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빨리’ 대한민국 돌리는 ‘카페인 엔진’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2026. 5. 2.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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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생필품이 된 기호품
커피믹스 탄생 50주년

커피믹스 개발을 주도한 조필제(101) 전 동서식품 부회장이 지난달 20일 세상을 떠났다. 올해는 커피믹스가 탄생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커피·크리머·설탕을 한데 섞은 일체형 커피믹스가 1976년 대한민국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됐다.

커피믹스는 짧은 시간에 언제·누구나 균일한 맛을 낼 수 있다는 극강의 효율성으로 ‘빨리빨리’를 중시하는 한국인을 사로잡았다. 한때 대형마트 판매 1위를 차지했으며, 훈민정음·거북선·금속활자 등과 함께 ‘한국을 빛낸 10대 발명품’으로 꼽히기도 했다(2017년 특허청 설문 조사). 12g에 불과한 작은 커피믹스 봉지에는 지난 50년간 압축 성장한 한국 사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빨리빨리’ 문화와 결합, 국민 음료 자리매김

커피믹스는 커피·크리머·설탕을 소비자 입맛에 맞춰 표준화한 비율로 섞어 낱개 포장한 제품이다. 조 전 부회장은 지난 2017년 펴낸 회고록 ‘사막에 닻을 내리고’에서 “품질 관리 담당 사원이 커피, 프리마(동서식품 크리머 브랜드), 설탕을 한꺼번에 배합해서 물만 타면 간편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단순한 생각을 한 것이 시발점이 돼 곧 개발에 들어갔다”고 회고했다.

동서식품은 다방을 찾는 손님들이 “보통으로 주세요”라고 주문하는 데 주목했고, 전국 다방에서 ‘보통 커피’를 어떻게 타는지를 관찰해 커피·프리마·설탕을 배합했다. 커피믹스의 ‘황금 비율’은 영업 비밀이다. 다만 무게 기준 커피·프리마·설탕을 15:30:55 비율로 배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커피믹스는 국내 커피 소비문화를 바꿨다. 마실 때마다 비율을 맞춰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어주면서 재료와 도구를 일일이 갖추기 어려운 낚시터, 등산로, 작업장, 운동 경기장, 예비군·민방위 훈련장에서 특히 유용했다. 1980년대가 지나면서부터는 가정과 사무실, 공사 현장에까지 파고들었다.

커피믹스가 국민 기호품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효율을 추구하는 한국인의 성향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커피 제조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 빠른 카페인 섭취를 가능하게 했다. 박정배 음식 작가는 “숟가락 찾기도 귀찮아 빈 봉지로 젓는 행위는 한국인이 추구해 온 극강의 효율성을 상징한다”며 “봉지에서 환경호르몬이 녹아나올 수 있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바쁜 한국인에게는 오히려 ‘치열한 삶의 훈장’처럼 자랑으로 여겨지기도 한다”고 했다.

“커피믹스는 희한하게 종이컵에 타서 마시지 않으면 제맛이 나지 않는다”는 이들이 많다. 박 작가는 “종이컵은 커피믹스의 효율을 더욱 높여주는 최상의 파트너”라며 “종이컵은 도자기·유리 소재 컵보다 훨씬 얇아서 커피가 빨리 식는 단점이 있지만, 한국인은 이 단점을 오히려 빨리 마실 수 있는 장점으로 승화시켰다”고 말했다.

1976년 출시된 첫 커피믹스./동서식품

산업 현장 멈춤 없이 돌리는 ‘카페인 엔진’

커피믹스는 1997년 외환 위기를 계기로 급성장한다. 외환 위기가 닥치자 수많은 고졸 여성 직원들이 정리 해고 우선순위에 놓였다. 커피를 타 주던 여직원들이 사라지자 커피를 직접 타서 마시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막상 커피를 타 보니 여간 번거롭고 제맛 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때 커피믹스가 손맛 없는 직장인들의 구세주가 됐다. 커피믹스는 누가 타더라도 평균 이상의 맛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또 다른 대표 먹거리 라면과 공통점이 있다. 때마침 정수기가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커피믹스는 사무실 탕비실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커피믹스는 산업 현장에서 피로를 잊게 해주는 가장 저렴하고 강력한 ‘카페인 엔진’이 됐다. 특히 경찰·소방 등 철야 근무가 많은 직종이나 밤샘이 잦은 이공계 연구실, 예체능계 작업실에도 필수품으로 비치됐다. 군대에서도 마찬가지다. 육군 행정병으로 복무했던 직장인 이건호(51)씨는 “커피믹스 타기는 행정병이나 부관병의 핵심 역량 중 하나”라면서 “물의 양을 조절해 상관 입맛에 딱 맞추기도 쉽지 않았지만 특히 여름에 녹지 않은 가루가 없도록 냉커피 타는 일이 까다로웠다”며 웃었다.

