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계엄군 성폭행을 오보로 단정한 건 사과한다, 다만…” [안녕 진화위㉗]
‘5·18 폄훼 논란’ 이동욱 3기 진실화해위원 후보자와의 대화

‘안녕’은 작별이자 환영의 인사다.
5년간 과거사 조사기구로 활동해온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또는 진화위)가 지난해 11월26일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2월26일 제3기 진실화해위가 출범했다. 2기를 돌아보고 3기를 바라보며 시작된 ‘안녕 진화위’는 그동안 조명되지 못한 얼굴과 목소리를 찾아 나서는 부정기 연재물이다. 과거사 조사와 규명에 진심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와 함께 3기 여정의 의지와 기대를 담는다. 굿바이 진화위! 헬로 진화위!!
“이동욱 위원으로부터 조사의 공정성과 객관성에 관한 많은 조언을 받았다. 국민의힘 추천 위원 중에서 가장 합리적이었다.”(허연식 전 5·18조사위 조사2과장)
두 가지 평가 사이에서 헷갈렸다. 국민의힘이 3기 진실화해위 비상임위원 후보로 추천해 4월23일 국회 본회의에서 선출안이 통과된 뒤 대통령 임명을 기다리는 이동욱(66) 전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5·18조사위) 위원을 둘러싼 이야기다. 그가 5·18의 역사적 진실을 폄훼했다는 비판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뿐 아니라 국가폭력피해범국민연대 등 과거사 단체에서도 나왔다. 결격사유가 명백하니 진실화해위원 추천을 철회하라는 주장이었다. 반면 이 후보자가 비상임위원으로 일한 5·18조사위에서 조사과장을 지낸 허연식 5·18민주화운동교육관 관장은 한겨레에 “보수 진영의 한계를 온전히 뛰어넘진 못했으나 합리적인 분이다. 행방불명자 인정 등 사실관계 규명에서 조언을 많이 받았다”며 긍정적으로 평했다. 무엇이 더 사실에 부합할까. 28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이 후보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이동욱 후보자는 ‘월간조선’ 기자 출신이다. 1994년부터 이 매체에서 자유기고가로 글을 쓰기 시작해 1996~2000년 기자로 일했다. 2001년부터는 한국갤럽조사연구소 전문위원, 선거 컨설턴트, 정치평론가 등 이력을 쌓았는데, 이후 5·18조사위 비상임위원으로 임명돼 활동한 기간은 2019~2024년이다. 2023년 10월부터는 윤석열 전 대통령에 의해 한국방송(KBS) 보궐이사로 임명돼 현직에 있다.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2019년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5·18조사위원 임명이 한 차례 거부됐고, 2020년엔KBS 이사 추천이 거론됐으나 다수 방송통신위원회(현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위원들의 반대로 거부당했다. 그를 오랜 기간 따라다닌 ‘5·18 폄훼’의 꼬리표 때문이었다.

업보는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월간조선 1996년 4월호에 당시 부장(편집장)이었던 조갑제씨 지시로 쓴 ‘광주사태 관련 10대 오보·과장’은 현재까지도 널리 회자된다. 이 글을 통해 그는 당시 각 언론이 경쟁적으로 뛰어든 5·18 민주화운동 관련 보도 중 오보와 과장된 내용을 가려내는 작업을 시도했다. 여기에는 ‘(계엄군의)성폭행설 보도’도 포함됐다. 2021년 11월 5·18조사위원으로 전두환씨의 빈소를 찾았을 때 방송사 카메라 앞에서 “(전두환) 덕분에 지금 매 5년마다 권력교체를 투표로 한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 국민에게 민주주의를 많이 돌려주신 분”이라고 말한 일 등도 논란이 됐다.
5·18 민주화운동은 진실화해위 조사 대상에 속하지 않는다. 다만 5·18을 어떻게 보느냐는 진실화해위원에게 역사관을 드러내는 상징적 기준점이 될 수 있다. 2기 김광동·박선영 위원장은 재임 시절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나와 이와 관련한 모호한 답변으로 논란을 불렀다. 김광동 위원장은 5·18 북한 개입설에 관해 “의심해볼 수 있다”는 취지로 말했고, 박선영 위원장은 “사실 여부는 모른다”고 했다.
두 시간의 인터뷰에서 그는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주제는 1980년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넘어 박정희 시대로, 다시 이승만 시대로 이어졌다. 자유주의자와 실증주의자를 자처하는 그의 주장엔 수긍하거나 반박할 지점이 모두 존재했다.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24시간도 모자랄 듯 했다.
