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트레일 ] ① 아팔라치안 트레일, 혼자 걷고 있었지만, 혼자는 아니었다

서경석 객원기자 2026. 5. 2.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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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4 / DAY 74–99 / 말과 온기, 그리고 잠시 멈춰도 되는 이유
오랜만의 탁 트인 펜실베니아의 농촌 풍경.

[<사람과 산> 서경석 객원기자]   

Day 75 트레일이 변한 게 아니라, 마음이 변한 것이

모든 트레일이 늘 기대에 부응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오늘은 유난히 불평이 많고, 한숨이 잦고, 짜증이 쉽게 올라왔다. 펜실베니 아에 들어와서부터 매일이 그렇다. 돌이 많아서, 그로 인해 걸음과 리듬이 끊기고 자꾸 발쪽을 신경 써야 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예전엔 "트레일이란 원래 이렇지"라며 어떤 구간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오늘은 계속 마음이 흐트러진다. 그러다 문득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트레일이 변한 걸까, 아니면 내가 변한 걸까. 답은 금방 나왔다. 트레일은 변하지 않는다. 원래부터 그렇게 존재해 왔으니까. 

하지만 사람 마음은 생각보다 쉽게 변한다. 문명과도 멀고 트레일도 훨씬 험했던 메인과 뉴햄프셔에서는 묵묵히 잘 걸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을도 가깝고, 사람도 자주 만나고, 누가 봐도 전보다 수월한 트레일인데 불평이 먼저 입 밖으로 나온다.

오늘은 오랜만에 30km가 넘는 거리를 걸었다. 쉘터에 도착하니 태양열 샤워기가 있다. 하지만 물이 차갑다. 그래도 이곳저곳 물이 귀한 시기에 내 몸을 적실 수 있는 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찬물에 또 불평을 했다.

그 순간 알았다. 내가 집중을 못하고 마음이 흐트러지고 있다는 걸. 하지만 다행히도 이건 끝이 아니라 다시 바로잡을 기회다. 트레일은 오늘도 그대로 거기 있다. 내가 마음만 다잡으면 다시 걸을 수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도 그렇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사소한 것들이 모두 불평의 이유가 되고, 마음이 정돈되면 같 은 하루가 감사로 채워진다.

바쁜 일상에선 이렇게 단순한 원리를 알아차릴 틈조차 없었다. 그걸 산에 와서야 배우고 있다. 이런 선생이 또 있을까. 지금 이 순간,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운이고, 행복이고, 감사하다.

Day 79 빗속을 걷는 즐거움
이런 하늘을 수시로 보며 하루를 마무리 한다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앞으로 사흘 동안 비 소식이 이어진다. 언제부터였을까. 빗속에서 걷는 일이 낯설어졌던 게. 그래서인지 오늘 내리는 비가 유난히 반갑다. 돌은 미끄럽고, 신발 안은 축축해지고, 배낭은 점점 무거워진다. 빗방울이 나뭇잎 위에 떨어질 때 나는 소리는 마치 자연이 웃는 것처럼 들린다.

톡, 톡, 톡.
레인자켓을 꺼낼까 하다 말았다. 걸으며 샤워할 기회를 굳이 피할 필요는 없지. 오히려 흠뻑 젖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 각한다. 살아 있다는 감각이 또렷해지는 순간이니까.
신기하게도, 내가 쉘터에 도착하자마자 하늘은 그제야 진짜 비를 퍼부었다. 정말 억수 같은 비였다. 오랜만에 젖은 양말을 벗어 비틀어 짜본다.

아무리 있는 힘껏 짜도 내일 아침이면 다시 안 짠 것처럼 젖어 있을 걸 안다. 그런데도 이 행위에는 묘한 쾌감이 있다. 내일도 비는 계속 올 것이고, 양말은 아마 계속 젖어 있겠지. 그런데도 그 생각만으로 마음이 이상하게 들뜬다. 이 비가 자연 속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오래 기다려온 것이었는지 나는 알기 때문이다. 왠지 이 모든 것에 중독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현재 내가 펜실베니아에 있음을 말해준다.

Day 84 AT의 정확히 절반을 지나며 (누적 거리 1,762km)

오늘, 나는 아팔래치안 트레일의 정확한 중간 지점을 지났다.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아마 격하게 포옹했을 순간.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건 나 혼자였다. 카메라를 세워두고 조용히 렌즈를 바라 보며 혼잣말을 되뇌었다. 믿기지 않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 다.

메인 주, Bangor 공항에 도착하던 첫날의 장면부터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때의 나는 이 길이 얼마나 길고,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할지 알지 못했다. 지금의 나는 분명 달라져 있다. 몸은 강해졌고, 걸음에는 탄력이 붙었고, 마음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자신감이 생겼다. 완주 시점도 대략 가늠해보고, 다가올 추위에 대비한 장비 구성도 머릿속에서 하나씩 설계해본다. 그리고 결론은 단 하나였다.
다양한 형태의 쉘터들이 있지만, 이 곳은 복층구조로 되어 있어 더 흥미로웠던 곳.

"무게가 늘더라도, 따뜻함은 포기하지 말자."

오늘도 48km 가까이를 걸었지만 몸은 여전히 여유롭다. 이제는 내 체력의 한계가 어디쯤인지 알겠고, 지형에 따라 스스로 페이스를 조절할 수 있다는 감각도 생겼다. 길에 '끌려가는 상태'를 지나 길과 '대화하며 걷는 단계'에 들어선 느낌이다.

내일이면 드디어 펜실베니아의 끝. 수없이 많은 돌멩이와 그에 대한 불평들을 뒤로하고, 눈 깜빡할 새 지나갈 정도로 짧다는 메릴랜드로 들어선다. 새로운 주에 들어설 때면 언제나 그렇듯 마음이 들뜬다. 소리를 지르고, 혼자 웃고, 그 모든 순간을 카메라 에 담는다. 지금 이 길의 한가운데서, 나는 더 이상 출발선에 서 있는 사람도 아니고, 아직 끝에 도착한 사람도 아니다. 그 중간 어딘가에 조용히, 단단히 서 있다.
애팔래치안 트레일 하프 포인트_남쪽 스프링거 마운틴과 북쪽 마운틴 카타딘까지. 1,090.5마일(약 1,755km)
펜실베니아의 편안한 평지길

글.사진 서경석 객원기자 ㅣ 미국 AT·PCT를 완주한 장거리 하이커. 해외 트레킹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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