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장사’ 언론을 비판하는 동시에 [정준희의 ‘미디어 레퀴엠’]

‘사려 깊은 저널리즘(considerate journalism)’이란 용어가 있다. 언론학계에서 통용되거나 확립된 개념은 아니다. 탐사 저널리즘이나 데이터 저널리즘처럼 특정 장르의 저널리즘이라기보다는 개별 저널리스트가 저널리즘을 수행하는 태도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자세에 연관된 용어 정도로 이해하면 좋다. 자살이나 폭력과 같은 민감한 이슈를 다룰 때 피해자는 물론 관련된 이들과 독자들까지 고려하면서 공감력과 윤리적 책임감을 지닌 저널리즘을 수행해야 한다는 주문 같은 곳에서 종종 등장하는 표현이다. 속보보다는 정확성, 사실의 조각이 아닌 총체적 진실, 사건의 맥락과 그에 관련된 정보가 수용되는 맥락을 중시하는 보도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딱히 부정할 이유 하나 없이 참 바람직한 저널리즘이지만, 지금 같은 시대에는 공자님 말씀으로라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저널리즘이라는 게 입맛을 몹시도 씁쓸하게 만든다.
이물질이 들어간 코로나 백신이 접종되었다며, ‘단독’을 단 보도가 출현하는 것을 보자마자 단박에 떠올린 단어이기도 하다. ‘참 생각이 없구나’ 싶었다. 백신에 대한 이런 처참한 인식을 갖고 또 유포한 채로 반드시 찾아올 다음 번 팬데믹에 대처할 수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극적이면서 정의감에 호소하기도 좋고, 은폐된 진실에 빛을 쪼이는 행세를 하기에도 적당하며, 권력 감시와 비판이라는 미명하에 정파적으로 논란을 확산시키기에 맞춤한 이 아이템을 놓치고 싶은 자 누가 있으랴. 조금이라도 먼저 알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단독’을 달아 내보냈을 테고, 다소 늦었다 해도 정치권 반응, 전문가 의견, 시민 우려 등등을 붙여 사실상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매우 먹음직스러운 뉴스였음에 분명하다. 독상을 차려 먹지는 못했을지언정, 이렇게 저렇게 숟가락을 얹어도 아무런 탈도 나지 않고, 먹을 것이 좀처럼 줄어들지도 않을 이런 뉴스, 아무 때나 나오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서 유난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유일하게) 빛나는 보도가 있었다. 〈시사IN〉 제966호에 실린 김연희 기자의 기사 ‘‘이물질 코로나 백신’의 진실을 찾아서’다. 사려 깊은 저널리즘이 과학과 의료 분야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 좋은 기사였다. 바로 그다음 호수인 〈시사IN〉 제967호에는 ‘사실을 썼지만 진실은 아닌 백신 기사들’이라는 제목으로 기존 기사의 문제점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까지 정확히 짚었다. 출입처에 기반을 두어 그곳이 제공한 단편적인 정보 전달에만 신경을 쓸 뿐, 왜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한지 나아가 그런 ‘사실’ 조각이 오히려 ‘진실’을 흐리는 데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보여줬다.

