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과 시가전까지 벌였다 ‘대구 6연대 반란사건’ [호준석의 역사전쟁]
8.15 해방 6개월 후인 1946년 2월 18일.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 대구6연대가 대구 중동에서 창설됩니다. 도마다 각 한 개 연대가 차례로 창설되는 와중이었습니다. 6연대 창설 실무를 맡은 소위 하재팔은 일본군 학병 소위 출신이었습니다. 해방 후 좌,우익은 국군 창설에 대비해 각자 사설 군사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좌익인 하재팔은 자신이 속했던 좌익 조직 ‘국군준비대’ 출신만 받고, 우익 청년은 받지 않았습니다. 좌익 사병들은 초대 연대장 김영환이 아닌 하재팔을 추종했고, 규율이 너무 엄격하다며 연대장을 구타하는 사건까지 일으켰습니다. 이후 6연대장은 남로당 군사부 핵심인 최남근(2,5대 연대장)과 김종석(3대)이 번갈아 맡다시피 했습니다. 어느새 6연대는 ‘남로당 군대’가 돼 있었습니다.(<한국전쟁사 1권 - 해방과 건군>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당시 대구는 좌익 세력이 강해 ‘적도(赤都, 붉은 도시)’로 불렸습니다. 1946년 10월 박헌영의 지령을 받은 좌익 세력이 대구,경북 일대를 휩쓸며 경찰, 공무원, 우익인사, 가족 3백여 명을 학살한 대구 10월사건이 발생합니다. 해방 후 첫 대규모 폭력사태였습니다. 수배된 좌익 사범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해 6연대에 입대합니다. 당시 연대장은 최남근이었습니다. 최남근은 경찰에 쫓겨 군에 들어온 자들에게 환영식까지 해줬습니다. 하사관 교육대를 이수해야만 진급하게 하고, 이 교육대를 이용해 공산주의를 교육했습니다. 정훈 조직은 표무원(1949년 대대장 시절 월북),곽종진,이정택,이상백 등 좌익 하사관들이 장악했습니다. 폭력을 통한 체제 전복을 노린 남로당은 초기부터 군 침투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무력을 보유한 군만큼 강력한 ‘혁명 수단’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침투 공작이 가장 성공한 부대가 광주4연대와 대구6연대였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국방경비대가 국군이 되자 북한 통치자인 소련 중장 스티코프는 9월 초순 김일성,박헌영에게 ‘남조선 군대를 장악하라’고 지시합니다. 박헌영은 9월 하순 남로당에 “국방군 내에서 폭동과 병변(兵變)을 대대적으로 조직하라”는 지령을 내립니다. 10월 19일 여수14연대 남로당원들이 제주도 진압 출동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여수14연대는 광주4연대 남로당원들이 주축이 돼서 만든 부대였습니다. 반란군과 이에 합세한 좌익 세력이 호남 전역으로 진격하면서 신생 대한민국은 내전 상태에 빠졌습니다.

당시 군 공작을 총괄하던 남로당 군사부장은 목사 출신 이재복이었습니다. 이재복은 제주도에 이어 본토에서 반란을 일으켜 국군의 토벌 병력을 분산시킴으로써 제주도의 위기를 모면하고, 본토에서 제2의 전선을 형성해 전군(全軍)이 호응하기를 기대했습니다.(<한국전쟁사 1권 - 해방과 건군>). 국군이 여수순천사건 진압에 나섰지만 반군과 혼전을 벌이며 고전합니다. 국가전복 위기감이 고조되자 전방 부대를 뺀 거의 전군이 투입됐고 그제야 여수순천사건은 수습 국면에 접어듭니다. 제주도 인민유격대도, 여수순천의 군사반란도 결국 진압돼 버리자 이제 이재복이 기댈 언덕은 ‘남로당의 아성’ 대구6연대였습니다.

