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도 책도 안 읽는 사람은 야만인… 정신이 가난합니다”
94세 ‘감천동 날다람쥐’
40년 신문 배달 오광봉씨
살구색, 연노랑색, 분홍색, 민트색, 연보라색…. 알록달록 파스텔톤이 얹어지니 가파른 산비탈에 다닥다닥 지어진 판자촌이 ‘동화 속 마을’로 재탄생했다. 부산 사하구 감천문화마을, ‘한국의 마추픽추’라 불리며 전 세계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드는 대표적인 명소다. 하지만 멀리서 감탄하는 것과 그 안으로 들어가 탐방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성인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만한 폭의 골목길과 가파른 계단이 산지사방으로 뻗어 있다.
이 마을 터줏대감 오광봉(94)씨는 요즘도 눈 감고도 길을 찾는다. 젊은 사람도 한두 달 못 버티고 나가떨어지는 ‘배달 난도’ 극상의 동네, 오씨는 최근 은퇴하기 전까지 이 동네에서 신문 배달 일을 했다. 40여 년간 매일 새벽 이 골목골목을 뛰어다닌 그의 별명은 ‘감천동 날다람쥐’다. 최근까지도 일손이 필요하다고 하면 몸에 밴 능숙한 노하우를 살려 신문을 배달했다. 오씨는 “신문 전성기 때는 매일 400부를 배달했다”며 “내가 배움은 짧지만 신문과 책 덕분에 한평생 글자 속에 살았다”고 말했다.

골목을 누비는 날다람쥐
물어물어 찾아간 오씨의 거처 입구에는 ‘정심덕 서원’이라는 작은 간판이 걸려 있었다. 정심덕(正心德)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덕을 갖춘다’는 뜻으로 그가 직접 붙인 이름이다. 5평 남짓이나 될까. 현관에 들어서니 약간 매캐한 잉크 향과 오래된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약 5000권의 책과 날짜 지난 신문이 잔뜩 쌓여 있었다.
-신문 배달 일은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20대 때 중앙동 부산일보 본사에 가서 신문 20부 정도를 사다가 다방이나 길에서 팔았어요. 신문으로 세상사를 배웠고, 그 돈으로 책을 사서 읽었죠.”
-배달 일만 평생 하신 거예요?
“젊어서 가내 수공업식으로 벨트 같은 액세서리 만드는 데 취업했는데, 기계에 손이 빨려 들어가면서 오른손에 장애가 생겼어요. 25세 때였는데, 다시 취업을 하고 싶어도 받아주는 데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확 어떻게 해버릴까, 모진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러다 신문 일이 생각나신 건가요.
“1·4 후퇴 때 부산에 와서 자리 잡은 게 이 근처예요. 이 동네는 내가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고, 두 다리는 튼튼하니까 한번 해보자 한 거죠. 새벽에는 신문 배달하고 낮에는 신문 확장(독자를 늘리는 판촉 활동)을 해서 딸 둘에 아들 하나를 키웠습니다.”
-이 동네는 배달이 너무 어려웠을 거 같아요.
“그래서 경쟁자가 없었나 봐요. 젊은 사람들도 한두 달 못 버티고 포기하니까 내 전담이 된 거죠. 부지런히 다니니까 다들 도와주고 부수가 늘어서 괜찮았어요. 조선일보·부산일보 같은 종합일간지와 경제지를 내가 다 했습니다.”

