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다시 中 속국으로” 해방 전후 장제스의 음모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2026. 5. 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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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의 돌발史전 2.0]
중국인에 의한 한국의 ‘고문 정치’를 구상했다
1945년 9월 중국 국민당 장제스(왼쪽)와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

중화민국의 총통을 지낸 현대 중국 정치가 장제스(蔣介石·1887~1975)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란 한국인을 말하는 것이다. 1943년 11월 미·영·중 정상이 만난 뒤 발표한 카이로 선언에서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킬 것’이라고 명시한 데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장제스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장제스는, 장개석은, 한국의 독립 과정에서, 그렇듯 천사와도 같은 인물이었던 것일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된 듯한 면도 없지 않지만.

장제스. 1953년 촬영한 사진.

그러나 상당수 학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장제스와 많은 중국인은 한반도를 대만과 마찬가지로 ‘원래 중국 것이었는데 일본에 빼앗긴 영토’로 보고 있었다. 2차 대전이 끝나 일본이 패망한 뒤에 한국의 ‘다시 중국의 속국이 돼야 한다’는 의식이었다. 조공·책봉 체제라는 것은 형식적인 외교 관계이며 명·청이 1882년 임오군란 전까지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별 고려 대상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34년 3월 27일의 일기에 장제스가 기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만과 한반도를 되찾자. 이곳은 한나라와 당나라의 일부였던 땅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황제의 자손으로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그해 4월의 한 강연에선 이런 말도 했다. “우리는 동북(만주)의 실지(失地)를 회복할 뿐만 아니라, 조선도 옛날부터 중국의 영토였기 때문에 수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 서적 '중국 국치지도의 비밀을 풀다'에 나오는 지도. 검은 선 내부의 현재 중국 영토가 아닌 지역은 모두 중국에서 '원래 중국 영토였는데 근세 이후 영국·러시아·일본 등 외국에 빼앗긴 영토'로 여기고 있는 지역이다. 한반도 전체를 대만과 함께 '중국 땅이었는데 일본에 빼앗긴 땅'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의 중국 영토가 아니라 중국인의 의식 속에 남은 '상상의 과거 영토'라 할 수 있다.

배경한 전 신라대 사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카이로 회담을 통해, 미국의 외교 전략에 따라 강대국의 지위를 갖게 된 중국은, 신탁통치에 의한 전후 한반도 문제 해결이라는 미국 주도의 방안에 동조하면서, 사실상 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포기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카이로 회담의 장제스 역할’이 180도 달랐다는 얘기다. 놀라기는 아직 이르다. 다시 배경한 교수의 서술을 보자. “그런 한편으로 중국 측에서는 종전을 앞두고 한국 진공 시에 중국군도 참여하는 방안으로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었고 재정적 원조와 민간 투자의 확대 등을 포함한 한국에 대한 지원책을 검토하면서 영향력 확대를 노리기도 했다.”

이게 끝이라면 그나마 나았을 테지만 그렇지 않았다. “(장제스의) 국민정부 측에서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 이전에 거치도록 규정한 적당 시기에 대한 방안으로…” 다음 문장이 무척 중요한 것 같다. “(한국의) 외교와 국방을 중국인 고문이 담당하는 고문정치를 검토하는 등 적극적인 개입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고문정치? 이건 1905~1910년 일본이 주도한 통감정치의 판박이 아닌가.

중일전쟁 시기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의 대(對)한반도 정책은, 전후 강대국으로 부상할 중국이 구상하는 ‘아시아 국제 질서’의 일부였다. 구체적으로는 중국의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약소 민족에 대한 호혜적 지원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었다는 얘기다.

쑨원(오른쪽)과 함께 촬영한 젊은 시절의 장제스.

그런데 한국에 대한 이런 인식은 장제스 시절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배 교수는 이렇게 지적한다. “앞 세대 중국의 정치 지도자 쑨원(孫文)이나 위안스카이(袁世凱)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멀게는 책봉조공관계를 기본 축으로 하는 명·청 시대의 조선에 대한 인식이나 정책과 그 맥락이 닿아 있다.”

실제로 1880년대 조선에서 ‘총독’ 같은 지위를 누렸던 위안스카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쑨원은 우리가 아닌 중국인들에게나 영웅일 뿐이었던 것이다.

윤봉길 의거 이후 장제스(오른쪽)와 회담하는 김구의 모습을 그린 박학성의 유화.

구대열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는 이렇게 분석한다. “중국이 끝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것은, 알려진 것처럼 소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임정을 승인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국민당 정부는 미·영 측에 ‘한국은 독립운동 단체 간에 반목이 심하다’고 강조했고, 광복군에 대해서는 중국 군사위원회의 직접 통치를 받게 하는 등 교묘하게 통제하고 활동을 제약했다. 연합군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한국은 독립 자격이 없다’는 선전전을 강화하고 한반도에서의 역할 분담론을 제기했다. ‘미국은 재정, 영국은 수송, 소련은 보건, 중국은 치안 등을 맡는다.’ 치안이라고? ‘우리는 내무부를 맡겠다’는 것 아닌가. 실질적으로 중국이 한반도를 통치하겠다는 속셈이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 참석한 장제스 국방최고위원장,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왼쪽부터)

일설에는 카이로 회담 당시 이런 일이 있었다고도 한다. 장제스가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자 루스벨트는 흠칫 놀랐는데, 미국이 제시했던 신탁통치안에 장제스가 이미 동의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의외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아하, 중국이 한반도로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는구나’라고 깨달은 루스벨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만주, 펑후(澎湖) 제도(대만 서쪽 군도), 대만을 가질 수 있지만 한반도는 가질 수 없소!”

