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이 눈물 뚝뚝…번아웃 탈출하려 700일간 유라시아로 떠난 여인 [여책저책]

장주영 매경 디지털뉴스룸 기자(semiangel@mk.co.kr) 2026. 5. 1.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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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삶이 힘들 때 우리는 여행을 떠올리고는 합니다. 하지만 여책저책이 만난 책 속 저자는 여행을 도피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아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나도르 가는 길 / 사진 = 호밀밭
‘하드보일드 트립’의 저자 김귀선은 번아웃 끝에 유라시아 대륙을 700일간 떠돌았습니다. 그는 일상의 균열에서 출발해 낯선 길 위에서 외부의 풍경이 아닌 자기 내면을 바라봤습니다. 빠르게 소비하는 관광 대신 느리고 깊게 걸으며 얻은 것, 그것은 새로운 지식이 아닌 이미 내 안에 있던 삶의 지혜였습니다. 여책저책은 저자의 여정을 통해 자신을 만나는 과정을 살펴봅니다.
하드보일드 트립
김귀선 | 호밀밭
사진 = 호밀밭
​여행 준비를 할 때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계획형과 즉흥형이 그것. mbti로 따지면 계획형은 J, 즉흥형은 p로 본다. 계획형은 출발하기 전에 대부분의 계획을 마친다. 반면 즉흥형은 실시간으로 결정을 내린다. 어느 성향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대신 각 성향 별로 교과서급 여행자의 여행을 관전하다 보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 마디로 극P의 여행자가 있다. 익숙하든 낯설든 상관없이 오늘의 잠자리와 내일의 교통편 등 여정에 필요한 모든 것의 결정을 매일 내린다. 이렇다 보니 다음 국경은 어디일지,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할지 등이 매우 험난하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길은 험하고, 날씨는 요지경이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 위험을 겪고 또 겪어도 그는 계속 간다.

바이칼의 칼바람 / 사진 = 호밀밭
​책 ‘하드보일드 트립’의 저자 김귀선의 여행이 그렇다. 무심하고 불합리한 세계를 맨몸으로 통과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이해하려 애쓰는 먼지투성이 여행을 책으로 담아냈다. 차갑고도 단단하다는 뜻의 ‘하드보일드(Hard-boiled)’라는 수식어를 내걸고 700일간의 여행 이야기를 쌓았다.

자자는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부와 경희대학교 한약학과를 거쳐 다국적 제약회사에서 5년 간 근무하다 어느 날 이유 없는 눈물이 흐르는 자신을 마주했다. 번아웃이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인생이 시시하게 저물어갈지도 모른다는 공포마저 느꼈다.

저자는 결국 사표를 던지고 유라시아 대륙 횡단을 선택했다. 책은 그가 낯선 도시 사이를 유랑하며 매일 내려야 했던 수많은 결정과 그 과정에서 체득한 자기 신뢰의 근거를 담담하게 서술한다.

길바닥 인생을 웃게 한 완벽한 아침식사 / 사진 = 호밀밭
저자의 여정은 순탄과는 거리가 멀다. 바이칼 호수의 매서운 한기 속에서 전 재산이 든 지갑을 분실하고, 튀르키예의 들판에서는 굶주린 들개 무리의 공격을 받았다. 고속도로 한복판에 방치되는 공포 속에서도 저자는 흔들리는 자신을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위험과 불합리 앞에서 어떻게 버티고 통과했는지를 과장 없이 기록하며, ‘버틴다’는 행위가 세계와의 싸움이 아니라 결국 자기 안의 두려움과 마주하는 일이라고 역설한다.

괴팍한 시베리아 횡단 열차 승무원과의 오해를 풀어나가는 과정이나 히치하이킹을 하며 만난 낯선 이들의 호의는 타국에 대한 편견을 깨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투명하게 바라보게 하는 거울이 된다.

파보나치 수열처럼 돌고 돌아 커지는 친절 / 사진 = 호밀밭
저자는 “여자 혼자 여행하는 것이 위험하지 않으냐”는 진부한 질문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곳은 누구에게나 위험하며, 이불 밖은 원래 위험하다”는 명쾌한 답변을 내놓는다.

위험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험을 다루는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는 것, 그것이 바로 그가 길 위에서 배운 생존의 요령이자 삶을 직시하는 태도다. 인터라켄의 강가 벤치에서 배낭을 베개 삼아 잠을 청하고, 빨간 스포츠카의 히치하이킹 행운에 기뻐하는 게 그의 여행이다.

책은 유라시아의 어느 화려한 도시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여행자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다. 그가 길바닥을 떠돌며 얻은 것은 새로운 지식이 아니다. 내 안에 이미 깃들어 있던 지혜를 알아보는 ‘눈’과 ‘마음’이다.

바이칼의 바람과 기도 / 사진 = 호밀밭
여행을 통해 삶을 벗어나려 했던 한 사람은 700일의 방랑 끝에 비로소 삶을 더 정확하게 살아내기 위한 단단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하드보일드 트립’은 여행의 기록을 넘어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는 자기 기준을 만들어가는 한 개인의 치열한 삶의 기록이다. 고단한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나 자신만의 변곡점이 필요한 이들에게 책은 씩씩한 용기 한 줌을 건넬 것이다.
※ ‘여책저책’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세상의 모든 ‘여행 책’을 한데 모아 소개하자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문적인 출판사도 좋고, 개별 여행자의 책도 환영합니다. 여행 가이드북부터 여행 에세이나 포토북까지 어느 주제도 상관없습니다. 여행을 주제로 한 책을 알리고 싶다면 ‘여책저책’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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