30년 전 5·18 계엄군의 성폭행설을 오보·과장보도로 취급한 데 대해선 “부적절했다”고 인정했다. 사과도 했다. ‘북한군 침투설’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했다. 그는 5·18조사위에서 ‘5·18 침투설 조사 티에프(TF)’ 팀장으로서 이 사안을 조사한 당사자다.
하지만 그의 과거 발언에 관한 모든 의구심을 해소하긴 힘들었다. 전두환씨 빈소에서 한 말과 관련해선 “손에 피를 묻힌 채 권력을 잡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고 물러난 것을 높게 평가한 것일 뿐”이라며 맥락을 설명했는데, 다수를 납득시키기엔 어려워 보였다. 이승만에 관해서도 취재담에 곁들여 그가 얼마나 큰 사람이고, 우리네 척도로 잴 수 없는 사람인지를 설명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에게 반감을 살만한 이야기였고, 논란의 여지가 컸다. 그는 진보나 보수로 설명하기 어려워 보였다. 한국방송 이사회에서 같은 이사로 그를 경험한 한 인사의 평이 오히려 적절하게 다가왔다. “극단적이지 않고 의외로 합리적인데, 좀 엉뚱하다.”
인터뷰 중 흥미로운 대목은 월간조선에서 직속 상사로 모셨던 조갑제씨와의 에피소드였다. 그는 1997년 10월부터 조선일보가 대대적인 홍보 속에 시작한 박정희 전기 연재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의 공동필자로 3년여간 조갑제씨와 함께 참여하며 겪은 씁쓸한 뒷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진 어느 계약직 기자의 삶이었다”고 그 시절을 짚었다. 지금으로 치면 ‘열정 페이’였을까. 그는 “인생이 시렸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전임 김광동·박선영 위원장은 5·18민주화운동의 북한 및 북한군 개입설과 관련해 모호하게 답해 논란이 됐다.
“그쪽(보수) 사람들하고는 북한군 침투설’ 이야기를 하면 대화가 안 된다. 난 외톨이지. 그게 우리 사회의 반지성주의다. 오죽하면 전한길 같은 사람이 뜰까. 전한길은 정답을 맞히는 요령을 가르쳐주는 학원 강사였는데, 정치적인 문제가 그렇게 요약될 수 있나.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 5·18조사위에서 ‘북한군 침투설’ 조사 티에프 팀장을 맡았다. 조사위 종합보고서 2권에 해당 조사결과가 나온다.
“그렇다. 종합보고서 2권에 총 14쪽 분량으로 나온다. 첫 페이지 각주에 ‘이종협 상임위원과 차기환 위원은 본 북한군 침투설 티에프 보고서를 종합보고서에 포함시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종협·차기환은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추천을 받은 상임·비상임위원이었다. 정말 국힘 추천 위원 중에서 나만 외톨이가 된 거다. 내가 이거 하면서 4년 반 동안 4차례 고소·고발당했고, 감사원 감사청구까지 두 번 당했다. 내가 북한군 개입설에 대한 허위 검증을 주도했다는 이유다. 여기엔 대부분 북한군 침투설을 주장했던 지만원씨가 얽혀있다. 보수 쪽에서 북한군 개입설을 믿는 이유는 일종의 인지 부조화다. 광주에서 166명이 공식 사망자로 집계된 사건에 대해 북한군을 집어넣지 않고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거다.”
(5·18조사위 종합보고서 2권에 실린 ‘북한군 침투설 조사 티에프’ 조사보고서를 보면, “탈북자 임천용을 필두로 한 정명운과 이주성 그리고 육사 출신의 지만원 등이 중심이 되어 우리 사회에 ‘가짜 뉴스’와 ‘가짜 역사’를 유포시켜 오는 현실을 확인했다”는 내용이 결론으로 나온다. 이 보고서는 탈북자들과 지만원씨가 어떻게 연결돼 “5.18 당시 북한 특수부대 1개 대대가 투입됐다”는 주장을 언론을 통해 퍼뜨리는지를 보여준다. 이 과정에는 한국논단·뉴스한국·티브이조선·스카이데일리 등의 매체와 함께 국정원과 기무사 등 정보기관이 개입됐던 것으로 나온다. 북한군 침투설을 주장한 탈북자 정명운과 기무사에서 질의·응답을 마친 북한 공작원 출신 김동식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거 순 구라.”)

―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사건은 뭐라고 불러야 하나.
