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애도를 감각하다[이주영의 연뮤덕질기](71)

2026. 5. 1.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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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먼스 <리모트 서울>·<파빌리온 72>, 연극 <맥베스 리포트쇼>·<섬 이야기>·<뼈의 기록>, 뮤지컬 <라져(ROGER)>, 오페라 <베르테르>
<리모트 서울>의 마무리 퍼포먼스인 25층 건물에서 바라보는 서울 전경. GS아트센터 제공

익숙한 거리인데 낯설다. 헤드셋 속 목소리 지시에 따르며 국립현충원 묘비 탐험으로 시작해 혼자라면 절대 못 할 발레 자세로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헤드셋을 착용한 퍼포머 30명이 지하철 개찰구 앞에 모여앉아 나오는 승객들을 향해 좋은 공연이었다며 손뼉을 친다. 지나던 시민이 “몰카냐”고 묻는다. 헤드셋을 통해 철학적 질문들, 도시 공간과 어우러지는 이야기와 퍼포먼스, 마음속의 다짐, 아름다운 음악 등이 끊이지 않고 입력된다.

헤드셋 바깥세상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단체 퍼포먼스를 하면서 지하철을 타고 걷고 달려 서울 역삼동 GS아트센터 25층에 도착했다. 탁 트인 서울 전경과 마주하며 생생한 삶의 에너지를 인식하고 120분의 여정을 마무리하는데 심연까지 숨이 차오르다가 잔잔해진다. 120분간 착용해온 헤드셋을 벗으니 다시 일상으로 타임 워프한 느낌이다. 죽음과 안식에서 시작해 일상의 삶으로 돌아왔다. 독일 창작집단 리미니 프로토콜이 65개 도시에서 수행해온 체험형 퍼포먼스 ‘리모트 X’의 첫 한국판 <리모트 서울>(외르크 카렌바워 연출) 현장이다.

<파빌리온 72>에서 체류하는 다양한 관객. 국립극단 제공

치밀하게 설계된 오디오 디자인이 시간성과 융합해 공간을 새로이 조각하는 것은 국립극단 창작트랙 ‘극장의 다음: 다가올 낯선 감각들’의 최종 발표작 <파빌리온 72>(카입 작곡, 김상훈 연출, 백종관 영화감독, 오로민경 사운드아티스트, 황수현 안무 등)에서 경험한 바 있다. ‘72시간’ 동안 한남동 더줌아트센터 블랙박스 극장은 한켜 한켜 다양한 감각의 층으로 채워졌다. 방석을 깔고 앉거나 눕거나 자던 사람들은 인출식 객석이 잠깐씩 튀어나와 일반 극장의 형태를 갖춰도 바닥에서 자유롭게 체류했다. 사전 신청자는 2000여명. 3박4일간 입소문이 나면서 파빌리온 72 현장은 계속 일정한 인원이 체류하는 도심 속 이질적 시공간이 됐다. 운동하거나 물구나무서거나 큰 소리로 코를 골며 자거나 듣거나 보거나 읽는다.

<섬 이야기>에서 배우의 신체와 발굴된 제주 4·3 피해자 유해가 접촉하는 장면. 크리에이티브 VaQi 제공

당시 72시간 현장에 상주했던 작곡가 카입은 4월 29일 필자와 서면 인터뷰에서 “36시간을 중심축으로 시간의 방향이 서로 겹쳐지는 구조를 설계했고, 그 결과 72시간이라는 지속은 시작과 끝이 서로 연결되는 하나의 순환 구조처럼 작동했다. 이 시간 구조 안에는 재난 현장의 골든타임과 종교적 부활의 시간, 그리고 현대의 난민 캠프를 연상시키는 장면이 서로 다른 층위로 겹쳐졌다”라며 “밤을 새우는 체류자들의 모습이 난민촌 사운드와 이미지를 형성해 여러 생각이 드는 시간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제주 4·3 피해자 유해발굴 과정과 유가족들의 증언을 다큐멘터리 연극으로 담아낸 <섬 이야기>(이경성 콘셉트·연출·출연, 나경민·배소현·성수연·장성익 창작·출연, 이지형 인형디자인, 황호규 영상)는 제주 4·3 유해발굴 현장에서 출발한 기억의 감각을 무대 위로 옮겨오는 작업이다. 중심에는 유가족의 증언 사운드가 있다. 기록 자료가 아닌 현재의 시간으로, 배우들의 목소리 재현으로 세상에 드러난다. 배우들이 재현한 제주 방언과 다시 번역한 표준어 사이의 긴장은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감각 구조 가운데 하나다.

