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골목에도 식탁에도 슬픔이 내려앉은 도시, 영화 ‘비정성시’
※이번 레터는 ‘비정성시’ 재개봉을 앞두고 작성됐으나, 이후 저작권 관련 문제로 개봉이 취소됐습니다. 한국예술영화관협회는 원권리자의 공식적인 상영 철회 요청을 받았으며, 적법한 권리 관계가 확인될 때까지 상영을 중단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배급사 디스테이션도 “현재 본 작품과 관련하여 저작권 문제가 발생한 사실을 확인하였으며, 해당 세일즈사에 관련 내용을 통보한 상태”라며 “원만히 해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공지했습니다. 아쉽게도 예정됐던 5월 6일에는 개봉하지 못하게 됐지만, 추후 다시 관객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리뷰는 아래에 남겨두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백수진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203번째 레터는 36년 만에 재개봉하는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영화 ‘비정성시’(5월 6일 개봉)입니다. 대만 최초로 베네치아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으며 배우 양조위를 전 세계에 각인시킨 작품이기도 하죠. 바람 잘 날 없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자, 오늘날의 대만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돌아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1945년 해방부터 1947년 2·28 사건까지, 역사는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와 작은 산골 마을의 한 가족을 산산이 부수고 지나갑니다. 그 파도에 맞설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영화는 그 물음에 조용히 답합니다. 이상하게도 그 답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에게도 위로처럼 다가옵니다.

영화는 1945년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해방 소식과 함께, 임씨 가문 첫째 임문웅(진송용)의 아들이 태어납니다.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임씨 가족은 새로운 대만에 대한 희망을 품어보지만, 해방이 와도 소시민들의 살림살이는 나아진 게 없습니다.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국민당 정부는 쌀·설탕 같은 주요 물자를 통제했고, 물가가 치솟으면서 민심은 점점 들끓습니다.
임씨 가족 역시 시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장사를 하는 첫째 아들은 상하이에서 온 조직과 갈등을 빚고, 둘째 아들은 일본군에 징집돼 필리핀으로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고, 전쟁에서 돌아온 셋째 아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립니다. 어릴 적 사고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넷째 아들 문청(양조위)은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는 친구의 동생이자 간호사인 관미를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영화는 현대사의 비극을 직접적으로 재현하기보다, 그 변두리에 놓인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시대의 상처를 조용히 드러냅니다.

대만의 역사를 알고 보면, 영화를 조금 더 쉽게 따라가실 수 있을 겁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가 끝나고 대륙에서 대만으로 건너온 국민당 정부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전부터 대만에 살고 있었던 ‘본성인’들은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됩니다. 본성인들은 일제 치하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매국노’라는 의심을 받고 관직과 주요 자리에서도 밀려나게 됩니다. 그렇게 쌓인 불만과 분노가 터진 것이 1947년 2·28 사건이었습니다.
발단은 사소해 보였습니다. 1947년 2월 27일, 정부의 허가 없이 담배를 팔던 한 여성이 단속원에게 폭행을 당하자, 이에 항의하던 한 시민이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분노한 민중은 거리로 나섰고, 국민당 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체포되고 학살당합니다. 오랫동안 대만 사회에서 드러낼 수 없는 상처였고, 2·28 사건을 처음 다룬 영화가 바로 ‘비정성시’였습니다.

한국의 근현대사와도 닮아 있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으실 겁니다.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이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 같습니다. 역사는 한 가족을 망가뜨리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부서진 채로 살아갑니다. 또 다른 아이가 태어나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함께 노래를 부르는 소소한 일상들이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마치 그 일상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그들에게 주어진 소명인 것처럼요.
영화는 느릿하게 흘러가지만,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사방에서 포탄이 터져도 졸리는 영화가 있고, 침묵이 이어져도 다음엔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더 집중하게 만드는 영화가 있죠. ‘비정성시’는 후자에 해당합니다.

영화에서 문청(양조위)은 청각 장애인이라 수첩에 글을 써서 사람들과 소통하는데요. 관미와 나란히 앉아 필담을 나눌 땐,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저도 모르게 그들의 대화에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양조위가 대만어를 하지 못해 넣게 된 설정이지만, 그의 침묵은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대만인들에 대한 은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직 완전히 무르익기 전, 풋풋한 양조위를 만나는 재미는 덤입니다. 스물여섯 양조위는 맑은 눈빛만으로도 관객의 시선을 붙듭니다. 이때부터 눈빛으로 말하는 법을 익힌 게 아닌가 싶어요. 양조위 스스로도 ‘비정성시’를 자신의 연기에 큰 영향을 준 작품으로 꼽았다고 하죠.

영화는 소란스러운 인간사를 비추다가도, 어느 순간 멀찍이 물러나서 그것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 사이 누군가는 사라지고, 누군가는 돌아오지 못하고, 누군가의 삶은 돌이킬 수 없이 바뀌어 있습니다. 마을을 감싼 거대한 산맥과 잔잔한 바다는 그 모든 일을 말없이 지켜보는 듯합니다. 마을 풍경은 아득하고, 쓸쓸하고, 때로는 무심하게까지 느껴집니다.

제목 ‘비정성시’는 슬픈 도시라는 뜻입니다. 산속의 자욱한 안개처럼 텅 빈 식탁, 누군가가 남긴 편지, 굽이진 산길, 복작복작한 골목에도 슬픔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습니다. 포스터 속 평범해 보이는 가족 사진에도 슬픈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데요. 카메라 앞에 앉은 문청의 가족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요. 이들의 운명은 극장에서 확인하시길 바라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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