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 끝났어도 남은 건 무기력”...환자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의외의 처방

윤성철 2026. 5. 2. 07:03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차 권하는 의사 유영현의 1+1 이야기] 53. 핑크 플로이드 ‘Another Brick in the Wall’

J는 암 생존자다. 혈액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후 자가 골수 이식을 받아 지금은 혈액 내 암세포가 더 이상 없다. 하지만 활력은 없다. 식욕도 없고 의욕도 없다. 매사에 흥미가 없다. 살아남았지만 살아 있는 느낌이 없다.

암 치료의 뒤안길... 그때 왜 음악이 통했을까?

첫 번째 '티 클리닉'(Tea Clinic) 면담에서 그가 팝(pop), 야구, 그리고 반려동물을 좋아하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그의 활력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리기 위해 그가 좋아하던 것을 화제로 삼아 이야기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좋아했다는 주제에 이르러도 이야기에 별 열정을 보이지 않았다.

'복전차'를 우리며 대화하던 날이었다. 벽돌 모양으로 눌러 만든 차를 전차(벽돌차)라고 부른다. 복전차는 전차의 일종이다. 나는 먼저 벽돌차를 J에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벽돌차를 영어로 'brick tea'라 부른다고 설명한 뒤 brick이라는 단어 하나에 의존하여 갑자기 록 이야기로 비약하였다.

어차피 그를 자극하기 위해서니 비약이라도 상관없었다. "노래 제목에 벽돌이 들어있는 노래가 있습니다.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핑크 플로이드의 'Another brick in the wall'을 기억하시죠?"

나는 J가 이 노래 제목에는 흥미를 보일 것이라 기대하였다. 내 의도는 적중하였다. J의 눈에 미동이 일어났다. "프로그레시브 록을 아세요?" 그는 즉각 반응했고 이 대답으로 그날 대화의 공기가 바뀌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던 핑크 플로이드 이야기를 다 꺼냈다. 앨범 'Dark side'에다 부러워하며 들었던 핑크 플로이드 일본 공연 소식까지…. 'The Wall'의 뮤직비디오 중 기억나는 장면 얘기도 했다. J도 호응하였다.

그 이후로 J는 틈틈이 내게 음악 동영상을 보내준다. 로저 워터스와 에릭 클랩턴이 통기타 연주하며 부른 'Wish You Were Here' 실황도 보내주고, 그룹을 떠났던 로저 워터스 복귀 공연 영상도 보내주었다. 다른 록스타 영상들도 간혹 보낸다. 나는 J의 가슴에 열정을 다시 일으키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이런 교류를 하는 중 나는 'Another Brick in the Wall'이 의학 논문 제목에서 매우 빈번히 쓰인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핑크 플로이드는 교육과 권위에 의해 세워진 벽에서 개인은 벽돌 하나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

딱딱한 의학 논문들에조차 '벽돌'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

그러나 의학 논문에서 이 표현은 핑크 플로이드의 노래 제목과는 다른 의도로 사용된다. 과학은 오래전부터 벽을 완성하기 위하여 벽돌을 쌓는 과정으로 표현되었다. 독자에게 "과학에서 새로운 발견 하나가 나왔다. 아직 벽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 한 조각이 벽을 더욱 완전하게 한다"는 의미로 쓸 좋은 표현이 필요하다.

왼쪽부터 '벽돌차'를 지고 가는 사람들, 벽 속의 획일화된 벽돌 풍자 만화, '스타워즈' 포스터에 있는 "May the Force Be with YOU" 문구, 그리고 논문 제목으로 쓰인 "Another Brick in the Wall". 사진=유영현 제공

연구자들은 데이터 자체를 보고하는 논문에서는 차갑고 중립적인 문장을 쓰지만, 그 데이터가 전체 그림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논문들인 코멘터리, 에디토리얼, 리뷰에서는 은유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이 은유적인 표현에는 대중에게 익숙하게 알려진 문구가 동원된다.

핑크 플로이드의 이 노래 제목이 이 목적에 딱 맞는다. 비록 핑크 플로이드의 노래 의도와는 다르지만, 단번에 성처럼 완성되지 않고 "벽돌쌓기"를 통해 의학지식 구조를 만든다는 의미로 쓰기에, 이 노래 제목은 너무 적절하다.

'Another Brick in the Wall'은 핑크 플로이드가 가상의 주인공 핑크를 등장시켜 만든 록 오페라 앨범 'The Wall'에 삽입된 노래다. 1979년 발표되었다. 빌보드차트 1위를 차지한 메가 히트곡이다.

이 제목은 세계인에게 강하게 각인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니 이 제목은 의학자들이 학술적 수사로 쓰기에도 적합하다. 노래가 발표된 바로 다음 해 1980년부터 의학 논문에서 이 노래 제목이 논문 제목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 제목은 패러디이면서도, 동시에 과학의 본성을 말하는 표현이 되었다.

미생물의 세포벽에 대한 한 리뷰 논문에서도 이 제목을 발견할 수 있다. 세균 세포벽을 이루는 단단한 격자 구성 성분에 새로운 구성요소가 밝혀졌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논문에서 "세포벽의 또 하나 벽돌이 아닐까요?"(Just Another Brick in the Wall?)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여기에서는 분자 하나가 미생물 세포벽의 벽돌이다.

