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고도 힐링걷기 17.74km…말과 글이 불필요한 풍광 [달마가 해남으로 간 까닭은? 르포]


깨달음은 없었다. 깨달을 필요가 없어졌다. '달마가 해남으로 간 까닭'이 궁금해 달마산에 왔지만, 헉헉거리며 도솔암에 올라서자 물음표가 사라졌다. 노을이 지는 한 순간에 심장이 푹 찔리고 말았다.
풍경에 가슴이 관통 당한 적 있는가. 머리카락이 광란의 춤을 추는 바람, 겨울 내내 숨겨온 짝사랑을 울컥 토해 내는 진달래의 분홍 고백, 노을빛에 신화처럼 현실감 없이 더 화려해진 바위능선, 한 시간 넘게 좁은 숲길을 걸어온 이가 갑자기 받아들이기엔 벅찼다. 사람의 감각이 받아들이기엔, 지나치게 황홀한 세상이 있었다. 모든 것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이었다.

극도로 서정적인 산과 바다가 노을의 지휘 아래 환상교향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인생 노을'을 만났다. 달마가 해남으로 간 까닭을, 깨닫고 깨닫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달마산에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다.

3월 28일 달마산을 찾았다. 매년 해남 달마산에서 열리는 '달마고도 힐링걷기 축제'를 취재코자 왔다. 엄홍길 대장을 필두로 전국에서 온 걷기 마니아들이 17.74km를 종일 걸었다. 산행 같은 둘레길은 오랜만이었다. 3부 능선에서 8부 능선까지 오르내리는 흙길. 임도와 찻길이 드문 진짜 산길이었다. 포클레인과 기계의 도움 없이 옛길을 삽과 곡괭이로 다듬어 만든 '수제 걷기길'이란 말이 실감났다.
해남의 산은 경이로웠다. 능선에서 만날 수 있는 나무는 단조로운데 이곳은 자연 수목원이라 해도 좋을 만큼 다양한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온갖 새 소리와 야생의 풍경은 살아 있는 생태계의 단면을 엿보는 듯했다. 아쉽게도 완주하지 못했다. 취재로 시간이 지체되었고, 일행의 컨디션 난조로 마지막 구간은 포기해야 했다. 달마고도 해설가는 마지막 4코스가 하이라이트라고 했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달마산이 궁금했다. 불교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 대사는 어떻게 땅끝 해남의 산 이름으로 남았을까. 중국 소림사에서 벽을 보고 9년간 명상 수련한 끝에 깨달음을 얻어 참선 수련을 전파하고 해남으로 건너와 이 산에 살았다는 설화가 실화일 가능성은 없을까. 생각은 돌고 돌아 '달마가 해남으로 간 까닭은?'에 이르렀다.
선종은 말과 글의 가르침이 아닌 고요히 앉아 마음을 들여다보고 번뇌와 망상에 가려진 본성을 자각하는 것인데, 그런 깨달음에 이른 달마가 왜 이 산에 왔을까? 지금 달마산은 진달래가 피었을까? 벚꽃이 피었을까? 상수리나무 신록이 돋았을까 하는 세상살이에 하등 도움 안 되는 것이 궁금했다. 해남 여행 참가자를 SNS로 모집해, 김익준·조민정씨와 다시 달마산을 찾았다.

벚꽃이 절정인 미황사에서 도솔암까지 하이라이트 구간 걷기에 나섰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바람이라도 불면 멜로드라마의 한 장면이 스쳐갔다. 미황사 대웅전까지 오르자 능선 암릉 줄기가 뼈대 깊은 가문의 문양처럼 솟아 파란만장한 세월을 안으로 삼킨 침묵의 내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숲길로 접어들자, 산은 품속에 숨겨둔 생태의 보물을 하나씩 꺼내 놓았다. 능선의 거친 암릉과는 딴판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광나무, 편백나무, 붉가시나무가 짙은 초록의 외투를 입고 객을 맞이하고, 그 사이로 서어나무, 졸참나무, 때죽나무가 골 깊은 생명력을 뿜어낸다.

해남 달마산의 '무언가無言歌'
편백나무와 삼나무의 꼿꼿한 기개와 벚나무, 굴참나무, 자귀나무의 유연함이 공존하는 이 길은 거대한 자연 박물관이다. 사람주나무의 매끄러운 수피를 스치고 동백나무 그늘을 지나노라면, 상수리나무의 신록이 눈을 씻어 준다. 발밑에는 남산제비꽃이 고개를 내밀고, 미처 떠나지 못한 동백꽃이 붉은 피처럼 뚝뚝 떨어져 낙화의 비장미를 더한다.