비록 오른손가락을 쓰지 못했지만 오씨만의 방식이 있었다. 정방형으로 야무지게 접은 신문을 오른쪽 옆구리에 끼우고 골목길을 뛰며 왼손으로 신문을 던졌다. 현관 너머 마당, 2층 창문 안쪽, 타깃에 정확하게 신문이 배달됐다. 직접 봐야 안다면서 골목에 나서 시범을 보이는데, 몸놀림이 청년처럼 날쌨다. 당장 오늘 새벽에도 한 바퀴 돌고 온 듯, 그에게 은퇴란 없는 듯했다.
“정신이 가난하군요”
신문을 팔아 번 돈으로는 책을 샀다. 매일 빼곡한 신문의 활자를 읽어 내려도 ‘읽기’에 대한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다. 넉넉하지 않은 삶이었지만 어렵게 모으기 시작한 책 한 권 한 권이 보물이 됐다. “가장 처음 산 책은 이가원 선생의 ‘한국 가면극’이었습니다. 외투 안쪽에 품고 집에 왔었어요.”
-왜 책을 좋아하세요.
“신문도 안 읽고 책도 안 읽는 사람은 야만인이오.”
그는 여전히 눈이 밝지만 귀가 어두웠다. 번번이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묻거나 필담으로 질문을 해야 했다. “귀가 멀고 눈이 좋은 게 나의 큰 복입니다. 오른손이 망가진 것도 별것 아니에요. 팔다리 없는 사람에 비하면 나는 아주 운이 좋은 편이지요. 사람이 다 만족할 수 없어요. 하나가 부족하면 하나는 좋은 법입니다.”
-신문, 책 읽는 사람 요즘은 많지 않은데요.
“내가 배움이 짧아서(초등학교만 나왔다) 그런지 항상 그 목마름이 있었어요. 일을 하다가도 책을 읽고 싶을 정도로 한이 맺혔어요. 책을 한 권 완독하고 나니까 또 읽고 싶은 책, 읽어야 할 책들이 무궁무진하게 늘어났습니다.”
-읽는 것 자체가 즐거우신 건가요.
“책은 읽을수록 채워집니다. 정신을 살찌워요. 책을 읽으면 절대 나쁜 생각을 가질 수가 없지요. 저자의 사상과 나의 생각을 비교하는 일이 즐겁습니다.”
그가 대뜸 “책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좋아하는 편인 것 같다”고 답했다. “플라톤은 읽었느냐, 몽테뉴의 수상록은 읽었느냐, 존 롤스는 읽었느냐….”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몇 차례 고개를 저었더니 꾸지람이 이어졌다. “정신이 가난해집니다. 철학과 고전을 읽어야 해요.”
-무슨 책을 가장 좋아하세요.
“톨스토이의 ‘인생독본’, ‘니코마코스 윤리학’…. 그런데 철학, 소설, 사상 어떤 쪽이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한나 아렌트, 슘페터…. 좋아하는 사상가는 너무 많지요. 책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어서요.”
-하루에 책은 얼마나 읽으세요.
“글쎄, 한 8시간쯤 되려나요. 아침에 2시간, 오후에 2시간, 저녁에 1시간, 자기 전에 한 2시간쯤. 아침엔 철학 서적을 읽고, 11~12시 사이에는 사상, 오후 2~3시에는 수필, 오후 5~6시에는 예술책을 읽어요. 나머지 시간에는 명상록을 읽습니다.”

오씨는 예술적 취향도 감추지 않았다. “귀가 잘 들릴 때는 음악도 많이 들었어요. 교향곡과 오페라 많이 들었고 제일 좋아하는 건 미국 컨트리 음악이에요. 밥 딜런, 에디트 피아프는 알아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악한 사람이 없어요.”
문우당 서점, 41만9000원
신문 배달로 다져진 단단한 다리. 오씨는 요즘도 걸어서 괴정동 성당에 다니고, 남포동·서면의 서점을 찾아다닌다. 지난 4월 6일 문우당서점에서 41만9000원어치, 책 17권을 산 영수증이 보였다. ‘알려지지 않은 미국 400년 계급사’는 3권이나 샀고, ‘정치적 자유주의’ ‘논어를 연찬하다’ ‘이방인, 신, 괴물’ ‘예수와 소크라테스에 대한 성찰’ 등이다. 제목만 봐도 취미 삼아 술술 읽을 책은 아니다.
-책이 5000권이나 있는데 또 많이 사셨네요.
“돈 많은 사람들은 정신이 가난하죠. 제대로 된 인간이 없어요. 책 많이 읽은 사람은 가난해도 가난하지 않아요. 책이 다 재산이죠.”
-책값은 어떻게 충당하세요?
“연금과 기초수급자 지원금 등 70만원 안팎으로 생활하는데, 20만원으로 반찬거리 사고 강아지 사료 사고 나머지는 모두 책 사요. 신문 배달할 때도 50만원 번다 치면 절반은 책 사는 데 쓰고 나머지는 어려운 이웃들을 도왔어요.”
-서원(오씨 집)에 손님이 오기도 한다면서요.
“여행 온 사람들이 자주 들러요. 내 책장을 보고 감동받아 편지를 보내요. 그러면 나는 보답으로 책을 보내기도 하죠. 내 얘기가 해외에 소개됐었나 봐요. 브라질·이탈리아·멕시코·아르헨티나·스위스 사람들도 더러 와요. 내게 꾸벅 인사하면서 10달러고 10유로고 후원금을 주고 갑니다.”
-책을 많이 읽었는데 글을 쓰진 않으세요?
“어허. 안 써요. 제일 무서운 게 글 쓰는 거예요. 함부로 쓰는 게 아닙니다. 글 한 번 잘못 써 놓으면 어떤 사람을 망칠지 어떻게 압니까. 세 치 혀가 제일 무섭다고 하죠? 말이고 글이고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너무 자기 중심적인 생각은 자제했으면 좋겠습니다. 물질적 풍요만 좇지 말고 정신과 마음이 부자 되는 삶을 누리면 좋겠습니다. 마음을 가다듬는 게 제일 중요해요. 정신을 살찌우게 하려면 책을 많이 섭취해야 해요.”
오씨는 사후 자신의 장서를 어디에 기증할지도 고민 중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책을 사 모은다. “바빠서 책 많이 못 읽었다는 말은 핑계밖에 안 돼요. 좋은 책을 읽으면 꽃밭에 살게 됩니다. 나는 아직까지도 아무런 병이 없잖아요.” 서울로 향하는 기자의 손이 무거웠다. ‘정치적 자유주의’, ‘알려지지 않은 미국 노동운동 이야기’, ‘민들레 솜털처럼’. 오씨가 직접 골라 선물한 책 세 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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