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 회고록] 6학년 부산 수학여행, 여관방에서 처음 소주를 마셔봤다

안경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2026. 5. 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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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월산초등학교 졸업식. 사진의 원 속에 있는 소년이 나.

생애 단 한 차례의 수학여행
내 수중에는 초등학교 시절의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었다. 부지런히 수소문한 끝에 최근에야 한 친구가 보관하고 있던 몇 장의 사진을 구했다. 1960년 3월 졸업식 사진과 1959년 늦가을 수학여행 때 찍은 사진이다.

입학할 때 120명이 6학년이 되어서는 6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많은 아이들이 도회지로 떠났거나 학교를 아주 작파하고 농사꾼이 되었다. 농촌학교는 봄의 모내기 기간과 가을의 추수기에 학교를 쉬었다. '가정실습'이란 이름으로 농사일을 돕는 것이다. 가정실습이 끝나도 학교에 돌아오지 않는 학생이 생긴다. 학교에서는 선생을 앞세워 복귀를 독려하는 가정 방문에 나선다. 해당 동네의 급우와 간부 학생도 동원된다. 나도 몇 차례 동행한 적이 있다. 멀리서 일행이 오는 것을 본 동급생은 산으로 도망가거나 숨기에 바빴다. 친구를 학교에 보내달라는 호소에 어떤 부모는 한숨 담긴 저주를 퍼부었다. "너희들은 팔자가 좋아서 그런 소리를 하지."

상황이 이러할진대 농촌학교에서 가욋돈이 드는 수학여행을 추진하는 데는 많은 애로가 따른다. 1959년 가을, 졸업을 앞둔 수학여행은 부산에서 하룻밤을 자는 약식으로 축소되었다. 내심 실망이 컸다. 한 해 위 선배들은 2박 3일 일정으로 경주를 다녀왔다. 사촌 형은 교과서에 실린 불국사와 석굴암을 직접 보았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첨성대를 보고서 크게 실망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첨성대 안에는 동네 아이들이 내지른 똥으로 냄새가 진동하더라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에게 경주는 꿈의 수도였다. 그런데 그해 9월 추석날 '사라호' 태풍이 삼남 지방을 휩쓸었다. 경상도가 가장 피해가 컸다. 오늘날까지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수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망 및 실종 800여 명, 이재민 40만을 생산한 대참사였다. 이런 판국에 수학여행은 무리였다. 어찌어찌하여 교육청의 허가가 떨어졌는지 모르지만 최소한의 규모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담임선생에 더하여 교감선생이 인솔 책임자로 동행했다. 동급생들의 집단 기억을 종합해 본바 참가자가 20명 남짓이라는 결론이다. 이른 아침 학교 교정에 집합하여 읍까지 버스로 갔다. 정시 버스는 하루 두 차례밖에 운행하지 않기에 버스회사에 임시 배차를 요청한 것이다. 읍내의 진입구인 북성거리에 내려 밀양역까지 4㎞ 이상을 줄지어 걸었다. 그러고는 부산행 완행열차에 올랐다. 오후 늦게 찾아든 숙소는 부산역 근처의 허름한 여관이었다. 한 방에 적어도 대여섯 명이 배정되었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구해왔는지 알 수 없는 소주병을 나누어 마셨다. 나는 소주는 생전 처음이었다. 농촌의 사내아이들은 6학년이면 술이 낯설지 않았다. 집에서 빚은 탁주나 청주를 몇 모금 맛보지 않은 아이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악동들의 소주 파티가 한참 진행 중에 느닷없이 소집 명령이 떨어졌다. 국극 공연을 보러 간다는 것이다. 아마도 교감 선생님의 즉흥적 호기심이 발동했을 것이다. 당시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임춘앵(林春鶯 1923~1975) 국극단의 공연 소식을 접한 것이다. 일행은 극 중간에 들어가서 초만원인 관객 틈새에 끼었다. 나는 숨도 막히고 술기운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 죽을 뻔한 기억이 남아 있다.

친구가 간직하고 있던 두 장의 수학여행 사진은 이튿날 용두산 공원에서 찍은 것이다. '4292년 11월 14일 부산 수학여행' 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담임선생과 남자아이 5명이 번갈아 조합하여 찍은 것이다. 두 장 모두에 내가 들어있다. 사진 속의 나는 얼기설기 엮은 미니 대바구니를 손에 쥐고 앉은 포즈다. 바구니 속에는 사과가 몇 알 들어 있다. 할머니에게 드릴 선물이었을 것이다. 이때 다녀온 미니 수학여행은 길고 긴 학창 시절을 통틀어 내가 참여한 유일한 단체 여행이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생 때는 단체여행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1987년 초임 교수 시절에 졸업생의 여행에 동행한 것이 두 번째이자 마지막 수학여행이었다.
1958년 서울 진명여고생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수예작업을 하고 있다. 나는 탄신 기념 백일장에 나가 상을 받았다. 연합뉴스

백일장과 웅변대회
학적부에는 내가 암기력이 뛰어나고 문학적 소질이 풍부하다고 적혀 있다. 웅변에도 재능이 있다고 부기되어 있다. 백일장과 웅변대회는 당시 전국적으로 유행하던 학생들의 경연 무대였다. 6.25와 8.15를 포함하여 일 년에도 몇 차례나 각종 기념일 웅변대회가 열렸다. 웅변은 해방된 신생 국가, 동족 간의 전쟁을 치른 나라의 청소년에게 반공의식으로 무장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단합대회이기도 했다. 미리 외운 원고를 제스처를 써가며 재연하고 비장한 언어로 청중의 흥분을 유도하여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반드시 '물주전자가 튀도록' 책상을 내려치는 등 표준 매뉴얼이 있었다.