덜꿩나무, 팥배나무, 쇠물푸레나무, 비목나무… 이름만으로도 벅찬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숲은 후박나무와 예덕나무, 소태나무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식생을 이뤘다. 간간이 터지는 너덜겅 너머로 푸른 바다의 윤슬이 살아 숨쉬고, 바위 틈바구니마다 곡예하듯 피어난 진달래는 무채색 바위산에 분홍색 눈물자국을 새겨 넣는다.
잊혀진 사원 같은 정갈한 삼나무 숲을 지나 도솔암 방향으로 치고 오른다. 심장을 삼킬 듯 바싹 선 오르막이 덮쳐온다. 느리지만 멈추지 않으면 닿는 달마의 경지. 비로소 도솔암이다. 용의 이빨 같은 바위 사이에 자리를 잡은 신비한 암자에 서자, 지는 해가 조명처럼 빛난다.

수평선에 걸린 해는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지금껏 보았던 많은 나무와 꽃이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길 무렵, 하늘은 비로소 마지막 잔치를 시작한다. 오늘 처음 오른 능선은 날카로운 바위와 첫사랑 고백 같은 진달래가 섞여 황홀한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듯하다.
다시 물어본다. 달마가 해남까지 온 까닭은 무엇일까. 소림사의 굴법당에서 9년간 면벽 수행하며 얻은 깨달음의 끝에, 그는 어쩌면 이 비경을 미리 보았던 것은 아닐까. 억겁의 세월이 빚어낸 바위 능선과 그 아래를 지키는 울창한 숲, 그리고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이곳이야말로 번잡한 말과 글이 필요 없는 '불국토佛國土'는 아니었을까.


분홍 소용돌이가 온 산을 휘감고, 바위는 신화 속의 황금 성벽으로 변한다. 이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 달마가 해남에 온 까닭은 더 이상 수수께끼가 아니다. 자연은 이미 말과 글이 필요 없는 경지에 닿아 있었다. 지금 여기 있는 것으로 족했다. 깨달음이란 결국 내 안의 번뇌를 씻고 이 장엄한 대자연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찰나의 경험임을, 저물어가는 노을이 지독하게 아름다운 필체로 써 내려가고 있었다.

걷기 길잡이
▣ 달마고도 둘레길(18km)은 산꾼들도 최소 5시간이 걸리고, 일반인은 8시간을 잡아야 한다.
▣ 미황사에 넓은 주차장이 있고, 완주 시 원점회귀 가능하다.
▣ 대부분 산길이다. 뙤약볕 도로를 이은 억지스런 걷기길이 아닌 자연미 있는 산길을 원한다면 하루 종일 즐길 수 있다.
▣ 긴 원점회귀 코스라 트레일러너에게도 추천할 만하다.
▣ 길이 선명하고 이정표가 있어 길찾기 어렵지 않다.
▣ 차량 통행 가능한 탈출로는 미황사와 도솔암 진입 도로가 유일하다.
▣ 하이라이트만 걷고 싶다면 미황사에서 도솔암으로 이어진 5km가 알맞다. 송지땅끝택시(061-533-2055)를 호출하면 도솔암 입구의 주차장까지 온다.
▣ 삼나무 숲에서 도솔암으로 오르는 직등길과 달마고도 둘레길로 나뉜다. 도솔암에 올랐다가 도로를 따라 달마고도에 합류 가능하다.
▣ 도솔암은 달마산의 명소이자 해남 최고 명소로 꼽아도 손색없는 조망명소이다. 도솔암에서 입구 주차장까지 이어진 산길에도 전망바위가 여럿 있다.
▣ 달마고도에서 도솔암까지 오르는 산길은 300m로 짧지만 가파르다.
▣ 미황사에서 도솔암 주차장까지 5km, 2시간 정도 걸린다. 등산에 가까운 산길이라 너무 쉽게 생각하면 힘들 수 있다.
▣ 달마고도 둘레길을 완주하고자 한다면 중등산화와 스틱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거리가 길어 피로도가 적지 않다.
▣ 만약을 위해 헤드랜턴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도솔암에서 도솔암 주차장까지 700m 거리, 10분 걸린다.
교통
해남읍내 버스터미널에서 미황사행 버스가 하루 4회 운행한다.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택시는 30km 거리, 요금 4만 원 정도 나온다. 미황사에 세워둔 차량을 도솔암 방면에서 회수할 경우 송지땅끝택시(061-533-2055)를 불러야 한다. 미황사 인근의 유일한 택시회사라 배차가 비교적 빠르다.
대중교통으로 도솔암에서 해남읍내로 가는 것은 쉽지 않다. 도솔암 주차장에서 5km 걸어 마련정류장까지 와서, 하루 한 번 운행하는 버스(해남읍내에서 06시 출발)를 타고 송지면사무소 소재지 산정정류소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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