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취재썰]AI 침공 시작되자... 판결문에 "존재 않는 사건번호" 지적 나선 판사들

김혜리 기자 2026. 5. 1.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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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로 작출한 거로 보여" 허위 판례 지적 명시

"챗GPT한테 물어보니까 알려주던데요. 대법원 판례라는데 뭐가 틀렸다는 겁니까?"

AI 제작 이미지.
최근 법원에선 이런 식의 주장이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몇 줄만 입력하면 AI가 소송 서류도 대신 써 주고, 비슷한 판례까지 찾아주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나만의 법률 비서',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일까요? AI가 알려준 판례가 실제로 없는 사건이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런 'AI 환각' 때문에 법원엔 경고등이 켜졌습니다. 법원에 제출되는 서면에 실제로 없는 사건번호가 발견되기 시작한 겁니다. 대부분이 변호사 없이 직접 소송에 임하는 이른바 '나홀로 소송'입니다. 판사가 '사건번호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지적하면 고치기도 하지만, 'AI가 찾아준 건데 그럴 리 없다'며 꿋꿋이 밀어붙이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결국 판결문에 AI 환각으로 인한 오류를 직접 지적하는 문장이 등장하게 된 이유입니다.


올해 '허위 판례' 지적 판결문만 5건..."임의로 작출"



JTBC가 대법원 판결문 열람서비스를 통해 확인한 결과, 올해 들어 '존재하지 않는 사건번호'를 판결문에 명시한 판결은 총 5건이었습니다.

대구지법 영덕지원 김지영 판사는 지난 1월 6일 소유권이전등기 사건 판결문에 "원고가 드는 판례는 위 법리와 어긋나는 존재하지 않는 판례이거나 이 사건에 적용할 수 없는 것으로, 이를 기초로 한 원고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적었습니다. 어떤 땅의 주인이 되기 위해선 땅을 20년 동안 점유하고 당시 등기부상 소유자한테 소유권이전등기 소송을 청구해 인용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선 원고가 소송을 청구하기 전에 피고가 다른 사람에게 소유권을 이전했던 터라 당시 등기부상 소유자라고 볼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김 판사는 판결문에 이와 관련된 대법원 판례를 적으면서 원고가 든 판례는 적용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서울남부지법 이학영 판사도 지난 1월 13일 금전 소송 판결문에서 비슷한 취지의 지적을 했습니다. 피고가 약정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는지 다투는 사건이었는데, 원고 손을 들어주면서 "피고의 주장은 존재하지 않는 판례를 원용한 것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판시 내용을 근거로 삼은 것으로서 아무런 법률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피고의 독자적인 견해에 불과하므로 그 자체로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시한 겁니다.

서울남부지법 함현지 판사는 지난 4월 16일 판결문에 "피고가 이 법원에 제출한 준비서면에 기재한 판례는 모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건번호이거나, 전혀 다른 사건에 대한 것으로 그 주장과 같은 판시를 하고 있지 않음을 밝혀 둔다"고 적었습니다. 서울중앙지법 이건배 판사도 지난 1월 15일 판결문에 "피고는 자신의 주장에 부합하는 판례로 대법원 2002다38337 판결을 들고 있으나, 존재하지 않는 사건번호이다"라고 적시했습니다. 두 사건 모두 소액 사건이라 판결문에 판결 이유를 굳이 자세히 적지 않아도 됐지만, 피고들 주장의 근거가 '가짜 판례'였던 만큼 이를 지적한 거로 해석되는 부분입니다.

재판에선 이겼지만, '가짜 사건번호' 덕분에 이긴 것은 아니라고 상세히 기재한 판사도 있었습니다. 전주지법 정읍지원 지충현 판사는 지난 2월 12일 중개수수료 청구 사건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원고 주장이 타당하지 않으니 피고들이 원고에게 중개보수를 줄 필요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판결문에 "피고가 답변서에서 인용한 '대법원 판례'들은 사건이 아예 존재하지 아니하거나 피고가 주장하는 내용과는 전혀 무관한 판례로서, 피고가 임의로 작출해낸 것으로 보인다"고 적었습니다. 판결문 각주에 피고가 인용한 판례들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도 적혔는데, '폭행사건에 관한 사실오인·정당행위 주장을 배척한 형사판결' 등 중개보수와는 완전히 무관한 판결들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건번호도 있었습니다.

지 판사는 JTBC와의 통화에서 "적지 않고 넘어가면 '가짜 판례'를 그냥 믿고 판결한 게 아니냐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 않겠냐. 결론을 어떻게 내리는지와 상관없이 잘못된 건 잘못된 것이라고 오히려 더 써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급심 접근성' 늘려야 한다는 지적도



'허위 판례'를 제출하는 사례들이 잇따르자 법원행정처도 조치에 나섰습니다. 행정처는 지난 2월부터 사법정보공개포털 홈페이지를 통해 '허위 사건번호 확인' 서비스를 제공 중입니다. 여기에 실제로 없는 사건번호를 입력하면 '존재하지 않는 사건번호입니다. 허위 정보일 수 있으니 주의하십시오'라는 경고가 뜹니다. 판사들이 사용하는 재판 지원 AI 시스템에도 '가짜 판례' 판별 기능이 향후 추가될 예정입니다. 서면으로 제출된 판례나 법령을 검색해보면 해당 사건이 실제로 있는지 여부를 판별해주는 식입니다.
사법정보공개포털의 '허위 사건번호 확인' 서비스. | 사법정보공개포털 홈페이지 화면 캡쳐

다만 법원 내부에선 이 문제를 단순히 AI 탓으로만 보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수도권의 한 부장판사는 "당사자들은 하급심 판례를 자유롭게 검색할 수 없으니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며 "법원이 판례를 공개하지 않아서 당사자들이 실제로 법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모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해당 판사는 "법원으로선 부정확하지 않게 AI가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판결문 공개 범위 확대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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