이 칼럼이 실리는 매체가 〈시사IN〉인지라, 독자위원회의 옴부즈맨 칼럼도 아니고, 나쁘게 보면 자화자찬하는 것처럼 비칠까 싶어 잠시 머뭇거리기는 했다. 하지만 필자는 엄연히 ‘외부 기고자’이고, 〈시사IN〉 편집부에 아첨할 이유도 개인적으로는 없다. 오히려 매달 이맘때면 늘 늦기만 하는 원고에 벅차 이제나저제나 필진에서 빠질 구실만 찾다가 어찌어찌 원고를 보내고 나서는 제풀에 지쳐 잊어먹기만 하는, 비루먹은 서생에 불과하다. 게다가 내가 아는 한 〈시사IN〉 편집국장은 만약에 하고자 한다면 자사의 기사를 엄정히 비평해주길 바라지 어설픈 칭찬으로 자사 기자들의 콧대만 높여주길 바라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사이다 저널리즘’의 탄생
한 달 남짓한 기간을 두고 김연희 기자가 시작해서 이어 쓴 일련의 기사들은 앞에서도 ‘유난히’ 뒤에 ‘유일하게’를 첨언했듯,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이물질 백신 기사의 엉망진창 홍수 속에서 사실상 오직 한 병에 담겨 둥둥 떠오른 생수 같은 느낌이었다. 이에 대해 일부러 언급을 피한다는 건 저널리즘의 안과 밖에 걸쳐 미디어 비평을 업으로 하는 이로서는 도리어 비겁하고도 부당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먹을 물 한 컵을 찾기 어려워 오물을 피해 바닷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는 게 일상이 된 시대다. 오물을 마시지 않았으니 당장 독성에 병들지는 않을지 모르겠지만, 짠물의 뒤에는 더 강렬한 갈증이 찾아오는 법이다. 그래서 또 ‘단짠단짠’의 마법이 등장한다. 그것이 물리면 자극의 종류와 방향이 바뀐다. 오물 저널리즘의 다른 한편에 맵고 짜고 시고 단 저널리즘이 자리 잡았다. 기성 언론이 혐오해 마지않는 신생 언론 혹은 대안을 지향하는 매체들의 ‘사이다 저널리즘’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러나 사이다는 쾌감을 안겨줄 뿐 궁극적으로 몸이 요구하는 수분을 공급해주지 못한다. 맛에 호소하기보다 필요에 부응하려는 담백한 물로서의 사려 깊은 저널리즘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음에도,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생존하기 어렵다.

세상을 뒤흔드는 어처구니없는 전쟁, 이미 현실이 된 기후위기, 온갖 혐오가 진창으로 섞이는 곳에서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에게 아무런 긍정적 영향을 주지 못하는 제도적 사회화의 공간, 인류의 존재 의의와 재생산의 토대 자체를 디지털 부호 중 한쪽인 0으로 수렴시키는 인공지능 진화의 뚜렷한 궤적. 이런 절체절명의 현실 앞에서도 일말의 ‘사려 능력’조차 갖추지 못한 저널리즘과 미디어 환경이 펼쳐지고 있다. 그런 부정적 미래는 시한을 두고 다가오는데, 이런 부정적 현재의 경계면은 무한대로 확장된다. ‘돈 룩 업(Don’t Look Up)’의 세상은 넷플릭스 속에만 있지 않고, 별안간 나타난 외계 소행성으로부터만 유발되지 않는다. 이미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면서 조만간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다(이 칼럼의 표제가 레퀴엠, 즉 장송곡인 이유도 그것이다). 영화처럼 차라리 한 방에 모두가 같이 죽으면 그나마 낫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서로의 인간성을 파괴해가며 길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양이 될 테다. 그 책임을 현재의 저널리즘에만 물을 수는 없지만, 현재의 저널리즘에 아주 많은 것을 묻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무런 대안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그저 ‘공포 장사(scare-mongering)’에만 열을 올리는 담론에 올라타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미래는 말 그대로 아직 오지 않은 열린 가능성의 영역에 있지만, 과거와 현재의 연장선이 그래프로 그려지는 일종의 함수이기도 하다. 태평양 한가운데의 해저화산 지대에서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나면 수면에 큰 파문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파문은 점점 더 크기와 속도를 키운 쓰나미가 되어 태평양 연안을 덮친다. 현재의 파문은 단지 시간적으로 지연되어 있을 뿐인 쓰나미다. 이럴 때엔 미래가 열려 있는 게 아니라 닫혀 있으며, 이미 현재에 그것을 보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단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냥 이대로 계속 둔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본디 미래는 현재에 의해 부단히 개입된 결과물로 온다.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한다면 지금과는 다른 현재를 이 함수에 투입시켜야 한다. 사려 깊은 저널리즘이 그중 하나다.
