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만 한 예수 [최주훈 목사의 명화 이야기]

예수를 찾아보십시오 |
이 그림 앞에서 할 일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를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에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가로 36.8센티미터, 세로 26.7센티미터. A4 용지 한 장보다 작은 동판(銅板)에 수백 명이 빼곡합니다. 1598년, 플랑드르 화가 얀 브뤼헐(Jan Brueghel the Elder, 1568–1625)이 구리판에 유화를 올려 완성한 작품인데, 그리스도의 모습이 빽빽하고 다채로운 군중 속에 거의 묻혀 버렸습니다. 보통 교회 제단화라면 예수가 화면 한가운데 우뚝 서 있기 마련인데, 이 그림에서는 돋보기를 들이대야 겨우 찾을 수 있습니다. 나무 사이로 떨어지는 빛 웅덩이 한가운데,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허술한 단(壇) 위에 선 작은 인물, 연한 노란색 후광이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겁니다.
왜 이렇게 그렸을까요. 브뤼헐은 농부화가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의 둘째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을 낳고 이듬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 바람에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들이었지만, 사람들의 일상을 의미 있게 담아 내는 천부적인 그림 솜씨만큼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최고의 유산입니다. 그는 성경 장면을 그리면서 주인공을 일부러 작게 그리고, 그 자리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으로 채워 놓곤 합니다. 그의 아버지인 피터르 브뤼헐이 이런 식으로 즐겨 그렸는데, 아들도 이 '산상설교'에서 같은 모습을 보여 줍니다.
숲 속의 빛, 그리고 듣는 자와 듣지 않는 자 |
배경은 갈릴리 언덕이 아니라 북유럽의 울창한 숲입니다. 거대한 나무들이 화면 위쪽을 꽉 채우고, 거의 잎사귀 하나하나를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나무 사이로 빛 한 줄기가 아래로 떨어지는데, 그 중앙에 정확히 예수가 서 있습니다. 예수의 옷차림은 검소합니다. 화려함이나 권위로 사람을 휘어잡지 않고, 그저 말씀 자체에 집중하게 하려는 듯합니다. 서 있는 단도 대리석이 아닙니다. 주변에서 급하게라도 구할 수 있는 나뭇가지 세 개를 대충 세워 놓고는 설교단으로 사용합니다. 산상설교의 현장이 이토록 소박했으리라는 것, 그리고 그 소박함이야말로 하나님나라의 성격이라는 것을 이 작은 디테일이 말해 줍니다.
노란 옷의 여인 |
점쟁이와 손금 보는 무리 |
딴청 부리는 수도사들 |
이 그림에서 가장 불편한 인물은 따로 있습니다. 손금 보는 무리의 바로 위쪽, 나무 그늘이 시작되는 경계 안에 수도사 복장의 두 사람이 서 있습니다. 잘 찾아보길 바랍니다. 예수의 설교가 아니라 손금 보는 여인 쪽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예수를 무시하는 듯합니다. 노란 옷 여인이나 점 보는 군중은 그래도 평신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수도복을 입고 있습니다. 수도사가 하는 일은 기도와 말씀에 자기 인생을 건 사람들입니다. 소위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다고 하는 부류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시선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아니라 아래쪽, 아마 점술 아니면 노란색 드레스 입은 여인 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그림이 그려진 1598년은 종교개혁이 유럽을 뒤흔들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야외 설교 장면은 성경 공부와 설교의 중요성이 강조되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합니다. 루터와 칼뱅이 가장 거세게 비판한 것이 바로 성직자의 영적 태만과 형식주의였습니다. 브뤼헐은 이 두 수도사를 통해 말없이, 하지만 아주 분명하게 그 비판에 동참합니다.
늦게 온 귀부인들 |
뼈를 들여다보는 소녀 |
저는 개인적으로 이 그림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깊은 울림이 화면 오른쪽 아래 어린 소녀입니다. 감상자 대부분이 주목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거기엔 동물의 뼈가 놓여 있습니다. 뼈를 응시하는 어린 소녀. 종교화에서 뼈나 해골이 나오면, 인간의 유한함과 죽음에 대한 상징으로 읽습니다. 이것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이 세상의 것에 신뢰를 두지 말고 그리스도에게 두라는 죽음의 경고입니다.
수백 명이 저마다의 관심사에 빠져 있는 이 화면의 한구석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죽음을 응시하는 장면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먹을거리에 빠진 여인도, 미래를 점치는 군중도, 딴청 부리는 수도사도 모두 잊고 있는 한 가지는 우리는 죽는다는 진리입니다. 죽음 앞에서 먹을거리도, 점술도, 사교도, 장사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예수께서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 6:25)고 하신 말씀은 단순한 낙관론이 아닙니다. 우리의 유한한 삶을 직시하고, 생명의 시선을 하나님나라에 두라는 방향 전환의 명령으로 읽힙니다.
겨자씨 하나 |
하나 더, 이 그림에서 가장 큰 존재는 나무입니다. 거기에 비해 예수의 모습은 아주 작습니다. 그림을 한참 보다가 이 예수가 겨자씨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보니 이 그림이 또 다르게 보입니다. 울창한 나무들이 화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나뭇가지 사이에 공중의 새들이 깃들어 있는 것을 보니, 겨자씨 비유(마 13:31-32)가 겹쳐 읽힙니다. "겨자씨 한 알을 가지고 밭에 심으매 이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군중 속에 거의 묻혀 보이는 작디작은 예수와, 그 위로 높이 솟은 거대한 나무 사이의 대비. 지금 이 순간 이 설교자는 세속적 권위라곤 없이 나뭇가지 단 위에 서 있는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 작은 씨앗에서 온 세상을 덮을 나무가 자라게 됩니다. 브뤼헐이 이 구도를 의도한 것인지, 우연인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을 오래 보고 있으면, 그 역설이 자꾸 마음에 남습니다.

최주훈 / 중앙루터교회, <뉴스앤조이> 이사장
최주훈 newsnjoy@newsnjo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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