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데자뷔’…민생 인질극, 길 잃은 지방자치 [오상도의 경기유랑]
1조6000억대 ‘1차 추경안’ 가로막혀…‘정치 인질극’·‘몽니’ 등 비판
2018년에도 기초의원 선거구 획정으로 갈등…민생 안건 등 발 묶여
경기도 “선거구와 맞바꿀 사안 아니다” vs 野 “집행부에 1차 책임”
“1조6000억원대 추가경정예산안과 기초의회 선거구는 맞바꿀 사안이 아닙니다.”
김성중 경기도 행정1부지사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지난달 30일 오후 경기도청에서 열린 긴급 기자회견에서 광역의회인 경기도의회의 행태를 성토했습니다.

처리가 무산된 1회 추경안에는 서민·소상공인들이 경기침체, 중동사태가 불러온 파고를 견디도록 돕는 소중한 민생예산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업비 가운데 70%는 고유가 피해지원금(1조1335억원)입니다. 극저신용대출(30억원), 산모신생아 건강관리(123억원), 여성청소년 생리용품(36억원) 등과 관련된 필수 예산도 포함됐습니다.
이번 파행이 비판받는 이유는 예산안을 두고 이미 도의회 여야가 합의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예산안 내용에 이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거구 획정’이라는 별개의 정치적 카드로 민생예산을 활용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대의기관으로서 책무를 저버렸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예산은 국민·도민의 귀중한 세금으로 마련된 도정 운용의 재원입니다. 이를 심의할 권한을 지닌 도의원들이, 자신들의 소유물인 양 몽니를 부린 셈입니다.

1일 경기도와 경기도의회 등에 따르면 이번 사태의 발단은 도가 제출한 ‘기초의원 선거구 획정안’입니다. 상임위원회인 안전행정위에서 의결하지 않으면서 본회의 상정이 안 됐고, 추경안을 포함한 50여개 안건 모두 본회의 처리가 불발됐죠.
획정안은 시·군 기초의회 의원정수를 463명에서 472명(지역구 415명·비례 57명)으로 9명 증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천 등 일부 지역의 의원 수가 줄면서 반발이 일었고 상임위 통과가 좌절됐습니다.
경기도의 선거구 획정안은, 도의회가 반발한다고 처리되지 않을 사안도 아닙니다. 회기 종료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에서 획정안을 검토해 경기도 조례 대신 선관위 규칙으로 확정합니다.
그럼 정치 사안을 떠나 예산 미집행이 불러올 영향부터 따져보겠습니다.
이번 추경안이 의결되지 못하면서 가장 타격을 입을 사람들은 취약계층입니다. 고물가·고유가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진행될 사업들이 줄줄이 막히기 때문이죠.
‘고유가 피해지원금’은 당장 지급에 차질을 빚을 거로 보입니다. 유가 급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도민 약 1000만명에게 소득 수준에 따라 1인당 10만원에서 최대 55만원까지 지급할 예정이었습니다.
국비 매칭 사업(국비 약 1조원·도비 약 1200억원)인 만큼, 도의회에서 예산이 확정되지 않으면 국비 집행조차 불가능해집니다. 당장 이달부터 시작될 예정이던 지급 일정이 혼란을 겪으면 생계형 운전자나 저소득층의 부담이 가중되겠죠.
‘경기 극저신용대출 2.0’은 중단 위기에 놓일 수 있습니다. 신용등급이 낮아 제도권 금융 이용이 어려운 도민에게 긴급 생계자금을 저리로 빌려주는 사업입니다. 이번 추경에 약 30억원의 증액안이 포함돼 있었죠. 지급이 늦춰지고 기존 예산이 소진될 경우, 대출이 필요한 영세 자영업자나 금융 취약계층이 불법 사금융으로 내몰릴 위험이 큽니다. 특히 상환금(90억원 규모)을 활용한 선순환 구조 설계에 제동이 걸리면서 사업의 지속 가능성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돌봄 및 지역경제 예산 공백’도 문제입니다. 산모·신생아 돌봄은 영아 및 산모를 위한 긴급 지원 서비스입니다. 이 예산이 묶이면 현장 인력 운용 및 서비스 제공에 차질을 빚습니다.
◆ 정치 인질극?…“선거 앞둔 정치인, 국민 위해 일해야”
‘지방채 발행 연계 사업’도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경기도는 어려운 재정 여건에도 지방채까지 발행해 재원을 마련했으나, 의결 무산으로 인해 예정된 지역경제 활성화 사업들이 시작조차 못 하게 됐습니다.
도민을 대상으로 벌인 ‘정치적 인질극 (Political Hostage-taking)’이란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경기도는 당장 시·군 협력을 거쳐 ‘성립 전 예산 제도’와 ‘예비비’를 동원해 피해를 최소화한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전체 추경 규모를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도의회의 원포인트 임시회 개최 여부가 관건이 될 전망입니다.

임기가 두 달도 남지 않은 김동연 지사는 허탈한 감정을 내비쳤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모든 정치인이 국민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하는데 정작 시급한 민생예산은 뒷전”이라며 민생 공백 최소화를 약속했습니다.
도의회 정회가 풀리지 않자 김진경 도의회 의장과 백현종 국민의힘 대표의원을 찾아가 읍소하기도 했습니다. 김 지사는 기자들과 만나 “기초의원 지역구 획정 문제는 추경이랑 아무 상관 없는 문제”라며 “도민들의 민생과 어려운 경제 상황을 봤을 때, 반드시 통과시켜 예산 집행을 할 수 있도록 촉구했다”고 말했습니다.
◆ 2018년 ‘기득권 카르텔’의 역습…‘6·3 지방선거’ 民心은?
궁금해서 한번 살펴봤습니다. 정치적 사안으로 경기도의 예산안이 인질로 잡힌 사례를 찾아봤죠.
가장 비슷한 사례는 2018년 제7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발생한 경기도의회 기초의원 선거구 획정 지연 사태입니다. 지방의회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민생 및 선거 행정에 얼마나 큰 혼란을 줄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죠.
당시 파행의 원인은 ‘4인 선거구’ 도입을 둘러싼 갈등이었습니다. 경기도 선거구획정위원회는 소수 정당의 의회 진출을 돕고 정치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 2인 선거구를 통합해 4인 선거구를 대폭 늘리는 획정안을 마련했습니다.

의사일정 거부와 본회의 파행으로 다른 시급한 조례안과 민생 안건들이 함께 묶여 처리되지 못했고, 다시 2인 선거구로 분할하는 수정안마저 본회의에서 기습 처리되면서 ‘기득권 지키기’라는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경기도의회는 2022년에도 정치 다툼으로 ‘준예산’ 사태의 우려를 키운 바 있습니다. 제11대 도의회 개원 당시, 의장 선출과 상임위 배분 등 원 구성 협상이 난항을 겪으며 추경안 처리가 늦어졌죠. 당시에도 민생 경제 위기 상황에서 “정치 싸움에 예산은 뒷전”이라는 비판이 거셌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지방의회의 정치적 갈등이 법정 시한 준수나 민생 예산 집행보다 우선시되면서 그 피해가 고스란히 도민들에게 돌아간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6·3 지방선거’가 한 달여 남았습니다. 투표장으로 향하는 도민들은 지금의 상황을 좌시(坐視)하지 않을 겁니다.

오상도 기자 sdo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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