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인가, 사장인가"…경계에 선 사람들

곽용희 2026. 5. 1.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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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진화하는 노동…
1953년에 멈춰있는 노동법
공장 근로자 보호법으론
다양한 노동 형태 못 담아
현장에선 꼼수·소송 난무
새 노동법 패러다임 필요
사진=최혁 기자


40대 프리랜서 보험대리인 A씨는 이전 직장을 상대로 근로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소송을 벌이고 있다. 퇴직금을 받으려는 목적이다. 하지만 새로 옮긴 곳에서도 그는 근로자보다 프리랜서 지위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일한 만큼 더 벌 수 있고 세금을 덜 내는 데다 근무시간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안정성과 유연성을 동시에 원하는 ‘요즘 일하는 사람’의 전형이다. 


근로자와 자영업자 사이 경계에 선 ‘비정형 노동자’가 매년 사상 최대치를 갈아치우고 있다. 30일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산재보험에 가입한 특수형태근로종사자는 지난해 12월 기준 149만218명에 달했다. 2024년 143만8067명에 비해 5만 명, 2023년 119만3801명과 비교하면 30만 명 가까이 늘었다. 산재 가입이 강제되는 특고 종사자는 보험설계사, 퀵서비스 기사, 화물차주, 대리운전기사 등이다. 가입 의무가 없는 직종까지 포함하면 실제 프리랜서 근로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이들을 담아낼 ‘법적 틀’이 없다는 점이다. 1953년 제정된 근로기준법은 일하는 사람을 ‘근로자’ 아니면 ‘사업주’로 가른다. 근로자로 인정받으면 주 52시간 근로제, 최저임금, 4대 보험, 퇴직금, 해고 제한 등 두터운 보호를 받는다. 인정받지 못하면 아무 보호도 받지 못하는 ‘올 오어 낫싱’(전부 아니면 전무) 구조다.

그러다 보니 일터에선 온갖 꼼수와 소송이 난무한다. 사실상 근로계약인데 용역계약서를 쓰고 일하는 ‘가짜 3.3’이 대표적이다. 노동자는 근로소득세 대신 3.3%의 사업소득세만 내면 되지만 4대 보험 혜택은 물론 퇴직금도 받지 못한다. 억지로 3.3 계약을 강요당하는 사례도 있고, 세금과 보험료를 아끼기 위해 이런 계약을 선호하는 노동자도 있다. 어떤 경우든 계약이 끝나면 소송전으로 이어지는 일이 허다하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노동법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권혁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는 시간과 장소에 얽매인 노동을 전제로 하지만, 새로운 노동 형태는 여기에 갇히지 않는다”며 “‘자영적 근로자’에게는 사업주와의 공정한 거래와 건강권 등을 보장해주는 새로운 보호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프리랜서·N잡러 수백만인데…노동법엔 근로자·사장만 있다
"노무제공자의 휴식권·보건 등 최소한의 보편적 권리 보장 필요"

취업준비생 이모씨(29)는 낮에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고 밤에는 유튜브 채널 두 곳의 영상을 편집한다. 시간급이 아니라 ‘영상 편당 단가’를 받는 구조이다 보니 투입 시간 대비 소득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친다. 이씨는 “채널 운영자로부터 카톡으로 실시간 수정 지시를 받으며 사실상 전속으로 일한다”며 “하지만 계약서는 ‘콘텐츠 공급 계약’으로 돼 있다”고 했다. 행여 불이익을 받을까 봐 근로계약서를 쓰자는 말은 꺼내기도 어렵다. 휴가와 퇴직금은 남의 나라 이야기다.

정보기술(IT) 개발자 정모씨(34)는 출퇴근 지옥철과 경직된 회사 생활에 질려 제주로 내려갔다. 회사 다닐 때 인연을 맺은 업체와 관계를 이어가며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했다. 플랫폼을 통해 다른 업체의 의뢰를 받아 많이 벌 땐 연 소득이 1억5000만원에 달한다. 정씨는 “언론에서 플랫폼의 착취 사례가 많이 부각되지만 나에겐 경직된 삶에서 벗어나게 해준 해방구”라며 “불안정한 소득은 자영업을 선택한 대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953년 틀로 2026년의 노동 현실 재단

똑같이 플랫폼에 의존해 공급 계약서를 쓰고 일하지만 이씨는 ‘보호’가 절실하고 정씨는 ‘자유’가 더 소중하다. 문제는 현행 제도가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플랫폼과 서비스산업 발전으로 프리랜서가 늘고 스펙트럼도 넓어졌는데, 1953년 제정된 근로기준법은 여전히 굴뚝공장 시대에 머물러 있어서다.

국가데이터처 경제활동인구조사의 마이크로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올해 3월 기준 부업 취업자(n잡러)는 57만5000명에 달했다. 2014년 3월 37만7000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10여 년 새 52.5% 증가했다. 한 가지 정규직 대신 다양한 형태의 노동을 선택하는 사람이 그만큼 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현행 근로기준법은 일하는 사람을 ‘근로자’ 아니면 ‘사업주’로 가른다. 이는 이씨같이 보호가 필요한 사람을 사각지대로 내모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불거지자 선진국들은 입법과 판례를 통해 해결책을 찾아가고 있다. 2021년 영국 대법원의 우버기사 판결이 대표적이다. 영국은 1996년 고용권리법을 제정하면서 근로자도 자영업자도 아닌 회색지대의 노동자를 ‘워커(worker)’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정의했다. 워커는 근로자만큼 강력한 해고 보호는 받지 못해도 최저임금, 유급휴가 등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도록 했다. 영국 대법원은 2021년 출퇴근은 자유롭지만 알고리즘에 의해 통제받는 우버 기사를 워커로 규정했다.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등에서도 유사근로자, 의존적 자영업자 등으로 개념을 세분화해 보호망을 재정비하려는 논의가 활발하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산업별 단체협약시스템이 잘 마련된 독일은 근로기준법 등을 확대 적용하기보다 노사 협의를 통해 취약근로자를 보호하는 시스템”이라고 설명했다.

 ◇근로자의 울타리 안으로

반면 한국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를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라는 울타리 안으로 밀어 넣으려고 한다. 정부 여당이 추진하는 ‘근로자추정제’가 대표적이다. 배달 라이더 등 특수형태근로종사자가 퇴직금 등을 받기 위해 ‘근로자성’을 주장할 경우 일단 근로자로 추정하는 제도다. 이견이 있으면 ‘근로자가 아님’을 사용자가 입증해야 한다.

경제계에선 산업 특성을 감안하지 않은 이런 시도가 오히려 일자리를 감소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택시산업에서 이미 한 차례 경험했다. 정부는 택시 ‘사납금제’의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해 택시발전법을 통해 월급제 전환과 최저임금 적용을 강제했다. 그러자 택시 회사들은 운행 택시와 근로 시간을 크게 줄였다.

박 교수는 “그런 면에서 근로자추정제는 노동시장의 흐름과 충돌한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정부가 패키지로 추진 중인 ‘일하는 사람 기본법’은 국제적인 입법 추세에 부합한다고 평가했다. 노무제공자에게 안정적 계약 체결, 차별 금지, 휴식권 보장, 안전 및 보건 등 ‘보편적 권리’를 보장하는 법이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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