“거시적으로 보면 민주화운동이다. 5·18민주화운동이 맞다. 다만 발단-전개-확산되는 과정에선 폭동이다. 폭동 없이 어떻게 저항을 하나. 5·18민주화운동은 고귀한 대가다. 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성장통이었다. 비교정치학적으로 보면 2차세계대전 이후 군부 정치로 근대화를 이룬 후발국들이 민정 이양을 통한 민주화에 실패했는데 우리만 성공했다. 덕분에 지난 12·3 내란 때도 피 흘리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켜낸 거다.”
― 30년 전 월간조선에 썼던 ‘광주사태 관련 10대 오보·과장’은 다시 돌아볼 부분이 있지 않나.
“1996년 김영삼 정부 시절에 5·18특별법 제정과 함께 ‘역사 바로세우기’가 벌어졌다. 1980년 이후 광주사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던 언론들이 보도를 쏟아내다 보니 과장된 이야기가 적잖았다. 당시 월간조선 조갑제 부장이 ‘오보가 너무 많다. 누가 정리해서 쓰자’고 했는데 내가 맡아 쓴 거다. 기사를 다시 보면, 그때도 맞았고 지금도 맞는 부분이 있다. 한편으로 그때는 맞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틀린 부분이 있다. 30년 전엔 조사의 한계가 있었다. 나중에 다시 5·18 조사위에서 들여다볼 수 있었다. 4년 반 동안 조사위원회 사무실(서울 중구 나라키움 저동빌딩)에 매일 나갔다. 비상임위원이지만, 방을 하나 달라고 요구했다. 5·18조사위는 내 노동력을 통해서 연구성과를 확보했고, 나는 나대로 5·18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 그 보도에서 특히 계엄군의 성폭행설을 악의적 소문으로 치부한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는 평가가 있다.
“인정한다. 피해자들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내 좁은 경험과 지식 안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와 유족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리는 마음이다. 자세하게 이야기할 수 없지만, 5·18 당시 광주의 한 지역에서 공수부대원이 여성을 성폭행하고 임신과 입양으로 이어진 사건이 있었다. 자칫하면 2차 가해가 될 수 있어 공개하지 못했다. 40년 지난 기억에 따른 진술과 여러 근거 및 문헌을 취합한 조사결과가 완전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았으나 사실로 인정했다.”
― 조갑제씨와 인연을 빼놓고 본인의 인생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기자 되는 과정은 조갑제 부장이 끌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인연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리랜서로 월간조선에 기사를 쓰다가 1995년 8월부터 계약직 기자가 됐다. 당시 계약직 기자 월급은 일반 기자에 비해 2/3밖에 안 됐다. 하지만 당시 조갑제 부장은 ‘특종 많이 하면 나중에 더 높은 연봉으로 재계약된다’고 했다. 약속은 끝까지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 다른 기자들이 한 달에 1~2개 기사를 쓸 때, 나는 5~6개 썼다. 야근도 가장 많이 했다. 그런데 내가 가장 가난해. 일할수록 가난해.(쓴웃음) 그래서 계약직 노동자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안다. 결국 2001년 1월 월간조선 그만뒀다.”
― 1997년 조선일보가 박정희 전기를 매일 연재할 때 집필에 참여한 것으로 안다.
“조선일보가 1997년 10월20일자부터 연재한 박정희 전기의 제목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였다. 맨 앞에 들어가는 타이틀은 ‘조갑제 기자가 쓰는 연재 전기-근대화 혁명가 박정희의 생애’였고. 보수 진영에게 그 기사는 공적 사업과 다를 바 없었다. 10·26 사태 이후 박정희를 죽일 놈으로 비판하다 재평가를 하는 분기점이었으니까. 내가 취재해서 초고 쓰고 조갑제 부장이 데스크를 보고 넘겼다. 첫날 연재물을 보면 기사 하단에 ‘조갑제, 이동욱’ 두 사람이 공동필자로 나온다. 그런데 다음날 내 이름이 빠졌다. 연재 첫날 조선일보 선배 기자들이 나한테 축하해주면서 ‘앞으로 책으로도 출간될 테니 열심히 하라’고 했는데, 의아했다. 고민고민하다 조갑제 부장 찾아가서 ‘박정희 주변 사람들 다 연로한데 날 어떻게 아냐. 내 이름이 신문에 나가야 앞으로 취재할 수 있지 않겠냐’고 말했더니, 다시 그 다음 날부터 ‘취재 지원 이동욱’으로 넣어줬다. 내가 직접 기사를 썼는데 왜 ‘취재 지원’이라고 축소하나. 부당하다고 생각해, 또 며칠을 고민했다. 그래도 이건 공적인 일이고, 나머지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는 접었다. 나는 공을 선택했다. 박봉을 견뎌내면서 계속했다. 나중에 책이 출간되고 엄청 팔렸지만, 내 이름은 없었다. 인세도 한 푼 없었다. 인생이 참 시리다.”