기자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개별 기사의 점들이 이어져서 더 큰 그림을 이루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띄엄띄엄 썼던 아래 네 건의 기사.

2018년 8월 22일 신문에 썼던 칼럼이다. 1939년 10월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이 최후의 항전지인 충칭 부근에 모여 ‘7당 통일회의’를 열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관리 한 명이 이를 참관하고 쓴 보고서에 관한 기사다. “한국 민족은 개성이 워낙 강한 데다 자존심이 세며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강하다” “젊은이들은 나이 든 사람을 무능하다고 비웃으며, 나이 든 사람들은 청년들이 유치하고 무지하다고 손가락질하기 일쑤다” 같은 분석을 보고 ‘1939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고 탄식하는 내용의 칼럼이었다.

그런데 기사에서도 언급했지만, 이것은 중국 국민당 정부 측의 대단히 악의적인 한국 민족에 대한 폄훼였다. “한국인의 민족성 자체가 단결 정신이 부족하다. 민족 혁명을 영도할 위대한 영수(領袖)가 존재하지 않는다. 중심 사상이 결핍돼 있다. 각 당파 간에 극심한 시기·질투·견제 현상이 난무하고 있다.” 한국인이 어떻게 분열돼 있는가에 중점을 두고 분석한 글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이 자료 수집을 거쳐 훗날 ‘한국인은 단결할 수 없는 민족이니 우리가 대신 통치하겠다’고 주장할 사전 포석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섬뜩한 일이다.

다음은 2013년 12월 2일 신문에 보도한, 1947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외교 문서 ‘일본 영토 처리 변법 연구’다. 이 문서는 “향후 제주도는 중국이 신탁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제주도에는 (일본이 건설한) 양호한 비행장이 있는 데다 군수함 기지도 있다”며 제주도의 전략적 가치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또한 울릉도와 독도의 경우에도 미국이나 중국이 신탁통치할 수 있다고 했다.

한마디로 제주도, 울릉도, 독도의 세 섬을 중국이 가지겠다는 영토적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한반도 전체를 ‘재(再)속국화’하겠다는 욕심을 지닌 중국 국민당 정부였지만, 막상 일제 패망 이후 미·소가 38선을 기점으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고 나니 한반도 본토에 영향력을 미치기 어려워지자 ‘섬’으로 눈을 돌린 것이라 할 수 있다.

2006년 6월 27일 보도한 기사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1948년 문서를 다뤘다. 중화민국 국방부 제2청이 외교부로 보낸 문서로, 당시 만주 지역의 정세에 대해 쓴 것이다. “소련이 북한과 협정을 맺고 간도·안동·길림의 세 지역을 한인 자치구로 정했고, 연길·목단강·목릉과 부근 지역을 북한 영토로 획정하려 하고 있다” “북한군이 이 지역에 주둔하고 지방 행정도 조선인이 주관하고 있어 실제로 북한에 합병된 것과 같다”고 했다. 정말 북·소가 그런 협정을 맺었나? 그 후 실제로 진행된 역사의 경과를 보면 이건 그냥 호들갑으로 봐야 할 것인데, 장제스 정부는 이렇게 난리를 칠 정도로 한반도에 대한 경계심이 컸던 것이다.

이번엔 2013년 3월 13일 보도한 기사. 광복 이후 3년, 그러니까 1945~1948년 만주 지역에서 중국인에 의해 최소 8000명의 조선인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는 내용이다. 윤휘탁 한경대 교수가 ‘한교사무’ ‘동북복원계획강요초안’ ‘중국조선족 이민실록’ 등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다. 만주국에서 일제가 조선인을 ‘2등 공민’, 중국인을 ‘3등 공민’으로 여기는 차별 정책을 쓴 결과 이 지역 중국인의 조선인에 대한 적개심이 커졌기 때문에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증언도 있다. “중국인 무장 집단은 마을을 샅샅이 훑으며 식량, 돈, 옷가지 등을 빼앗거나 반항하는 사람들을 무차별 폭행·살해했고, 부녀자들을 겁탈했다.” “조선인 부녀자들은 겁탈을 피하기 위해 얼굴에 숯 검댕이 칠을 하거나, 가족 전체가 밭에 숨어 모기에 뜯기면서 밤을 보내기도 했다.” 중국 정규군이 두 개 마을의 조선인 100여 명을 학살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국’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지금의 중국이 아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즉 중화민국, 즉 현재 대만 정부의 전신이다. 만주 지역 조선인이 중국공산당에 우호적인 입장이 된 데는 이 같은 국민당 측의 탄압이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1945년 이후에도 국민당 정부는 한반도와 한국인 또는 조선인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이 아니었다.

한반도에 대한 장제스의 야심이 완전히 좌절된 것은, 1949년 국공 내전에서 완패해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축출된 바로 그 시점이었다. 물론 중공(중국공산당) 정부의 수립은 한국인 입장에선 또 다른 거대한 시련의 시작이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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