질병 모델을 설명하는 데에도 이 노래 제목이 쓰였다. 간성뇌증을 이해하는 방식도 결국 벽돌쌓기로 보면, 어느 연구는 암모니아의 역할을, 어느 연구는 염증의 역할을, 어느 연구는 혈뇌장벽 장애를 강조한다. 한 코멘터리 논문에서 간성뇌증의 기전 전체를 벽으로 보고, 그 기전 중 하나를 "또 하나의 벽돌"이라고 설명한다.

마이크로RNA에 의한 유전자 조절이 심혈관 질병의 병태 생리에 깊이 얽혀있다는 뜻으로 이 제목을 차용한 어느 논문에서는 "단지 하나의 벽돌이 아니다"(not just another brick in the wall)는 표현이 쓰였다. 마이크로RNA는 또 하나의 부차적 요소가 아닌 병태 생리의 중심이라는 표현이다. 이 벽돌이 없으면 무너진다는 뜻이다.

환자 치료를 위한 임상 전략의 영역에서도 이 제목은 쓰인다. 신장이식에서 이식 거부를 예방하려는 전략, 급성 심근경색에서 항(抗)응고를 앞당기는 전략, 심장 수술의 새로운 재건 술기에서도, 벽은 환자를 지키려는 방어체계다. 각각의 개별 전략은 벽돌로 표시되었다. 새로운 예방 전략이 등장하면 그것도 "벽돌 하나 추가요!"가 된다.

"연쇄상구균과 틱: 벽을 이루는 벽돌이 맞는가?"는 제목의 논문도 발견된다. 틱 장애와 연쇄상구균 감염의 관계는 아직도 논란 중이다. 이 제목은 "이게 정말 벽에 들어갈 벽돌인가, 아니면 아직 검증이 부족한 돌멩이인가?"라고 묻는다. 물음표가 붙은 벽돌의 존재는 과학이 늘 이런 불안정함 위에서 진보한다고 알려준다.

더 재밌는 변형은 '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벽돌은 더 이상 그만!'(Another Brick in the Wall no More!)이라는 제목이다. 성별 차이를 무시하거나 평균으로 뭉개는 연구 관행을 "벽돌처럼 똑같이 취급하는 태도"로 비판하는데 이 표현이 쓰였다. 더 이상 환자를 벽돌처럼 사용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논문이다. 이 표현은 획일화된 교육과 제도를 비판하며 붙인 핑크 플로이드의 의도와 가장 비슷하게 사용되었다.

셰익스피어 '햄릿'에서도, 영화 '왕좌의 게임'에서도

과학 논문에는 이런 은유가 흔하다. 치료해야 하나, 말아야 하냐는 이슈를 다룬 한 논문의 제목은 "To treat or not to treat?"이다. 셰익스피어 '햄릿'에서 나오는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를 패러디하였다.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치료를 제공하자는 한 논문은 이제 대비할 시점이라는 메시지로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겨울이 다가온다"(Winter is Coming)는 표현을 빌려왔다. 연구 분야가 더 넓은 스케일과 지평으로 확장되는 상황을 표현한 한 논문은 '토이 스토리'에서 계속 확장되는 영역이나 지평을 낙관적으로 표현한 "무한과 그 너머로"(To infinity and beyond!)를 따와서 사용하였다.

스타워즈에 나오는 "포스가 당신과 함께하기를"(May the Force be with you!)이란 너무나 유명한 문구도 의학 논문에서 자주 차용하는 표현이다. 영화에서 제다이들이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면서 내적 힘 혹은 우주의 에너지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한 논문에서는 편집자가 창의적인 논문을 소개하면서 이 논문 내용대로 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으로 이 표현을 제목으로 썼다.

다른 논문에서는 물리적 힘을 의미한다. "척추관절염: 포스가 당신과 함께하기를"이라는 제목은 척추관절염을 이해하려면 면역세포 외에도 관절에 작용하는 물리적 힘을 보라는 뜻으로 쓰였다.

생존 다음은 ''이다이제 벽에 새 창을 내야 할 때

이제 다시 J로 돌아온다. J의 투병 과정은 그가 생존을 위해 쌓아 올린 벽이다. 진단을 받고 끝없이 이어지던 검사들, 순서를 기다리던 병원 복도, 항암치료, 자가 골수 이식…. 이 모든 것들이 벽돌들이다.

그 벽돌들로 암을 이겨 내는 방풍벽을 새웠다. 이 벽돌들로 세운 벽 덕분에 폭풍 속에서도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러나 생존이라는 1차 목표가 달성되자 그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였다. 치료가 너무 충실하게 생존만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삶'을 다시 호출하는 과제가 남았다. 무기력, 흥미 저하, 정체성의 약화는 암 생존 전환기의 흔한 현상이다.

이제 위험으로부터 보호 중심으로, 삶의 구조를 의미와 활동 중심으로 재배치해야 한다. 이전의 방풍벽에 작은 창을 하나 내고 바깥의 소리가 들어오고 안쪽의 숨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야 한다.

J의 경우 복전차와 핑크 플로이드의 노래 'Another Brick in the Wall'로 벽에 통로가 열렸다. 내가 좋아하던 것을 남에게 건네는 행위는 이미 회복의 징조이다.

논문에 꾸준히 차용될 뿐 아니라 J에게 조용히 창 하나를 열어 준 'Another brick in the wall'. 이 노래는 지금도 살아서 레전드 메가 히트곡의 생명력을 보여준다.

유영현 티클리닉 디렉터(오디오칼럼 1+1이야기 https://www.youtube.com/@yhyoo0906)

윤성철 기자 (syoon@kormedi.com)

Copyright © 코메디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