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서 온 질문, 기술은 어떻게 사람을 향할 수 있을까[이한재의 세계 인권 현장](9)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번화가 골목에서는 “캄비오(환전)”를 외치는 환전상들의 리드미컬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소리는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겪은 사람들이 돈이 생길 때마다 달러로 환전해 돈을 모으기 때문이다.
월급이 이달에는 300만원이었다가 다음 달에는 100만원이 된다고 생각해보라. 심각한 인플레이션 속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일이 일상이다. 2023년 아르헨티나의 연평균 인플레이션율은 211.4%에 달했다. 2001년 말에는 정부가 뱅크런을 막겠다며 전 국민의 예금을 묶어놓고 주당 250페소 이상 인출을 금지한, 이른바 ‘코랄리토(corralito)’ 사태가 벌어졌다. 아르헨티나에서 나고 자란 금융 전문가인 안토넬라 페로네(Antonella Perrone)는 “이 일 때문에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여전히 은행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돈이 생길 때마다 환전한다면 불편하지만, 달러가 잘 유통된다면 시민들의 삶은 별문제가 없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다. 자국 화폐로 된 금융 서비스를 믿을 수 없다면, 예금을 못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자 금융이나 신용카드, 온라인 인증과 결제와 같은 현대인에게 필수적인 다양한 서비스를 모두 이용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지금 전 세계에 광범위한 ‘금융소외계층’이 대규모로 존재하는 주요한 이유다. 사람들이 금융 시스템 밖으로 밀려나는 것은 이제 인터넷이나 인프라 부족, 극심한 빈곤 때문이라기보다 국가 경제 체제의 불안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더 많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였고, 지금도 비교적 안정된 국가로 평가받는 아르헨티나의 대도시 중산층 시민들이 금융소외계층이 된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각종 금융 서비스에서 배제돼 있다.
투자가 아니라 생존 수단으로서의 ‘코인’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불편을 초래한다. 아르헨티나 도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안토넬라는 10여년 전, 싱가포르로 해외 연수를 갈 기회가 생겼다. “저는 항공권 구매를 위해 신용카드가 있는 사람을 수소문해야 했어요. 결국 언니와 결혼하지도 않은 예비 형부에게 신용카드를 빌려서 해결했어요.” 금융 소외는 단순히 불편한 것을 넘어 현대인의 필수재로 여겨지는 각종 온라인 구매, 넷플릭스 구독은 물론, 이제 필수품처럼 여겨지는 AI 서비스 구독도 불가능하게 한다.

안토넬라는 이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그는 2020년, 블록체인 기술로 금융 격차를 해소하는 스타트업 Xcapit에 합류했다. Xcapit은 가격 변동이 심한 현지 통화나 일반 암호화폐 대신, 가치가 미국 달러에 연동되는 스테이블코인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지갑을 개발했다. 사람들은 정식 은행 계좌 없이도 스마트폰 앱을 통해 안전하게 달러 가치로 돈을 저축하고, 투자하고, 기부할 수 있게 됐으며, 게임처럼 진행되는 금융 교육 콘텐츠도 함께 이용할 수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이러한 기술은 전 세계의 풍경을 바꾸어 놓았다. 안토넬라는 그 최전선에 있었다. “우리가 일을 시작하던 2020년, 라틴 아메리카 인구의 65%가 금융 서비스에서 소외돼 있었고, 전체 거래의 50%가 현금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어요.” 상황은 몇 년 만에 눈에 띄게 달라졌다. 세계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2024년 기준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성인 5명 중 1명은 은행 계좌 없이 모바일 머니만으로 공식 금융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으며, 케냐에는 성인의 82%가 모바일 머니 계정을 가지고 있다. 이제 남미, 아프리카의 인터넷도 찾기 힘든 지역 시민들도 모바일 지갑을 사용하는 모습이 흔하다.
