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사후 241년 뒤 복권... ‘왕사남’ 엄흥도 묘도 복원

김두규 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2026. 5. 2.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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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두규의 國運風水]
陵은 왕의 존재 증명하는
물리적 근거가 된다
강원 영월군 영월읍 팔괴리에 있는 엄흥도 묘. /김두규 제공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등장인물인 엄흥도(유해진 역)도 큰 주목을 받았다. 영화 속 엄흥도는 죽은 왕을 지킨 충신으로 그려진다. 역사에서 사라졌던 이름이 스크린을 통해 전면으로 떠올랐다. 영화가 끝난 뒤 관객들이 궁금해한다. “엄흥도가 누구지? 그의 묘와 고향은?”

단종의 무덤 영월 장릉과 인근 팔괴리에 있는 엄흥도 묘를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엄흥도의 후손들은 자신들이 사는 영월, 군위, 울산 등 서로 다른 장소에 진짜 무덤이 있다고 한다. 심지어 관련 학술 논문이 나와 논란을 부추긴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과 주장은 초점이 잘못됐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묻혀 있는가”가 아니라, ‘왕과 사는 남자’라는 서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다.

왕은 생전에만 왕인 것이 아니다. 죽어서도 그 산천의 왕이다. 죽은 뒤 왕의 통치는 능(陵)으로 이어지고, 그 능을 중심으로 기억과 권위가 다시 구성된다. 능의 존재 이유다. 이 점에서 단종은 조선 역사에서 특이한 존재다. 살아서는 왕위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으며, 능이 없어 왕으로서의 존재를 부정당했다. 그러나 241년이 흐른 뒤 왕으로 복권됐고 능을 되찾았다. 이 부활의 중심에는 결정적 조력자인 엄흥도가 있었다.

1457년,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영월에서 죽임을 당한다. 제대로 된 장례는 고사하고 시신은 청령포 차가운 강물에 던져졌다. 이때 영월 호장 엄흥도가 밤중에 시신을 거둬 몰래 묻는다. 시신을 자신의 선산으로 옮기던 중 잠자던 짐승이 놀라 달아났다. 그 자리를 보니 길지여서 그곳에 모셨다. 이는 단순한 전설이 아니다. 인간이 선택한 자리는 논쟁의 대상이 되지만, 자연이 드러낸 자리는 의심하기 어렵다. 짐승의 건전한 본능을 통해 은폐된 땅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나게 했다는 상징으로 해석된다.

매장은 날이 밝기 전에 서둘러 끝내야 했다. 광중을 다른 왕릉처럼 10자[尺] 깊이로 팔 수도 없었고 봉분도 제대로 만들 수 없었다. 묘비도 없었다. 이후 엄흥도와 가족은 발각을 피해 영월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은거한다. 왕의 시신은 분명 어딘가에 묻혔으나, 그 무덤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무덤은 관리하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필자의 경험상 봉분은 3년만 관리 안 해도 잡초와 잡목에 덮인다. 10년이 지나면 형태가 무너지고, 30년이 지나면 다시 산으로 돌아간다. 241년이라는 시간은 단종 무덤의 흔적을 지우기에 충분하다. 그사이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큰 난리를 겪었다. 난을 피해 사람들은 고향을 떠났고, 많은 문중의 족보와 선영들도 더불어 사라졌다.

1698년, 단종은 왕으로 복권된다. 왕은 이름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능이 있어야 한다. 능은 왕의 존재를 증명하는 물리적 근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단종의 능이 어디에 있는가이다. 241년 동안 방치된 묘를 찾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남아 있는 것은 전승과 이야기뿐이다. 조정은 ‘묘가 나타나기를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하나를 정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엄흥도라는 이름이 다시 호출된다. 단종의 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를 묻었던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흥도 역시 사라진 인물이다. 그의 존재 또한 묘를 통해 증명돼야 한다. 그런데 그의 묘 역시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래서 또 하나의 작업이 이루어진다. 엄흥도 묘의 복원이다.

단종의 능과 엄흥도의 묘는 대대적(對待的) 관계가 돼야 하며,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한다. 당시 조선은 풍수의 나라였다. 풍수상 ‘용진혈적(龍盡穴的·용맥이 다한 곳에 정확히 맺힌 혈)’에 좌청룡 우백호가 있어야 한다. 지금의 단종 능과 엄흥도 무덤 지형 지세가 유사한 이유다. 단종은 현실에서 패했으나 역사에서 승리했다. 복권이 됐고, 이때 그의 능 복원이 필수 선결 사항이 됐다. ‘왕과 사는 남자’가 필요했던 이유다.

최근 영월엄씨 지파들이 엄흥도 묘의 연고권을 주장한다는데,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관계 속에 있느냐다. 엄흥도의 묘는 단종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돼야 한다. 그 관계가 끊어지는 순간, 묘는 의미가 없어진다. 핵심은 이것이다.

주류 기성세대(세조)는 전도유망한 청소년 세대(단종) 싹을 가차없이 잘랐다. 변방의 양심 세력(엄흥도)은 그 잘린 싹을 안타까워하며 땅에 묻었다. 무덤이 됐다. 무덤은 잡초와 비바람 속에 사라졌다. 단종이 죽고 241년이 지난 1698년, 역사는 사라진 무덤을 소환했다. 그로부터 다시 328년이 지난 2026년, 단종 능과 엄흥도 묘는 1670만 관객의 눈물과 함께 화려하게 부활했다. 역사를 다룬 작품(소설·영화·드라마)들은 ‘과거’가 아닌 ‘지금 우리 시대’를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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