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재판소원 1호에 대법원 '10초 재판' 선정…양 기관 갈등 재점화
녹십자 백신 담합 심리불속행 사건 전원재판부 회부…525건 중 첫 통과
"대법원 아킬레스건 건드렸다" vs "강자의 도구 우려"…법조계 반응 엇갈려

헌법재판소가 재판소원 제도 시행 이후 처음으로 전원재판부에 회부할 사건을 골랐습니다.
대법원이 가장 민감하게 여기는 '심리불속행' 기각 판결입니다.
재판소원 도입을 놓고 이미 갈등을 빚어온 두 기관 사이의 긴장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2일 법조계에 따르면 헌재는 지난달 28일 녹십자가 '백신 입찰담합' 과징금 패소 판결을 취소해달라며 낸 재판소원을 전원재판부에 회부했습니다.
지난 3월 12일 재판소원 제도 시행 이후 접수된 525건 가운데 사전심사를 처음으로 통과한 사건입니다.
사건의 경위는 이렇습니다.
녹십자는 백신 입찰 담합으로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부과받은 과징금 20억여 원을 취소해달라며 행정소송을 냈지만 지난해 10월 서울고법에서 패소했습니다.
대법원은 올해 2월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판결을 확정했습니다.
녹십자 측은 관련 형사 사건에서는 무죄를 확정받았는데, 행정소송 원심판결과 엇갈린 상황에서 심리불속행으로 상고가 기각된 것은 재판청구권 침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심리불속행은 1994년 도입된 제도입니다.
형사 사건을 제외한 소송에서 2심 판결에 중대한 법령 위반이 없으면 심리를 속행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방식입니다.
현재 민사·가사·행정 사건의 70% 가량이 이 방식으로 확정됩니다.
'10초 재판'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것도 이 때문입니다.
판결문에 기각 이유조차 제대로 적지 않아 당사자들의 불만이 꾸준히 제기돼 왔습니다.
헌재는 그동안 심리불속행 제도 자체에 대해서는 합헌 결정을 유지해왔습니다.
모든 사건에 대해 상고심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재판청구권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고, 심리불속행은 개별 사건의 권리 구제보다 법령 해석의 통일을 우선한 제도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번 사건에서도 제도 자체의 합헌 여부보다는 구체적인 운영 방식이 쟁점이 될 전망입니다.
헌법연구관 출신 김진한 변호사는 "제도가 합헌이라도 남용해선 안 되는 만큼 헌재가 '이런 한계가 있다'고 선을 긋는 방식이 될 수 있다"며 "법원이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를 헌재가 1호 사건으로 선정했다는 건 상당히 용기를 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노희범 변호사도 "심리불속행이 가능한 경우와 불가능한 경우 가이드라인을 정할 것 같다"며 "앞으로는 심리불속행 기각이 대폭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다만 헌재가 대법원 권한을 침범하는 모양새로 비칠 경우 두 기관의 갈등이 더 깊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헌재가 너무 많이 나가면 대법원과 갈등이 심해질 수 있다"고 했고, 한 전직 대법관도 "이번 사건만 놓고 판단하겠지만 헌재로서도 위험 부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십자 사건 자체를 놓고도 법조계 반응이 엇갈립니다.
녹십자 측 대리인 이우열 변호사는 "형사재판에서는 경쟁 제한성이 인정되지 않아 무죄가 나왔는데 행정소송 원심은 상반된 결론을 냈으니 심리불속행 기각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수도권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행정·민사는 증거가 조금이라도 우세한 사람이 이기지만 형사는 의심스러우면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한다"며 두 결론이 충분히 다를 수 있다고 반박했습니다.
사법부 안팎에서는 1호 사건이 대형 로펌인 율촌이 대리하는 수십억 원짜리 담합 사건이라는 점도 지적됩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결국 1호 사건으로 선정된 건 대형 로펌이 맡은 사건인데 기본권 구제와는 거리가 멀지 않느냐"고 꼬집었습니다.
재판소원이 힘없는 이들의 권리 구제보다 '강자의 도구'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가 처음부터 현실화한 것 아니냐는 시각입니다.
헌재와 대법원의 갈등은 사법권 최종 해석권한을 둘러싸고 반복돼 왔습니다.
헌법재판은 1948년부터 헌법위원회와 대법원이 번갈아 맡다가 1987년 현행 헌법이 만들어지면서 헌법재판소가 탄생했습니다.
법률상 두 기관은 대등한 예우를 받지만, 역할 중첩과 불완전한 분업으로 인한 충돌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재판소원 1호 사건 지정은 그 갈등이 다시 한번 표면화된 계기가 됐습니다.
(사진=연합뉴스)
표언구 취재 기자 | eungoo@tj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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