물론 사려 깊은 저널리즘으로서 부분적으로 표상되는, 결국 ‘지금과는 다른 저널리즘’ 속에는 언론사나 그 속에 종사하는 기자만 있는 게 아니다. 정보원이든 광고주든 저널리즘을 먹여 살리고 있는 국가기구, 정치권, 기업, 학문 세계, 전문가 집단을 빼놓을 수 없다. 그렇게 생산되는 뉴스와 의견을 보고 듣고 옮기고 반응하는 (무엇보다 요즘에는 조회수와 댓글을 통해, 샌드백이 된 언론에 피드백을 안기는) 수용자와 시민사회도 이해당사자로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사려 깊은 저널리즘의 필요와 성패를 규정하는 중요한 변수 가운데 하나로 수용자들의 ‘주의 깊음(attentiveness: 친절함 혹은 정중함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을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이유다.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의 김영욱 교수가 얼마 전 출간한 〈주목 불복종〉이 절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정말로 필요한 물을 공급해주는 ‘사려 깊은’ 저널리즘이 정착할 수 있으려면, ‘주의 깊은’ 수용자가 반드시 요구된다. 그것도 되도록 다수를 형성해야 한다.
파국이 명확한 미래를 바꾸려면
눈이 있는 자라면 보지 못할 수 없고 뇌가 있는 자라면 모를 리 없는 이 명명백백한 진실이 현재 안에 투입되지 못하고, 혹여 투입되더라도 미래를 바꿀 만큼의 힘을 지니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 요컨대 우리가 계속해서 패배하는 듯한 무력감은 근원에 습관이라는 것이 있다. 인간은 결국 습관의 총체이며, 사회는 그런 습관을 만들고, 그 습관의 최종적 총체로서 구성되는 무언가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스스로 습관을 형성하지 못하며 오히려 습관의 무력한 흡수자로서만 살아간다. 나에게 필요한 물건을 직접 만들지는 못할지라도 내가 스스로 찾아 나서는 습관을 버리고, 당일배송과 새벽배송의 달콤함에 물들어버린 우리가, 시종일관 우리를 조롱하는 쿠팡을 버리지 못한 채 언제든 다시 돌아가려는 그 무서운 습관의 힘이 그것이다. 미디어는 전형적으로 습관 속에 위치하며, 저널리즘 역시 생산자와 수용자들의 (전체적으로 보면 명확히) 날로 나빠지는 습관 속에서 날로 나빠지는 그래프를 타고 있다.

본래 저널리즘과는 영 다른 어원에 실은 원발음조차 꽤 다른 단어인 ‘알고리즘(algorithm)’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거의 모든 습관이 알고리즘에 의해 조직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 나빠지고 있는 현재의 저널리즘 관습과 그걸 더 나빠지게 몰아가는 우리의 습관이 이 모양에 이 속도를 띠게 된 것은 확실히 알고리즘 탓이다.
저널리즘을 포함하는 미디어 일반의 제작과 수용의 관습 역시 알고리즘이 지배한다. 음식이나 물건을 주문하고 배달하는 습관도 알고리즘이 장악했다. 그리고 그런 알고리즘을 다시 장악한 것은 거대 초국적 기업 몇 군데다. 거의 모든 나쁨과 열화의 원인이 이 알고리즘에 있음을 모르지 않음에도, 그 알고리즘에 개입하여 현재의 진로를 바꾸고 정해진 파국의 미래를 조금이라도 덜 파국적인 방향으로 틀어보려는 게 아직까지는 제대로 시도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영화 〈돈 룩 업〉의 대표적 빌런이 알고리즘을 만지는 IT 기업 총수라는 설정이 지극히 현실적인 까닭이기도 하다.
우리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전제하지 않는 국제질서를 상상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미국이 그 자리에 저렇게 버티는 한 앞으로의 국제질서에는 ‘질서’라는 단어 자체를 붙이기조차 민망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음을 여실히 목격 중이다. 광기 어린 미국의, 더 광기 어린 수장을 교체한다고 해서 미국이 대단히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 ‘~어게인’으로 늘 되돌아올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미국 아닌 나라들이 합심해서 미국을 제거할 수는 없다 해도, 미국을 전제하지 않은 국제질서를 상상하고 실천하는 길 외에 다른 답은 없다. 마찬가지로 알고리즘이 전제되지 않은 우리의 생활과 경제 그리고 그에 연계된 사회를 상상하고 실천하지 않고는 파국이 명확한 미래를 바꿀 수 없다. 사려 깊은 저널리즘을 위한 주의 깊은 시민들이 모여서 이뤄야 하는 ‘사려 깊은 주목’이 향할 곳은 바로 그곳이다.
정준희 (미디어 인문학교 해시칼리지 원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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