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색·선으로 그려낸 사색 … '명상하는 사람'이 건네는 쉼표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나도 절로절로."
전국 산천을 유람하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사색에 잠긴 화가가 있다. 한국 현대 판화의 선구자이자 독보적인 회화 세계를 구축한 김상유(1926~2002)다. 그는 자연의 순리대로 살며 그 풍경 속에 녹아든 자신을 화폭에 담았다. 서울 종로구 서울미술관에서 열리는 김상유 탄생 100주년 기념전 '쉽게 닳지 않는 사람'은 끝없는 자극과 정보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자신을 돌아볼 사유의 시간을 건넨다.
김상유는 평생 세속적인 화려함보다는 작업실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작업을 이어간 화가였다.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교사로 살아가던 그는 마흔을 앞둔 1963년, 우연히 접한 미국 미술 잡지를 통해 잊고 있던 예술가로서의 갈망을 다시 마주한다. '이렇게 끝낼 수 없다'는 절박함은 그를 독학의 길로 이끌었다. 그렇게 늦깎이 예술가의 여정이 시작됐다.
그가 미술을 시작할 당시 한국은 판화의 불모지였다. 재료도, 장비도, 가르쳐 줄 이도 없었다. 하지만 김상유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버려진 국수 기계를 가져와 분해하고 다시 조립해 자신만의 판화기를 직접 제작했다. 판을 부식시키기 위해 필요한 초산을 구해 아연판을 부식시키며 독자적인 기법을 연구했다. 특히 아연판을 부식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독한 가스는 그의 건강을 갉아먹었다. 시력이 급격히 나빠져 실명 위기에 처하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는 칼과 붓을 놓지 않았다. 1960년대 한국 최초로 동판화를 시도하고 현대 판화의 영역을 넓힌 배경에는 이 같은 집념이 있었다.

작가의 초기 작품에서는 이 같은 실험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난다. 초기 작업은 비정형적 화면과 거칠고 자유로운 선이 특징이다. 인물의 형상도 아직 분명히 자리 잡기 전으로,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추상적 이미지가 주를 이룬다. 이후 작가는 한글과 한국의 건축, 전통 문양 등을 동판화로 그리며 한국적인 것을 찾아 나섰다. 한국의 기물, 건축, 정서를 새긴 그의 판화는 특급호텔 화랑에서 외국인들에게 기념품으로 판매되기도 했다. 동판 작업으로 녹내장이 생긴 작가는 재료를 목판으로 바꿨고, 이 과정에서 더 단순하고 향토적인 질감을 구축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유화로 작업을 확장했다. 그는 캔버스에 색을 채운 뒤 천으로 닦아내는 독특한 기법을 사용했는데, 덕분에 유화지만 동양적인 수채화의 질감을 구현했다. 유화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은 단순한 색과 면, 그리고 절제된 선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늘 '명상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화면 속 가부좌를 틀고 앉은 인물은 일차적으로는 작가 자신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림 속 인물도 함께 늙어간다. 젊은 시절 꼿꼿했던 인물은 시간이 흐르며 머리가 조금씩 벗겨지고, 신체는 더욱 단순해진다. 작가는 나이 드는 자신의 모습을 숨기거나 미화하지 않고 정직하게 화폭에 옮겼다. 이는 예술이 곧 삶이고, 삶이 곧 명상이었던 그의 철학을 대변한다.

작가는 생전 "명상을 하는 사람은 저이지요. 또 누구든 될 수 있습니다"고 말했다. 그의 예술이 개인의 독백을 넘어 보편적인 위로로 닿는 이유다. 만년의 작품들에서는 자연과 완전히 하나가 된 경지를 보여준다. 검은 윤곽선이 사라지고 하얗게 비워진 배경은 비움으로써 가득 채워지는 무위자연의 미학을 완성한다.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담긴 작품들도 관람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작가는 두 딸을 귀여운 흰 새로 형상화해 화면 귀퉁이에 그려 넣었는데, 따뜻한 부성애와 다정한 시선이 느껴진다. 그의 그림은 이같이 차가운 철학적 사유를 넘어 인간적인 온기를 품고 있다.
전시의 입체감을 더하는 것은 풍성한 아카이브 자료다. 특히 매일경제가 1993년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해 보도한 기사 자료가 전시에 함께 소개돼 눈길을 끈다. 당시 기사는 조용한 작업실에서 치열하게 작업하던 작가의 일상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전시장 한쪽에는 작가의 손때가 묻은 작업 도구와 유품 등이 전시돼 그의 삶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서울미술관 설립자 안병광 회장의 집념 어린 컬렉션이 바탕이 됐다. 작가가 평생 300여 점의 작품을 남긴 가운데, 안 회장은 20여 년간 100여 점을 수집해 보존해왔다. 안 회장은 "2002년 현대화랑에서 하는 김상유 전시에 갔는데, 당시 관람객이 나 혼자였다. 많이 씁쓸했고 김상유 선생님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며 "그날 전시회에 있던 작품을 몽땅 다 사버렸다"고 말했다. 이어 "훌륭한 작가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김상유 선생님을 양지로 끌어내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잊힐 뻔한 거장의 생애를 온전히 지켜내겠다는 수집가의 고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대규모 회고전이다.

최근에는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이 작가의 '대산루'를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젊은 세대 사이에서도 김상유 열풍이 불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RM이 소장한 작품과 유사한 분위기의 대표작들이 대거 출품돼 젊은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자극적인 영상과 빠른 정보에 노출된 세대에게 작가의 여백과 침묵이 역설적으로 가장 신선한 자극이 된 셈이다. 자극 과잉의 시대, 쉽게 닳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원하는 이들에게 이 전시는 조용한 답이 된다. 석파정의 푸른 녹음과 함께 작가가 남긴 사색의 시간을 마주할 수 있다. 전시는 8월 17일까지.
[정유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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