◇대구6연대 1차 반란
당시 대구6연대 병력은 흩어져 있었습니다. 4.3사건 진압을 위해 1개 대대가 제주에 가 있었고, 14연대 반란으로 연대장 김종갑 중령이 직접 1개 대대를 이끌고 함양에 출동했습니다. 김천과 포항에도 각 1개 중대가 파견돼 본부 잔류 병력은 200명 정도였습니다. 11월 2일 6연대의 남로당 핵심인 상사 이정택과 곽종진에게 이재복의 반란 지령이 하달됩니다. 6연대가 반란을 일으키면 제주와 호남의 전세가 호전되고, 다른 연대에서도 연쇄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이정택은 연대 헌병대장 김진위 대위(육사 3기)에게 ‘곽종진이 남로당 세포 책임자’라고 밀고합니다. 반란의 구실을 만들려고 미리 모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알 리 없는 김진위 대위는 보좌관 조장필 소위에게 곽종진 체포를 지시합니다. 낮 12시 조장필 소위는 이정택과 함께 지프차에 타고 연대본부 인사과에 도착해 곽종진에게 임의동행을 요구합니다. 이때 무기고 밖에서는 곽종진의 부하들이 기관총 등 무기를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곽종진은 ‘모자를 쓰고 나올 테니 잠시 기다려 달라’고 속인 뒤 사무실에서 4.5구경 권총을 가지고 나와 지프차에서 기다리던 조장필 소위를 뒤에서 쏴서 살해했습니다. 이어 연대 수송관 이남주 소위도 사살했습니다.

조장필 소위가 쓰러지자 이정택은 ‘여수순천 반란군이 대구에 쳐들어왔으니 출동해야 한다’며 본부 사병들을 탄약고 앞에 집합시켰습니다. 남로당 장병들은 미리 계획된 대로 손질 중이던 병기로 무장하고 집합했습니다. 이정택은 평소 남로당에 동조하지 않던 하사관 10여명을 호명해 앞으로 나오라고 한 뒤 권총으로 쐈습니다. 일부 병사들이 흩어지자 위협사격을 해서 막았습니다.
부연대장 최경만 소령이 단신으로 연대 본부를 탈출해 헌병대로 달려갔습니다. 헌병대장 김진위 대위와 헌병 40명과 함께 다시 연대 본부로 달려왔지만 3대대 배상수 등 수십 명이 기관총과 박격포로 이들을 공격했습니다. 헌병 6명이 쓰러지자 최경만 소령은 다시 후퇴해 미1연대에 지원을 요청합니다. 반란군이 시가지로 진출하고 경찰과 미군이 출동하면서 시내 곳곳의 교통이 차단되고 바리케이드가 설치됐습니다. 시장과 상점은 모두 철시했고, 여수순천사건이 대구에서도 일어나는 줄 알고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반란군은 오후 4시 30분경 북성로 후생상점(대구경찰서에서 200미터 지점) 앞까지 이르러 경찰 부대와 맹렬한 전투가 시작되어 대구농대 뒤 도로에서 게릴라전이 벌어졌고 5시 30분경 수십 분 동안 쌍방의 총 끝에서 토하는 불꽃은 치열하여 유탄은 사정없이 부근 일대에 떨어져 시민들은 극도의 공포감에 떨었다.”(1948.11.7. 경향신문)

미군 1연대의 전차까지 출동해 반군을 포위한 뒤에야 반란은 진압됐습니다. 반란군은 세 갈래로 도주했습니다. “6연대 반란군은 병사들을 동원해 통신망을 절단한 다음 3대로 갈려 시내에 들어온 후 각처에서 경찰,미군과 교전하고, 1대는 통근열차로 지천역 방면으로 도피하고, 1대는 수성 방면으로 도피하였으며, 대구중학교 옆에서 미군과 교전한 1대 약 70명은 미군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미군 1명이 사망하였다. 이날 반란에 참가한 병사의 수효는 450명에 달하는데 350명은 오후 6시경까지 포로가 되고 나머지 100여명은 교외로 도주하였다.” (1948.11.4 조선일보)

도주한 반군은 지역 남로당원 200여 명과 합세해 칠곡,동명,가산의 경찰 지서를 습격한 뒤, 김천 주둔 중대와 합류하려다 실패해 일부가 사살되자 팔공산으로 입산했습니다. 1차 반란으로 조장필 소위 등 장교 4명, 사병 4명이 살해됐습니다. 경찰관 4명은 부상을 입었고, 총격전당시 부근에 있던 남녀 학생 10여명이 유탄에 다쳤습니다.

◇대구6연대 2차 반란
1차 반란 후 6연대 남로당원들을 색출하는 숙군이 시작됩니다. 연대 본부는 여수순천사건으로 함양에 출동했던 부대에도 원대 복귀를 명령합니다. 12월 6일, 함양에서 2개 중대 380명을 지휘하던 1대대장 차갑준 대위는 원대 복귀 전 장병들의 실탄을 회수하려 했지만 숙군을 눈치 챈 남로당원들은 명령에 불응했습니다. 차 대위는 연대 본부에 이 사실을 보고하고 대대가 고령에 도착하면 강제 회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연대 본부에는 남아있는 병력이 없었습니다.