<뼈의 기록>에서 로비스와 모미가 나누는 긴 수화의 적막과 망자들의 뼈의 기록을 읽어내는 장면들. 예술의전당·할리퀸크리에이션즈㈜ 제공

번역될 수 없는 감각으로서의 언어를 신체로 드러내고 그들의 인고의 세월과 고통은 방언과 표준어, 제주 자연의 사운드 디자인으로 전달된다. 배우의 신체와 유해를 재현한 인형이 접촉하는 장면들은 이 작품의 정수다. 배우의 신체는 인형을 움직이는 장치가 아니라 기억이 통과하는 통로가 된다. 무대는 하나의 발굴 현장이 되고 배우의 신체는 발굴의 도구가 된다.

죽음을 체험 가능한 감각으로 만드는 무대인 연극 <뼈의 기록>(천선란 원작, 이해인 각색, 장한새 윤색·연출, 김홍남 수어, 권은혜 움직임, 김지우 무대·조명, 신민승 영상, 베일리홍 음악, 이현석 음향) 역시 <섬 이야기>의 연장선에 있다. 기억이 어떻게 전달되는가에 대한 시적이면서 역동적인 재현은 망자의 뼈, 유해를 염하는 과정을 상징하는 마임으로 대체된다.

로봇 장의사 로비스(강기둥·장석환·이현우 분)는 장례식장 청소부인 농아 모미(정운선·강해진 분)와 오랜 지기다. 염하는 과정에서 고인들의 뼈의 기록을 인식하고 고인의 사연과 존엄을 되새기는 로비스는 결국 모미까지 염하기에 이른다. 모미가 가장 무서워하는 뜨거운 불로 보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던 로비스는 모미의 시신을 들고 장례식장을 탈출해 우주선에 탑승한다.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을 원하는 방식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는, 애도의 구조를 재구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감각의 배치 방식이다. 영상은 시야의 깊이를 확장했고 음향은 공간의 방향 감각을, 조명은 시간의 층위를 세밀하게 나눠놓는다. 덕분에 마지막 로비스의 지구 탈출 장면은 소극장임에도 고속의 탈주 장면으로 와닿는다.

<베르테르>의 이뤄지지 않아도 멈추지 않는 사랑은 결국 샤를로트의 이해와 긴 공명, 발레 2인무를 통해 감각된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 <베르테르>(괴테 원작, 쥘 마스네 작곡, 에두아르 블로·폴 밀리에·조르주 아르트망 대본, 홍석원 지휘, 박종원 연출, 볼프강 폰 주벡 무대·의상·조명)는 이루어지지 않음에도 변치 않는 사랑에 대한 예의를 담고 있다. 마지막 대단원, 무대 심부에서 전면으로 달려오는 베르테르 집 세트의 영화적 줌인 미장센과 역동적인 무의식의 사랑을 표현한 연출, 여러 층위의 사운드 디자인이 오감을 자극한다. 샤를로트(정주연·카리스터커 분)는 베르테르(이범주·김요한 분)의 권총 자살 이후 그에게 달려가 모든 이야기를 듣고 공명한다.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 샤를로트의 마음은 후면의 창문 밖에 사랑하지만, 맺어질 수 없었던 연인의 심연이자 무의식을 상징하는 발레리노와 발레리나의 열정적인 파드되(2인무)로 완성된다.