나는 읍에서 열린 웅변대회에 몇 차례 참가했다. 4학년 때 출전하여 장려상을 타고 그 후로도 몇 차례 더 입상했다. 아버지는 몸이 약하고 소심한 나를 담대한 청년으로 키우기 위해 대중 앞에 나서는 습관을 기르도록 적극 권장했다. 반면 문학적 재능은 누르는 편이었다. 아버지는 장차 나도 당신처럼 정치에 나서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나는 떠나온 읍 나들이를 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기에 자주 웅변대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한번은 단상에 서서 한참 열변을 토하다 외운 대사를 까먹는 참사가 벌어졌다. 평소 출중하다는 자신의 암기력만 믿고 대회 직전 몇 시간 방심하고 놀았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웅변대회 출전을 접었고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다시 무대에 올랐다.

5학년 담임선생은 내가 언어에 탁월한 소질이 있다며 극찬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글짓기를 지도할 사람이 없었다. 청운집에는 내 수준에 맞는 책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읽었다. 어쩌다 집안에 나뒹구는 철 지난 신문도 샅샅이 훑어가며 읽었다. 토씨 빼고는 모두가 한자인 신문은 입학 전에 속성으로나마 천자문을 뗀 나에게도 큰 도전이었다.

5학년 마지막 달인 1959년 3월 26일. '리승만 대통령 탄신 XX주년 기념 전국 어린이 백일장'이 열렸다. 제목은 '우리 대통령'이다. 사전에 참고 교재가 배부되었다. 《소년 리승룡》이라는 제목의 아동용 위인전이었다. 이에 더하여 나에게는 《민족의 거성》이라는 제목이 달린 교사용 참고서가 지급되었다. 명목상으로는 전국 대회이지만 실제로 모든 학교가 참가한 것은 아닐 터이다. 어쨌든 학교별로 치러 임의로 선정한 몇 편의 우수작을 상급기관에 보내고, 몇 단계 과정을 거쳐 최종 수상작을 선정했다. 수상작은 문교부가 발행하는 모범 글짓기 책에 실린다고 했다. 나는 서울에서 살다 온 아이의 기억을 되살려 꿈속에서 인자한 대통령 할아버지를 만나 북진통일 이루어달라고 부탁하는 요지의 글을 썼다. 선생들이 어떤 윤색을 가했는지 모르지만 내 글은 도 단위에서 우수작으로 선정되었다는 통보가 왔다. 신문에도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이듬해 일어난 4.19로 대통령이 실각하면서 책에는 실리지 않게 되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일찌감치 어용 시인으로 등단할(?) 뻔했다. 뒷날 진영 대창초등학교의 노무현 소년 스토리를 읽었다. 나로서는 상상조차 못 할 사연이었다. 그는 이 시제를 받아들자 백지를 내고 교실을 뛰쳐나갔다고 했다. 새삼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한 열등감이 되살아났다 (노대통령은 본시 초등학교는 나보다 한 해 위다. 고등학교는 같은 해에 부산에서 다녔고 간접적인 안면이 있다).

6학년 때 담임선생은 이북 출신으로 키도 크고 인물이 훤칠했다. 봄 가을 일 년에 두 차례 경상남도 전체 차원인지 아니면 군 차원인지 일제고사가 실시되었다. 학교장 책임 아래 시행되었는데 가끔 예고 없이 장학사가 참관하러 오기도 했다. 6학년 봄의 일로 기억한다. 나를 포함한 전교생의 성적이 기대 이하였던 모양이다. 교장 선생이 직접 채점을 하고서는 담임에게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는 것을 보았다. 한마디로 선생의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판단을 내린 듯하다. 후일 여러 자료를 읽으면서 월남한 인사들이 북한에서의 학력을 인정받기 위해 서로가 가짜 인우보증(隣友保證)을 하는 사례를 읽으면서 이분도 필시 그런 경로를 거쳐 교사 자격증을 얻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선생은 시험을 치른 후 채점을 반장인 나를 비롯한 몇몇 아이에게 시키기도 했다. 심지어는 내게 출제까지 맡긴 경우도 있었다. 원지 위에 철필로 긁고(쓰고) 등사지로 밀어 시험지를 만드는 작업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실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다.

나는 가산리의 그의 사택에 몇몇 동급생과 함께 자주 들렀다. 어린 남매가 있었고 부인은 수수한 용모에 후덕한 인상이었다. 그 선생은 내가 졸업한 2년 후에는 내 동생의 졸업반 담임도 맡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처자식을 버리고 술도가 앞 미용사와 함께 도주하여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결국 간통죄로 감옥생활까지 했다는 뒷소문이다. 그가 얼마나 비참한 말로를 맞았으며 그 어린 자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안경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