오후 4시, 장병들은 17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대구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대구 달성군 월배 부근의 저수지인 성당지에 이르렀을 때 차량 1대가 행렬을 이탈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차 대위가 행군을 멈추고 확인하려는 순간, 갑자기 차량 라이트가 켜집니다. 이것은 남로당 장병들에게 전원 하차해서 4번 탄약차에서 실탄을 분배받으라는 신호였습니다. 대대 인사계인 상사 이동백이 장교 9명을 사살하고 장병들에게 반란 가담을 강요했습니다. 하사관 28명, 병사 14명 등 42명이 가세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병은 호응하지 않고 급히 흩어졌습니다. 급보를 받은 헌병대, 경찰이 현장에 급파돼 분산된 병력을 수습했습니다.
이동백과 반군은 도주하면서 달성지서를 습격했습니다. 본부에서 급파된 1개 중대가 이들을 추격했습니다. 7일 새벽 2시쯤 낙동강을 도하하는 것을 포착해 사격했지만 붙잡지는 못했습니다. 이들은 시신 1구와 자동소총 1정을 버리고 팔공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됐습니다.

◇대구6연대 3차 반란
다음 달인 1949년 1월, 포항에 파견돼 오천비행장을 경비하던 4중대에도 복귀 명령이 내려집니다. 남로당원 숙군을 위해 3중대와 임무를 교대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복귀 명령은 하달 직전까지 극비였지만 남로당원에 의해 사전 누설됩니다. 1차 반란 때 도주해 입산한 곽종진,이정택 등은 4중대 재무계 선임하사관과 긴밀히 연락하며 반란을 모의해 왔습니다. 1월 30일 재무계 선임하사관은 시내 요정에서 중대장 이영삼 중위에게 술을 먹여 만취시킨 뒤 남로당 장병 20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백달현 소대장과 하사관 1명을 사살했습니다. 그런 뒤 포항 지역 남로당원들을 부대로 진입시켜 무기고를 점령했습니다. 포항경찰서를 습격한 뒤 포항을 점령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남로당원들이 숙군되는 것을 지켜봐 온 대다수 장병들이 반란에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반군은 포항 서쪽으로 도주하고 말았습니다.

6연대 반란 후 부산의 제3여단 참모장 이영순 중령이 법무장교 3명, 헌병 1개 소대와 함께 대구에 도착해 1차로 400여 명의 장병을 구속해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112명의 좌익 분자가 적발돼 군법회의에서 6명은 총살형, 112명은 유기징역형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남로당 경북도당은 숙군 수사 관계자 암살을 시도했습니다. 1949년 1월 18일 남로당 경북도당 소속 3명이 6연대 정보주임 신철 대위의 집 근처에서 신 대위를 권총으로 저격했습니다. 신 대위는 총에 맞았지만 다행히 생명을 건졌습니다. 범인 1명은 신 대위의 응사에 현장에서 사살됐고 2명은 나중에 체포돼 총살됐습니다. 남로당은 숙군을 지휘한 이영순 중령도 치약에 독을 타 암살하려다 실패했습니다. ‘이영순을 죽여라’ 등의 협박 벽보가 붙는 위협 속에 숙군 수사는 진행됐습니다.(<한국전쟁사 1권 - 해방과 건군>,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천만다행으로 6연대 반란은 여수순천사건처럼 확대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대가 분산돼 있지 않고 연대 본부에 모여 있었다면 사태는 크게 폭발했을 가능성이 다분했습니다. 여수순천사건을 진압하던 6연대 장병들이 남로당이 저지른 만행을 현지에서 목격하고 이들의 실체를 절감하게 된 것도 6연대 반란 실패의 한 요인이었습니다.

숙군 작업이 모두 끝난 후인 4월 15일, 6연대는 반란연대의 오명을 남기고 해체돼 22연대로 재편됐습니다. 팔공산으로 들어갔던 반란군은 태백산으로 옮겨 주민들을 납치한 뒤 200여 명의 부대로 게릴라전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6.25전쟁 전 태백산지구전투사령부의 토벌 때 160여명이 사살되고 30여명은 생포됐습니다. 1차 반란의 주역 이정택도 사살됐지만 곽종진의 행방은 찾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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