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李 한마디에… 김병로·이시영 선생 묘역 지킨 집들 철거될 판

양인성 기자 2026. 5. 2.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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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후손 ‘강제 퇴거’ 위기
지난달 24일 서울 강북구 북한산 자락에 있는 집. 독립운동가 김병로 선생의 인척이 사는 집이다. 그는 여기 살며 근처에 있는 김병로 선생의 묘소를 관리하고 있다. ‘독립유공자의 집’이라고 쓴 명패가 걸려 있다. /박성원 기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무료로 변호하고, 광복 후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의 유해는 서울 강북구 북한산 자락에 안장돼 있다. 1964년 김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후손과 인척이 묘소 옆에 집을 짓고 주변을 관리해 왔다. 지금은 김 선생의 큰며느리 고(故) 고귀현 여사의 조카 고완석(82)씨가 이 집에 살며 30년 넘게 묘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고씨는 올여름 집을 비워야 할 처지에 놓였다. 북한산을 관리하는 국립공원공단이 지난달 10일 고씨에게 퇴거 방침을 통보했기 때문이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이 현행법상 ‘무허가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고씨는 “독립운동가인 선조 묘를 지키기 위해 산속에 집을 짓고 살아온 것이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며 “수십 년 아무 말 없다가 갑자기 나가라고 하니 막막할 뿐”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공단의 갑작스러운 퇴거 통보는 작년 12월 이재명 대통령이 기후에너지환경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법은 공정하고 엄정해야 한다”며 국립공원 내 불법 시설물 정비를 지시한 데 따른 것이다. 기후부는 산하 기관인 국립공원공단을 통해 북한산국립공원 정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고씨 입장에선 억울한 측면도 있다. 고씨가 사는 집은 무허가 건축물을 관리하기 위한 관련법이 생기기도 전에 지어졌다. 집은 1964년 김 선생 사망 직후 그의 손자인 김원규씨가 집을 지어 살았는데, 법은 1981년 제정됐다. 고씨 집처럼 법 제정 전 지어진 집들은 ‘기존 무허가 건축물’로 분류돼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1993년부터 이 집에 살았던 고씨는 그동안 정부나 관련 기관으로부터 아무런 안내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자기도 모르게 법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고씨가 살고 있는 마을에는 그의 집 외에도 독립운동가의 묘를 지키는 후손이나 묘지 관리인이 사는 집 2채가 더 있다. 고종 황제 특사로 네덜란드 헤이그에 파견됐던 이준 열사의 묘를 지키고 있는 박영희(79)씨와 우리나라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의 막내 손녀 이재원(77)씨의 집이다. 독립운동가 묘역이 모여 있어 이 마을에는 ‘순국선열묘역 순례길’이라는 역사 탐방로도 조성돼 있다.

박씨와 이씨는 아직 퇴거 통보를 받진 않았으나, 조만간 자신들에게도 통보가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박씨는 “우리 아버지가 이준 열사의 손자와 어릴 적부터 호형호제하던 사이였던 게 인연이 돼 직접 돈 들여 집 짓고 60년째 대를 이어 묘를 돌보고 있다”며 “독립운동가 묘에 꽃 한 송이 놓아준 적 없는 정부가 이제 와서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수십 년째 이곳에서 살아왔던 이들로서는 갈 곳도, 가는 데 드는 돈도 없는 상황이다. 불법 건축물이기 때문에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없다. 다만 오랜 기간 거주했다는 점이 인정되면 점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는데, 주거 이전비와 이사비 정도밖에 지원받지 못한다. 서울 내에서 집을 구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공단 측은 “정비 대상 주택에 사는 사람들의 이주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밝혔다.

나라 밖에서 숨진 독립운동가 묘역의 후손들 역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다가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한 최봉설 지사의 묘소는 카자흐스탄에 있는데 오물과 쓰레기로 훼손이 심각한 상태라고 한다. 이런 곳은 ‘국외 사적지’로 분류만 해놨지 예산이 없어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 지사의 막내딸 최 알렉산드라(98)씨는 “비가 오면 수시로 물에 잠겨서 여력이 있다면 당장 수리하고 싶지만, 손주들조차 그럴 형편이 못 된다”고 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계봉우 선생의 생가도 방치돼 매각 위기에 처했다.

광복에 기여한 독립운동가는 200만명 이상으로 추정되지만, 현재까지 국가가 인정한 독립유공자는 2만명이 채 안되고, 연금은 손자녀까지만 받을 수 있다. 독립유공자 가구의 절반은 월평균 소득 209만원 이하 저소득층인 것으로 집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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