― 연재 중간에 손을 뗐다던데.
“유신에서 갈렸다. 나는 1969년 3선 개헌 작업과 1972년 유신체제 선포로 이어지는 시기와 관련해 유신의 반인권적인 부분을 언급해야 한다고 했지만, 조갑제 부장은 ‘경제가 발전했으므로 유신도 잘했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1968~1970년으로 가면, 박정희는 기로에 놓인다. 종신 집권으로 갈지, 아니면 김영삼과 김대중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할지. 그런 부분까지 담아야 유신 시대를 넓게 이해할 수 있을 텐데, 그 작업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연재가 유신 시대로 넘어갈 무렵, 월간조선 일에만 전념하라고 통보를 받았다. 그게 2000년 들어서였다.
면밀히 박정희 전기 연재를 읽은 사람들은 유신을 기점으로 문체가 달라졌다고 느낄 것이다. 1997년 10월에 시작한 이 연재물이 2002년까지 가는데, 박근혜가 국회의원이 된 시점이 1998년 봄이다. 내가 취재해보니, 박근혜는 부모에게 인정받으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동생들을 돌봐준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1974년 육영수 여사가 피격되기 전까지 박근혜는 정치수업을 받아본 적도 없다. 대중에겐 공주 이미지만 있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이 됐을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나오는 유신 미화가 엄청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유신 시절의 인권침해와 희생에 대해서는 전혀 기술이 없다. 그게 오늘날 보수의 한계다. 한국 보수는 유신의 또 다른 면을 보는 눈을 잃었다.”
― 월간조선에서 나왔지만, 이후 다시 조갑제닷컴과 인연을 맺지 않았나.
“다시 한동안 조갑제씨와 ‘동행’을 했다. 2008년 광우병 사태 났을 때 조갑제씨가 몰매 맞고 있더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 역시 다른 곳으로 갈 데가 없었다. 그러다 2015년 조갑제닷컴에서 세월호 참사 원인 규명을 시도한 ‘연속변침’이라는 책을 쓴 뒤 헤어졌다. 그분은 ‘안보 상업주의’에 충실했던 분이다. 조선일보 안에서는 ‘안보 상업주의’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썼다. 애국운동하면서 돈도 벌어야 한다는 건데, 문제는 돈과 애국이 상충할 때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나는 애국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돈은 벌지 못했지만.”

― 조갑제씨는 ‘윤어게인 세력’과 선을 긋고 12·3 계엄이 내란이라고 비판했다. 덕분에 인기도 얻고 있다.
“계산이 빠른 사람이다. 기자 조갑제는 1970년대에 날카로운 기사를 쓰다가 1980년대 접어들어 새로운 강자를 확인하게 된다. 그게 제5공화국이다. 그때부터 체제 내로 들어왔다. 극우가 된 거다. 난 그에게서 지식과 지성의 차이를 본다. 지식은 얇아서 뒤집어지지만, 지성은 깊고 입체적이라 안 뒤집어진다. 그는 쉽게 뒤집어진다. 이승만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비판하다가 나중에 돌아섰다. 이준석에 이어 지금 한동훈을 띄워주고 있는 것도 그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고 본다.
조갑제씨 밑에서 많은 후배가 희생을 감수하며 일했다. 그런데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졌다. 보수의 리더로 대접받으려면 제자들과 후배들에게 나눠주고 키워주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이 안타깝다. 내가 그 밑에서 일한 사람들 뻔히 다 아는데, 다 삐쩍 마른 신세다.(웃음)”
― 12·3 비상계엄은 어떻게 봤나.
“12.3 내란은 절반은 성공한 거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려내듯, 5·18을 기억하고 직·간접적으로 학습을 했던 이들이 그날 무의미한 폭력이 행사되지 않도록 막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게 재발하고 만 거다. 왜? 그동안 목청 크게 5·18을 알리기만 해왔다. 더 설득을 했어야 한다. 5·18에 대한 논문이 보수 쪽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45년간 이 거대한 사건에 대한 보수의 외면과 무지가 1980년 5월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똑같은 사건의 재발을 부른 거다.”

― 2021년 11월 전두환 빈소에 가서 “역대 어느 정부보다 국민에게 민주주의를 많이 돌려주신 분”이라는 덕담은 왜 했나.
