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출근하는데 초등 자녀만 황금 연휴?… ‘5월 4일’이 괴로운 사람들

정시행 기자 2026. 5. 2.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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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돌봄 공백 부르는
학교 재량 휴업일
재량 휴업일을 둘러싼 맞벌이 가정의 한숨이 커진다. 가족이 함께 쉴 수 있게 일원화된 휴일 제도를 운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어린이날 서울의 놀이공원. /고운호 기자

중소기업 직원 이모(37)씨는 이번 어린이날 징검다리 연휴를 앞두고 속앓이를 했다. 초등학교 1학년인 딸(8)이 다니는 학교가 5월 3일 일요일과 5일 어린이날 사이에 낀 4일을 ‘재량 휴업일’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부부는 모두 출근하는 날. 자신은 막 이직해 연차는 그림의 떡이고, 남편도 월요일이 가장 바빠 쉴 수 없다고 한다.

학교 측은 긴급 돌봄 교실을 운영한다고 했다. 그나마 단축 운영에, 급식도 없다고 했다. 신청자는 단 2명. 대다수 맞벌이 부모가 “연휴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려니 눈치 보인다” “썰렁한 교실에서 아이가 풀 죽을 것 같다”며 어떻게든 쉬거나 조부모를 동원하는 식으로 해결하더라는 것. “그날 애들만 집에 두고 배달 음식을 시켜줄 것”이라는 집도 있었다.

이씨는 “눈 딱 감고 도시락 싸서 돌봄에 보내기로 했지만 너무 심란하다”며 “왜 정부와 학교가 공휴일 제도를 마구잡이로 운영해 아이 따로 부모 따로 각자도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 초등학교 돌봄교실. 5월4일 학교는 휴업하지만 저학년을 위한 돌봄 교실은 긴급 운영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상 부모들이 아이에게 미안하고 선생님 눈치가 보여 신청을 대거 포기한다고 한다. /조선일보DB

법정 공휴일이 아닌 학교 재량(자율) 휴업일을 둘러싼 혼선과 갈등이 크다. 재량 휴업일은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 의거해 교장 재량으로 쉬는 날로, 법정 수업일수(연 190일)를 맞추는 선에서 정할 수 있다. 통상 학기 시작 전 학사 일정으로 고지한다.

이번 5월 4일엔 전국 초등학교의 90% 이상, 중·고교도 60% 넘게 문을 닫는 것으로 추산된다. 재량휴업 여부는 학부모 대표가 참여하는 학교운영위원회 심의를 거친다지만 사실상 학교 측이 주도한다. 여기엔 교육청도 교육부도 개입할 수 없다.

재량 휴업일은 갈수록 봄·가을 관광 성수기에 ‘단기 방학’처럼 정례화되는 추세다. 어린이날이나 추석 연휴 사이에 낀 평일에 집중되면서다. 지난해 추석의 경우 서울 시내 초등학교 중 연휴 중간과 앞뒤로 재량 휴업일을 빼곡히 붙여 열흘 이상 쉬는 곳이 88%였다.

어린이날 전날인 5월 4일을 개교기념일로 바꾸고 6일은 재량 휴업해 최소 사흘의 자체 연휴를 만드는 학교들도 있다. 특히 최근 수년 새 명절 징검다리 연휴를 앞두고 정부가 내수 진작용 임시공휴일을 긴급 지정하는 일이 잦아지자, 학교들은 일찍부터 이런 날을 재량 휴업일로 ‘알박기’해 놓고 황금연휴를 확보하는 게 국룰이 됐다.

노동절 황금연휴를 앞둔 4월 30일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 국내선 터미널이 여행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연차를 미리 내 휴가를 계획할 수 있는 공무원이나 대기업 직원 등을 제외한 직업군엔 '그림의 떡'인 풍경이다. /뉴시스

문제는 이번처럼 정부가 생산성 저하 등을 우려해 4일을 임시공휴일로 정하지 않은 경우다. 경제난이 깊어지고 맞벌이 가정이 더 많은 요즘, 어린 자녀는 쉬는데 부모는 일하느라 돌봄 공백이 생기는 것이다.

해결책은 연차 휴가 확보뿐. 연차를 쓰기 쉬운 공무원이나 대기업 직원, 부모가 육아만 맡는 가정 등은 “여행도 하고 푹 쉴 기회”라며 재량 휴업일을 반긴다. 하지만 사정이 그렇지 못한 직업군이 훨씬 많다.

단 하루여도 여파는 크다. 2·4학년 남매를 둔 박모(41)씨는 “학교에 ‘법정 공휴일도 아닌데 왜 쉬느냐’고 묻자 ‘날씨 좋은 계절에 가족끼리 시간 보내라는 취지’라더라. ‘아이만 쉬면 연휴인가요?’ 되물으니 ‘학교가 안 쉬면 항의하는 부모도 많다’고 해 입을 다물었다”며 “재택근무를 요청했더니 직장에선 ‘애 엄마들 때문에 회사 분위기가 엉망’이라고 수군대더라”고 전했다.

경북 구미의 정모씨는 “동료끼리 눈치 싸움하다 뒤늦게 간신히 연차를 내고 국내 여행을 알아보니 숙박비가 평소의 3배나 올라 포기했다”며 “일정 미리 못 잡은 부모가 죄인”이라고 말했다.

경기도 오산의 김모(45)씨는 “4일 초등생 동생을 중학생 누나와 집에 두려고 했더니 중학교는 정상 등교라 둘째 돌봄에 비상이 걸렸다. 한 동네에서도 휴업이 뒤죽박죽이라니 황당하다”고 했다.

재량휴업일은 갈수록 봄과 가을 단기 방학처럼 정례화되고 있다. 인근 학원과 유치원까지 덩달아 휴업하는 등 학교 주변 상권에도 영향을 끼친다. 지난 2023년 재량휴업에 돌입한 세종시의 한 초등학교 교실. /뉴스1

또 학교 휴업일에 맞춰 주변 유치원이나 사설 학원까지 덩달아 문 닫는 경우도 늘었다. 미술학원은 쉬고 태권도는 여는 식. 한 피아노학원 원장은 “쉬는 집과 못 쉬는 집이 섞여 있으니 어떻게 해도 불만이 나온다. 우리도 중간에서 괴롭다”고 했다.

회사원 신모씨는 온라인에 “가족이 함께 못 쉬는 재량휴업일, 누구를 위한 휴일이냐”라고 푸념했다가 교사들로부터 “당신 애 보라고 교사는 남들처럼 황금 연휴도 못 누리고 일하라는 거냐” “학교 탓하지 말고 연차 못 쓰게 하는 회사를 탓하라”며 맹폭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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