수동적인 식민지 백성’이란 이미지로 고착시켜 식민사관의 정립에 일조했다는 평을 듣는 인물이기도 하다.”(2013년 5월 28일 자 A21면)

그러나 적어도 동시대에 살았던 조선인은 야나기가 조선을 폄훼하고 식민사관 정립에 일조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을 위해 야나기가 서울에 왔을 때 실린 기사는 그에 대한 당대 평가를 잘 보여준다. ‘수륙(水陸) 사천리를 무사하게 도착한 류(야나기)씨를 환영함’이란 제목이다.

1921년 1월 13일자 3면.

“류종열씨의 하는 일은 아모리 의심의 눈을 가지고 보와도 무슨 자긔의 야심을 가진 것이 안이요” “그이의 마음이 우리 미술에 홀니여 그 결과로 조션민족미술관을 셜립하게 되엿다니 우리 조선사람 되고 얼마나 그의 그 뜻이 고맙고 아름답슨니가”(1921년 1월 13일 자 석간 3면)라고 했다.

1977년 ‘문화재의 허실’ 시리즈 4회 ‘한국 예술품 왜 좋은가’ 기사는 야나기가 말하는 ‘한국미’를 비중 있게 소개했다. “자기가 자기 것을 자랑하기보다는 남이 본 평가를 경청하는 것도 퍽 유익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일본의 고(故) 야나기 무네요시”라며 야나기가 보는 한국의 예술을 설명한다.

“한국의 예술은 인정을 그리워하고 사랑에 살고 싶은 마음의 예술이다. 오랫동안의 참혹하고 비통한 한국의 역사는 그 예술에 남모르는 적요(寂寥)와 비애(悲哀)를 품게 하였다. 언제나 슬픈 미(美)가 있고 눈물에 넘치는 적막(寂寞)이 있다.”

“어디에서도 우리는 한국의 선(線)을 볼 수 있다. 책상다리에도, 서랍의 손잡이에도, 부채의 자루에도, 그리고 장도(粧刀)의 칼집에도 그들의 마음이 숨어 있다. 선(線)의 숨은 뜻을 풀지 못하고는 누구도 한국의 마음에 접근할 수 없다.”

2001년 6월 27일자 38면.

“일본 다인(茶人)들이 이도(井戶)라고 해서 진중(珍重)하는 이조 중기 경남 김해에서 만들어진 잡기(雜器)의 미(美)-. 이것은 이조의 막사발이지만 평범 이상의 ‘심상미(尋常美)’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간단하기도 한 찻종(茶鍾)-. 어디를 찾아도 이보다 더 평이한 기물은 없다. 평평탄탄(平平坦坦)한 모습에 아무런 장식이 없다. 파란(波瀾)도 없고, 꾸밈도 없고, 사심(邪心)이 없는 것, 솔직한 것, 자연스러운 것, 뽐내지 않는 범범(凡凡)한 물건이다. 이것이 곧 평이(平易)의 미(美), 평범의 미, 조작되지 않은 자연의 미이다. 일본 도자기가 추한 것은 한국 도자기의 미를 모방으로, 인위(人爲)로 만들어내려고 자연을 범했기 때문이다.”(1977년 8월 11일 자 조간 3면)

야나기 무네요시는 1961년 5월 3일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4년 9월 보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외국인에게 준 최초의 문화훈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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