기술로 원조 경제의 판도를 바꾸다
이 기술은 인도주의 영역의 판도도 바꿔놓았다. 유니세프(UNICEF)와 같은 대형 구호 단체는 매년 수억달러를 모금하고, 이것을 필요한 곳에 보내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국제 송금과 환전에만 상당한 수수료가 발생하고, 현지 은행을 거치면 시간과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위기 지역에 급하게 직접 현금 지원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일이 더 복잡해진다. “마지막에는 누군가 현금을 직접 들고 위기 지역에서 집마다 전달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이 과정에는 도난과 강도의 위험도 따르고요, 중복 지급이나 누락되는 실수도 흔하죠. 전달한다고 끝이 아닙니다. 현장 직원들은 이 과정 전체를 보고하기 위해서 엄청난 서류 작업에 시달립니다.” Xcapit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 위에서 출발했다. 안토넬라의 팀은 유니세프 이노베이션(UNICEF Innovation)의 투자와 멘토링을 받으며 구시대적인 현금 원조 절차를 혁신하는 오픈 소스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위기 지역에서 작동하려면 시스템은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는 사람이 쓸 수 있을 만큼 쉬워야 했다. 안토넬라는 이 시스템 개발의 핵심 목표가 아무런 교육이 필요 없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며, “시스템을 사용하기 위해 튜토리얼이 잔뜩 필요하다면 사용자 탓이 아니라 개발자 탓입니다”라고 강조한다. Xcapit은 블록체인 인프라를 백그라운드에 두고, 최종 사용자는 오직 SMS 문자메시지만으로 바로 모바일 머니로 전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고안해냈다.
Xcapit이 개발한 이 시스템은 페루 쿠스코의 한 마을에서 처음 선을 보였다. 인터넷도 닿지 않는 안데스 산간마을이었다. 첫 시도부터 시스템은 성공적이었다. 사람들은 문자메시지 한 줄로 돈을 받고, 시장에 가서 쓸 수 있었다. 이후 케냐에서는 본격적인 인도주의 원조 현장에 같은 시스템이 배포됐다. 엄청난 비용과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과정 전체가 클릭 몇 번 만에 가능해졌다. 모든 원조 흐름은 실시간으로 투명하게 추적됐다. 가족 구성원 개인에게 개별적으로 원조가 전달되면서 여성의 경제적 권한을 강화하는 효과까지 있었다. 안토넬라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배제된 사람을 기준으로 설계할 때, 비로소 모두를 위한 최고의 시스템이 됩니다.”
모두를 위한 금융, 한국을 위한 질문
‘금융 소외’는 먼 나라의 일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에도 금융 시스템이 닿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스마트폰 본인 인증이 불가능하면, 정해진 주거지가 없으면, 외국인이라면, 한국에서도 금융 서비스에서 소외되기 쉽다. 점점 모든 서비스가 스마트폰 앱에 집중되면서 노인, 장애인들에게도 금융 서비스의 문턱이 높아지고 있다. 이들에게 한국은 오히려 세계 그 어느 곳보다 금융 서비스에 접근하기 어려운 나라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 블록체인이라는 신기술은 주로 투기나 투자의 대상으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안토넬라가 쿠스코 산속에서 한 고민, 지금 케냐의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우리가 보지 못한 이 기술의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기술을 활용해 어떻게 우리 삶을 더 낫게 할 것인지에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이한재 변호사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윤어게인 범죄자냐’ 이진숙, ‘관저 지킨’ 이용, ‘계엄은 대통령 권한’ 김태규···‘찐윤
- “윤석열판 하나회의 재집결이 시작됐다”···민주, ‘찐윤들’ 대거 공천한 국민의힘 비판
- 부산 북갑 최대변수는 보수후보 단일화···하정우 30%·박민식 25%·한동훈 24%
- 마라톤 ‘마의 2시간’ 깬 사웨…“1시간 58분도 시간문제다”
- [구정은의 수상한 GPS](29) 중국 반발, 필리핀 환영, 인도 기대…일본 무기 수출 허용에 ‘3국 3색’
- [박성진의 국방 B컷](56) 정권 입맛대로 ‘고무줄’…수시로 바뀌는 북한군 창건일
- 왕사남 OTT 버전 ‘어색한 호랑이’ CG 수정···“극장용 한정판 됐다”
- [이한재의 세계 인권 현장](9) 아르헨티나서 온 질문, 기술은 어떻게 사람을 향할 수 있을까
- 전재수 박형준 격차 다시 커지나···코리아리서치·MBC 조사, 전재수 48% VS 박형준 34%
- [오늘을 생각한다] ‘AI가 못 하는 일’이라는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