<라져>의 동체 착륙을 유도하는 해상 선박들의 연대의 활주로 조명은 시공간을 초월한 연대의 현장이다. ㈜창작하는공간 제공

뮤지컬 <라져(ROGER)>(김정민 작, 성찬경 작곡·음악감독, 이재준 연출, 홍유선 안무, 남경식 무대, 이현규 조명, 이기준 음향, 문혜진 영상)는 비행기 참사 가해자로 지목된 아버지에 대한 애도를 수십년간 이어온 아들의 이야기다. 공항 관제사 스카일러(주민진·고상호·기세중 분)와 선박 관제사 디디(정휘·이한솔·박주혁 분)는 우연히 주파수대가 맞아 스승과 제자 관계가 된다. 과거 비행기 참사의 가해자로 지목됐던 아버지의 억울함을 바로잡기 위해 관제사가 된 스카일러에게 관제는 항공 통제가 아니라 기억의 복원이다. 과거의 시간을 현재의 선택으로 다시 연결하는 작업이다.

디디는 선박 관제를 통해 고향의 바다를 지키는 인물이다. 그의 선택 역시 직업이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 형식이다. 중요한 일정을 희생해 재난 상황의 항공기 관제에 직면한 스카일러는 악천후에 해수면 동체착륙을 시도한다. 순간 프로시니엄 무대는 거대한 비행기로 변하고 관객은 사건을 바라보는 위치가 아닌 사건 속에 흡수돼버린다. 조명은 공간의 방향 감각을 재구성하고, 영상과 음향은 비행기 동체착륙을 위한 해수면 활주로를 만들어주는 선박들의 라이트로 전환된다. 여객선 착륙의 굉음이 극장 전체를 진동케 하고 객석 1열에서 착륙을 유도하는 핸디 라이트를 든 스카일러는 구세주로 다가온다. 극장 모든 감각 시스템이 관객의 신체적 위치를 이동시키는 장치가 되는 순간이다. 객석 전체가 함께 착륙하는 감각은 생존의 기억을 공유하는 경험에 가깝다. 이때 애도는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공동체의 감각이 된다.

스카일러의 선택이 결국 아버지의 누명을 바로잡는 결과로 이어지는 서사는 단순한 해결의 장면이 아니다. 개인의 선택이 공동체의 기억을 복원하고 수정하는 순간 공연은 과거의 시간을 현재의 시간 안으로 다시 편입시키는 입체적인 층위의 구원 서사로 확장된다. 본격적으로 잘못된 비행기 참사 조사에 대한 유가족들의 목소리가 확장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맥베스 리포트 쇼>는 관객 토론회 직전까지 파격적인 신체 연극으로 맥베스의 권력욕을 풍자한다. 극단 바바서커스 제공

연극 <맥베스 리포트 쇼>는 권력욕의 화신으로 정의 내려진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 등 주변 인물들을 침팬지에 비유하는 과감한 신체 연극이다. 연희예술극장의 오픈된 극장이 세 마녀의 숲이 되기도, 동물원이 되기도, 군중 집회의 장이자 관객과 배우들의 대토론회 공간이 되기도 한다. 맥베스의 전형적인 서사 중 파국 직전에 극은 현실이 된다. 배우들이 모두 퍼실리테이터(조력자)가 돼 ‘권력을 쥐게 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에 대한 주제 토론을 관객들과 벌이고 조별 발표까지 하며 마무리한다. 공연은 이야기의 공간에서 현실의 공간으로 이동한다. 맥베스의 권력욕은 셰익스피어의 텍스트 안에 머무르지 않고 동시대의 문제로 재인식된다.

최근에 체험한 이 일련의 퍼포먼스들은 서로 다른 주제와 형식을 갖고 있음에도 공통적인 문제의식과 질문을 공유하고 있다. 삶과 죽음 그리고 애도에 대한 인식과 참여다. 메를로 퐁티는 인간의 지각이 세계를 멀리서 바라보는 행위가 아니라 세계 속에서 서로 얽혀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다른 작품들은 최근 공연이 끝났고, <리모트 서울>과 <뼈의 기록>은 5월 10일, <라져>는 5월 31일까지 체험할 수 있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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