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 한 장이 혁명이다…월트 휘트먼, 그 수염 속에 담긴 세상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월트'라는 지극히 평범한 이름을 가진 이 사내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한참 먼 삶을 살았다. 수염은 산타클로스를 능가하고, 시는 성경을 뺨치며, 자아는 우주만큼 컸던 사람.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불렀다.
"나는 나 자신을 노래한다."
겸손함? 그런 거 없다. 하지만 그 오만함이 어쩐지 밉지 않은 건, 그가 노래한 '나'가 결국 우리 모두였기 때문이다.
인쇄소 청년, 시인이 되다
휘트먼은 1819년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헌팅턴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가난했고, 정규교육은 열한 살에 끝났다.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에 학교를 그만둔 셈이다. 그러나 그는 인쇄소 심부름꾼으로 일하며 활자와 친해졌고, 그 활자들이 그를 키웠다.
신문기자, 편집장, 목수, 공무원... 직업을 마치 철새처럼 옮겨 다니던 그가 1855년, 서른여섯의 나이에 자비로 출판한 시집이 있다. 바로 『풀잎』(Leaves of Grass)이다. 초판은 고작 795부. 서점들은 이 책을 외면했고, 평론가들은 "외설적"이라며 코웃음 쳤다. 오늘날로 치면 출판사에서 퇴짜 맞고 블로그에 올렸더니 악플만 달린 격이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이 달랐다. 당대 미국최고의 지식인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이 이 책을 읽고 편지를 보냈다.
"이 위대한 경력의 시작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휘트먼은 이 편지를 어떻게 활용했을까? 다음 판 광고에 그대로 실어버렸다. 에머슨의 허락도 없이. 뻔뻔함인가, 혁명적 홍보감각인가. 어쩌면 둘 다다.
『풀잎』은 죽을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쳐 아홉 판을 냈다. 시집이 아니라 평생의 일기장이자 자서전이었다.
전쟁터의 시인, 붓 대신 붕대를 들다
1861년, 미국 남북전쟁(1861~1865)이 터졌다. 형 조지 휘트먼(George Washington Whitman, 1829~1901)이 북군에 입대했고,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휘트먼은 짐을 꾸려 워싱턴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시인의 붓 대신 간호사의 붕대를 들었다. 자원봉사 간호사로 3년 넘게 야전병원을 돌며 수만 명의 부상병을 돌봤다. 편지를 대신 써주고, 손을 잡아주고, 임종을 지켜봤다. 북군이든 남군이든 가리지 않았다. 그 경험이 시집 『북소리』(Drum-Taps, 1865)와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 대통령 암살을 애도한 명시 「오, 선장이여! 나의 선장이여!」를 낳았다.
전쟁이 그를 바꿨다. 젊은 날의 팽팽한 낙관주의는 깊은 슬픔과 섞여 더 묵직해졌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본 시인. 그래서 그의 시는 교실 칠판 위에만 있지 않고, 사람의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그가 부순 것들
휘트먼이 진짜 혁명적이었던 이유는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 있었다. 당시 시는 운율이 있어야 했고, 격식이 있어야 했고, 점잖아야 했다. 그는 그 모든 규칙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자유시(free verse)라는 형식, 아니 형식의 파괴. 숨이 차도록 길게 이어지는 문장들, 이름 없는 노동자들의 목록, 몸에 대한 거침없는 찬양.
그는 농부, 목수, 뱃사람, 노예, 여성, 이민자를 시의 주인공으로 불러들였다. 문학의 귀족 살롱에 노동자들을 초대한 것이다. 그것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그는 또한 동성애적 감수성을 시에 녹여냈다. 「갈대의 노래」(Calamus 연작, 1860)에서 남성 사이의 깊은 사랑을 노래했다. 지금도 논쟁 중인 그의 성 정체성은 19세기 미국에서는 가히 폭탄이었다. 당시 매사추세츠주 법무장관이 『풀잎』의 특정 시편을 금서로 지정하겠다고 협박했을 때, 휘트먼은 한 줄도 지우지 않았다.
그를 해고한 상관도 있었다. 내무부 장관 제임스 할란(James Harlan, 1820~1899)은 1865년 휘트먼을 공무원직에서 잘랐다. 이유? 『풀잎』의 저자라는 것. 다행히 친구의 도움으로 다른 부서로 옮길 수 있었지만, 이 에피소드는 권력이 예술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씨앗이 된 시인
휘트먼의 영향력은 그가 죽고 나서 더 크게 피어났다.
아일랜드 시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는 그를 직접 찾아가 경의를 표했다. 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는 그에게서 자유와 범신론의 공명을 들었다. 미국의 반전시인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 1926~1997)는 「아메리카」에서 휘트먼의 목소리를 이어받아 20세기의 위선을 향해 고함쳤다. 소설가 토마스 울프(Thomas Wolfe, 1900~1938)는 그의 산문적 호흡을 산문에 녹였고, 소설가이자 시인 헨리 밀러(Henry Miller, 1891~1980)는 그를 "진정한 미국의 아버지"라 불렀다.
문학바깥에서도 그랬다. 개인의 존엄, 민주주의의 시적근거, 몸과 영혼의 동등한 가치, 이 생각들은 이후 노동운동, 여성운동, 인권운동의 밑바닥에 흘렀다. 휘트먼은 운동권 선언문을 쓴 적이 없다. 그러나 그의 시는 수많은 선언문의 어머니였다.
한국의 풀잎을 생각하며
자, 여기서 잠깐 시선을 돌려보자. 2026년 봄, 한국.
언론은 편이 갈리고, 광장에는 서로 다른 깃발이 펄럭인다. 어느 쪽이든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이 풍경을 보며 휘트먼이라면 뭐라고 했을까.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너희가 싸우는 건 좋다. 그런데 너희 중 누가 농부의 손을, 택배 노동자의 발을, 청소노동자의 허리를 시로 쓴 적 있느냐?"
휘트먼 식 민주주의는 투표함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다. 한국 진보언론이 자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구조'를 말하면서 '사람'을 잊는가.
또 하나. 휘트먼은 자기 책을 자비출판했다. 주류가 외면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주류 포털과 대형방송이 외면하는 목소리들이 유튜브와 소규모 매체로 흘러들어오는 현상, 휘트먼이라면 여기서 희망을 봤을 것이다. 물론 그 희망이 때로 가짜뉴스와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눈썹을 한쪽 추켜세웠을 수도 있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 휘트먼은 남군병사도 돌봤다. 자신과 다른 편의 사람을. 적의 고통 앞에서도 인간을 먼저 봤다. 진영논리가 유리처럼 투명해진 오늘 한국사회에서, 이 낡은 수염 난 시인의 행동은 낡지 않게 빛난다.
풀잎은 아직 자라는 중
1892년 3월 26일, 월트 휘트먼은 뉴저지주 캠던에서 눈을 감았다. 일흔두 살. 몸은 온갖 병으로 망가져 있었지만, 『풀잎』 최종판(1891~1892)의 교정은 거의 죽기 직전까지 봤다. 마지막까지 고치고 또 고친 시인.
그는 자신의 묘소 설계에까지 직접 관여했다. 마지막까지 자기 이야기의 연출자이고 싶었던 사람답게.
풀잎은 밟히면 더 번진다. 그게 풀의 속성이다. 휘트먼의 시도 그랬다. 금서로 지정하려 했더니 더 유명해졌고, 해고했더니 더 오래 기억됐다.
권력은 늘 풀을 얕본다. 그래서 늘 민초인 풀에게 진다.

[김성수 <함석헌 평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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