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우의 핫스팟] 두 왕의 이야기

김현우 기자 2026. 5. 2.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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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스팟(HotSpot)'
백악관 회동한 두 명의 제왕
찰스 3세의 노련한 심리전
트럼프에 내민 안보 청구서
진짜 포식자는 영국의 국왕
"중간만 가자."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런 처세술을 조기 이수한 우리는 영혼 없는 끄덕임과 '모르는 척'으로 무장한 생존의 고수들이다. 퇴근길 소주 한 잔에 "오늘도 버텼다"며 스스로를 마취하고, "받은 만큼만 일한다"며 핏대 세우는 걸 훈장처럼 여긴다. 그런데 이상하다. 성공했다는 이들의 삶은 왜 우리와 이토록 딴판일까. 어쩌면 우린 그저 거대한 '펜듈럼(Pendulum)'의 진동판 위에서 시키는 대로 춤추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공력을 낭비하며 '잉여 포텐셜'을 공급하는 건전지 신세로 말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도덕 교과서 대신, 왜 이 지겨운 장면이 무한 반복되는지 그 메커니즘이 궁금했다. 내게 그 프리즘을 빌려준 바딤 젤란드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의 '트랜서핑' 이론을 메스 삼아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해부하는 [김현우의 핫스팟]을 시작한다.
2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남쪽 잔디밭에서 열린 국빈 방문 환영식에서 찰스 3세 영국 국왕(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의장대 행진을 지켜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골프장에서 수천억원대 자산가와 어쩌다 코인으로 대박 난 벼락부자를 구별하는 데는 5초면 충분하다. 진짜 회장은 빛바랜 조끼를 입고 낡은 세단을 직접 몬다. 남이 파놓은 디봇(잔디 패인 자국)까지 조용히 메우며 걷는다. 벼락부자는 눈 시린 형광색 람보르기니 문을 펄럭이며 내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금장 로고를 두르고 캐디에게 호통부터 친다.

회장은 남들이 다 자기를 아니까 티를 낼 필요가 없다. 코인 부자는 남이 몰라줄까 온몸으로 비명을 지른다. 가진 자의 여유와 갖고 싶은 자의 발악. 미국 워싱턴 백악관 한복판에서 국가 정상급 스케일로 벌어졌다.

주인공은 영국 찰스 3세 국왕과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백악관이 공개한 두 사람 사진 밑에는 'TWO KINGS(두 명의 왕)'라는 캡션이 달렸다. 트럼프다운 직설적 농담이다. 공화국인 미국 대통령이 스스로 왕관을 씌우며 웃는 동안 찰스 3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낡은 세단을 몬 회장의 옅은 미소를 짓지 않았을까.

트럼프 대통령에게 왕이란 번쩍이는 금장 골프웨어다. 선출된 권력이 왕 놀이를 하면 지지자는 "역시 우리 보스!"라며 통쾌해한다. 반대파는 "민주주의 위기!"라며 거품을 문다. 양쪽이 뛸수록 트럼프가 빨아들이는 정치적 에너지는 커진다. 그에게 왕관은 반대파를 조롱하고 틱톡 조회수를 끌어올리는 소품에 불과하다. 제 마음대로 판을 쥐려는 뻔한 내부 의도다.

진짜 왕과 가짜 왕의 외교 심리전

찰스 3세는 어떤가. 핏줄부터 왕관을 쓰고 태어난 진짜 왕이다. 한데 그는 백악관에서 왕관의 무게를 낮추고 가장 겸손한 언어로 책임을 말했다. 진짜 가진 자는 과시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욕망을 비틀어 원하는 방향으로 물길을 트는 무서운 외부 의도를 쓴다.

찰스 3세의 촌철살인 외교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 지원을 끊으면 안 된다"고 촌스럽게 윽박지르지 않았다. 대신 영국 군함 'HMS 트럼프'의 종을 선물했다. 치밀하게 계산된 심리전이다. 거대한 자기애를 정면으로 찌르는 대신 "당신 이름이 역사의 묵직한 종소리로 남아야 하지 않겠소"라며 띄워줬다. 트럼프 대통령이 람보르기니 엔진을 시끄럽게 공회전시킬 때 찰스 3세는 조용히 차 키를 뽑아버렸다.

찰스 3세의 노련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1939년 조지 6세와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만남을 현재로 소환해 지금을 '세계 질서 붕괴 전조'로 덧칠했다. 미국 공화주의의 신성한 텍스트인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연설까지 끌어왔다. 외국 군주가 미국 민주주의 성인을 소환해 미국 대통령을 훈계한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겉으론 고마움을 표했겠지만 속으론 뒤통수가 얼얼했을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등 권위주의 제왕들이 영토를 탐내는 지금, 찰스 3세는 우크라이나·대만·유럽 안보라는 무거운 계산서를 트럼프 대통령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미국이 세계 질서의 제왕 놀이를 하고 싶다면 왕관의 청구서도 결제하라는 압박이다.

세련된 영국식 압박도 마냥 박수 칠 일은 아니다. 세상을 착한 자유주의와 나쁜 전체주의라는 1939년식 이분법으로 쪼개면 복잡한 외교 방정식은 사라진다. '싸울래, 항복할래'라는 숨 막히는 양자택일만 남는다. 명분이라는 도덕적 취기에 빠져 협상과 비용이라는 계산기를 내던지는 순간 외교는 재앙으로 직행한다. 긴장감이라는 판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두 제왕은 같은 무대에 섰지만 전혀 다른 현실을 기획한다. 가짜 왕관을 쓰고 셀카를 찍으며 논란을 즐기는 트럼프 대통령. 진짜 왕관을 숨긴 채 역사의 무게를 빌려 동맹에 책임을 묻는 찰스 3세. 정치인의 쇼는 하루짜리 밈으로 휘발되지만, 군주가 울린 종소리는 시대의 귓가에 오래 맴돈다. 왕관은  현실의 물길을 바꾸는 조타륜이다. 백악관의 금빛 찬란한 인테리어 속에서 진짜 무서운 포식자는 옅은 미소를 짓던 노련한 영국 노인이었다.

☞밈(Meme)= 인터넷 등에서 재미있는 이미지나 문구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복제되고 공유되며 유행을 타는 현상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