커피믹스는 피로를 잊게 해주는 휴식의 도구를 넘어 산업 현장의 비상식량이 되기도 했다. 2022년 경북 봉화에서 광산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무너진 갱도에 고립된 광부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건 커피믹스 덕분이었다. 광부들은 커피믹스 30봉을 식사 대용으로 조금씩 나눠 먹으며 구조될 때까지 221시간을 버텼고, 구조 후 스스로 걸어 나올 만큼 상태가 양호했다. 이후 산업통상부는 광산 갱내에 커피믹스·통조림 등 고열량 식품을 산소·전기·식수·조명과 함께 담은 ‘생존박스’ 설치를 의무화했다.

2022년 경북 봉화 광산 붕괴로 매몰됐지만 커피믹스로 221시간을 버텨내고 기적적으로 생환한 박정하씨./조선일보DB

K컬처의 일부… 한국 여행 필수 기념품

해외에서 인스턴트 커피는 ‘저품질 커피’와 동의어다. 하지만 한국 커피믹스만큼은 예외다. ‘편리하고 달콤한 고품질 인스턴트 커피’라는 평가를 받는다. ‘발칙한 한국학’ 저자 스콧 버거슨이 “한국 커피믹스는 마약”이라고 칭송했을 정도다. 미국 아마존에 올라온 한국 커피믹스 상품평에는 “가격도 착한데 입맛에 잘 맞는다”는 호평이 대부분이다.

커피믹스는 한류를 타고 K커피의 대표 주자로 발돋움했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커피믹스를 종이컵에 타 마시는 장면을 통해 감성적인 음료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한 여행사가 외국인 관광객 1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 과반(53%)이 커피믹스를 ‘가장 맛있는 한국 차(茶)’로 꼽았다.

커피믹스는 한국에 오면 반드시 사 가는 필수 기념품이 됐다. 특히 국내 커피믹스 시장 점유율 1위인 ‘맥심 모카골드’가 외국인 관광객에게 인기다. 아이러니하게도 맥심을 해외에서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서식품은 1968년 설립 당시부터 미국 몬델리즈와 50대50 지분으로 세운 합작 법인. 맥심을 포함한 맥스웰하우스, 카누, T.O.P.(티오피) 등의 판매는 국내로 한정되어 있어 수출을 하지 못한다.

K푸드가 인기를 끌면서 커피믹스 수출도 늘고 있다. 맥심이 발 묶인 사이, 후발 주자들이 커피믹스 수출을 주도하고 있다. 시장 2위 남양유업은 ‘프렌치카페’와 ‘루카스나인’을 미국·중국·인도네시아 등에 수출하고 있다. 이디야커피도 전 세계 27개국에 믹스커피·스틱형 커피·드립커피 등 제품 36종을 미국·캐나다·일본·싱가포르·몽골 등에서 판매하고 있다.

불황으로 판매 증가세로 돌아서

커피믹스는 2009·2010년 2년 연속 이마트 판매 1위에 올랐다. 하지만 소비자 입맛이 고급화하면서 커피믹스 시장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2012년 1조3500억원으로 정점을 찍고는 감소세로 돌아섰다. 커피 전문점 시장이 급격히 커지고 소비자 취향이 까다로워지면서 매출이 줄었다. 캡슐·에스프레소 등 커피머신 보급 확산, 크리머·설탕 등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인식도 악재로 작용했다.

하지만 커피믹스 판매가 최근 증가세로 돌아섰다. 동서식품의 2024년 커피믹스 매출은 전년 대비 1.2% 증가했다. 증가세로 전환된 건 2014년 이후 10년 만에 처음이다. 불경기가 원인으로 꼽힌다. 회사원 한영희(32)씨는 “월급은 그대로인데 물가는 너무 올라서 예전처럼 자주 커피 전문점에서 아메리카노를 사 마시는 게 부담스러워 사무실에서 공짜 커피믹스를 타 마시게 된다”고 했다. 커피믹스의 귀환은 반갑지만, 불황이라는 달갑잖은 배경은 커피보다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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