“전두환은 자기 손에 피가 묻은 채 권력을 잡았지만 자기 참모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러면서 건국 후 처음으로 통행금지 해제했고, 해외여행 자유화를 통해 국민에게 공간의 자유도 돌려줬다. 학원 자율화로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총학생회장 선거권도 학생들에게 돌려주었지 않나. 그리고 결국 직선제를 한 거고. 같은 기간 김대중·김영삼 진영이 힘을 더하면서 전두환으로 상징되는 무인세력이 칼을 내려놓았고, 비로소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선거의 자유가 온 거라고 본다. 나는 이걸 5.18을 연구하다가 비로소 깨달았다.”
― 전두환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사람만 죽인 게 아니라 8월에는 4만여명을 삼청교육대에 끌고 가 순화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대했다. 극단의 공포정치에 대한 완화책을 전두환의 치적으로 과대포장하는 것 아닌가. 여기에 대해 얼마나 공감할지 의문이다.
“진실은 ‘차가운 팩트’를 확인하는 것이고, 화해는 ‘시대적 한계와 아픔’을 공감하는 거다. 삼청교육대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참혹한 국가 폭력이며, 나 역시 전두환 정권의 과외 금지로 대학 재학 중 고학의 길을 잃고 7년이나 군에 가야 했던 명백한 피해자다.
그러나 개인의 원한을 벗고 역사를 보면, 이는 위헌적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당대의 폭력범죄를 쓸어내야 했던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 역설이기도 하다. 분명히 해둘 것은, 최근 12·3 계엄 사태 당시 노상원 수첩에 적시된 ‘정치적 반대자 수거·처리’처럼 국가 폭력을 정치적 숙청의 도구로 쓰는 것은 어떠한 역설로도 포장할 수 없는 명백한 범죄라는 점이다.
과거사는 이분법적 이념이 아니라, ‘인권 유린’이라는 명백한 불법성(Y축)과 ‘치안 확보’라는 당대의 사회적 결과(X축)를 냉정하게 분리해서 직시할 때 비로소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이 내가 진화위에서 지켜갈 원칙이다.”
― ‘은근한 국가폭력 합리화’처럼 들린다. 진실화해위 회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논란이 될 거다. 어느 소위원회로 배정되고 싶은가.
“한국전쟁 다루는 1소위원회나 인권침해 사건 다루는 2소위원회로 가야지. 그게 거시적인 역사를 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디테일을 모르면 나중에 거시사 검증을 못 한다. 5.·18 조사위 때처럼 연구실 얻어 거기서 밤새우며 조사관들이 발로 뛴 보고서를 검증하고 검토하고 싶은 희망을 품고 있다.”
― 이승만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데,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은 이승만 시대에 일어났다.
“이승만이 시켰다고 할 수 있나. 이승만 시대의 비극은 총체적인 시대의 비극이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는 말이 있다. 물을 마실 때 그 근원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오늘은 어디서 시작되었나. 특정 시기만 부정적으로 재단해 설명하기 힘들다. 진화위는 과거 비극을 재발하지 않기 위해 조사하고 기록하는 기관이다. 과도한 피해자 중심주의에 몰입해 부정적 시각으로만 보면 우리가 물려줄 역사의 교훈을 잊을 수 있다.”

― 진화위는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태어났다.
“물론 피해자를 존중해야 한다. 그 이유는 약자라서다. 존중한다고 몽땅 면죄부를 줄 수 없다. 타협 없는 실증, 차별 없는 포용이 필요하다.”
― 본인을 자유주의자로 소개하는데.
“자유란 내면의 눈을 뜨고(自) 마음의 밭(由)에 싹을 키우는 일이다. 건강한 보수라면 자유주의자여야 한다. 이승만의 꿈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였다. 그 핵심은 반공 자유주의다. 그런데 이 땅의 보수는 반공 전체주의, 반공 군국주의에 머물러 있다. 윤석열 추종하는 태극기 부대가 딱 그짝이다. 진보 쪽도 계급적 사관에 머물러 있고 세상의 다양성을 품어내지 못한다. 보수가 병들면 극우가 발호하고, 진보가 병들면 극좌가 발호한다. 그래서 보수를 정상화시키고 중심 잡게 해야 하는데 길이 멀다. 잃어버린 한국인의 자산을 다시 찾아야 한다. 그게 이타적인 선한 마음이다. 죄다 이기적으로 변했다. 흥부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놀부의 마음이 세상을 지배한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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