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신논단] 그날의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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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전 결승의 밤.
경기 시작까지 시간은 남았지만 스타디움은 이미 둥둥 울리는 북소리와 함께 양쪽 관중의 열기로 녹아내릴 지경이다.
관중이 각자 바라본 모습대로 경기를 재단하고 다수결로 심판의 결정을 뒤집는 경기를 우리는 바라는 것일까.
그날 준은 끝까지 관중석을 보지 않고 경기장의 하얀 선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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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전 결승의 밤. 경기 시작까지 시간은 남았지만 스타디움은 이미 둥둥 울리는 북소리와 함께 양쪽 관중의 열기로 녹아내릴 지경이다. 붉은 물결과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관중석은 진작부터 신경전이 넘쳐난다.
경기가 시작되고 주심 이름이 전광판에 떠오른다. 김 준. 한국계 일본인. 3초간 정적. 그리고 각자의 희망찬 해석, 그리고 불안감. "피는 못 속이지. 한국 편일거야" "일본 국적이잖아. 못믿어" 준의 심판 경력이 아닌 국적과 혈통이 순식간에 그를 재단한다.
준은 담담하게 센터서클로 걸어 들어왔다. 잔디가 스터드에 눌리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그의 귀에 또렷이 들린다. 그는 관중석을 보지 않고 경기장 라인을 차분하게 돌아본다. 그리고 첫 번째 휘슬. 킥오프.
전반 18분. 박스 바깥쪽에서 어깨와 어깨가 부딪히고, 발이 살짝 엉키며 한국 선수가 넘어진다. 한국 관중들은 "파울"을 외치고 일본은 "플레이온"을 외친다. 서로의 함성이 거대한 음파가 되어 경기장을 찢는다.
준의 휘슬이 삑 울린다. "파울". 한국 관중석의 환호가 터져 나오고 너만 믿는다는 신뢰의 함성이 터진다. 일본 관중석에서는 우~하는 야유가 물결처럼 밀려온다.
준은 그저 경기장 라인만 바라볼 뿐이다.
전반 34분. 복붙 같은 장면이 반대로 벌어진다. 비슷한 충돌, 그리고 비슷한 넘어짐. 한국 관중은 당연히 경기 속행될 것이라 기대하고 일본 관중은 미리 체념한다.
삑하는 짧은 휘슬. 그리고 일본 프리킥.
한국 관중석에서는 거친 아유와 일본인 물러가라는 야유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일본 관중석에서는 "이케 니폰" 함성이 밤하늘을 가른다.
그날 준은 양쪽 모두의 미움을 한몸에 받는다. 그리고 이상하게 균형 잡힌 그 지점에서 경기는 리듬을 찾았다.
사법은 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일까. 이 오래된 질문은 마치 왜 심판을 관중이 뽑지 않을까는 질문과 닿아 있다.
경기장은 늘 뜨겁게 달아오른다. 실축 한번에 관중은 분노하고, 그림같은 패스 한방에 언제 그랬냐는 듯 환호한다. 그 거대한 감정의 파도 한가운데서 심판은 늘 외롭다. 혹시 내가 놓친 게 아닐까, 이 판단이 맞을까, 최선을 다해 내린 결론 앞에서도 한쪽에서는 반드시 저주와 분노가 쏟아진다.
솔직해지자. 우리는 관중으로서 늘 심판을 의심한다. 우리 팀에 불리한 판정에 고개를 젓고, 유리한 판정에 환호한다. 그리고 은근히 바란다. 나의 환호가 심판의 마음을 조금쯤 흔들어주기를.
그렇다면 정말로 관중이 심판을 뽑는다면 어떨까. 시즌이 시작되기 전, 팬들이 투표로 심판을 선출한다. 심판은 점점 박수의 크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휘슬은 규칙이 아니라 데시벨에 반응하고, 판정은 규칙이 아니라 환호의 방향을 따른다. 그런 경기를, 우리는 과연 경기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다. 그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설령 그것이 우리 팀에 유리하더라도 말이다. 상대 진영에서 뽑는 심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법은 비선출 권력으로 남아있다. 다수의 함성으로부터 거리를 지키고 언제나 가운데서 공정하게 경기를 이끌어가라는 국민의 선택인 것이다.
관중이 휘슬을 부는 순간부터 경기는 스포츠가 아니라 세 대결과 숫자 싸움으로 바뀌고 만다. 관중이 각자 바라본 모습대로 경기를 재단하고 다수결로 심판의 결정을 뒤집는 경기를 우리는 바라는 것일까.
공정함은 대개 인기가 없다. 내 편이 아닐 때 더 또렷한 기준, 내 마음과 다를때도 움직이지 않는 선. 그래서 그 자리에는 투표함이 놓이지 않는다.
그날 준은 끝까지 관중석을 보지 않고 경기장의 하얀 선을 바라봤다. 그리고 어쩌면 그 모습이 우리가 준에게 맡긴 유일한 역할이었을 것이다.
차호동 변호사(법무법인 광장)·전 부장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