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한데 잠이 안 들어요…우울증도, 번아웃도 아닌 이겁니다 [건강한겨레]
신체 ‘중앙제어실’ 고장났을 때 할 일

늘 피곤하고, 이유 없이 심장이 두근거리며, 잠은 못 자는데 눕기만 하면 멍하다. 소화는 안 되고, 숨은 왠지 답답하며, 머리가 맑은 날이 없다. 견디다 못해 병원을 찾아도 뾰족한 수가 없다. 검사 결과가 하나같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번아웃’으로 불리며 현대인의 일상 언어가 된 이 증상들이 실제로는 뚜렷한 신체 질환일 수 있다는 사실이 주목받고 있다. 최근 온라인에서는 “번아웃인 줄 알았더니 자율신경 문제였다”는 경험담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유튜브에서도 자율신경실조증 관련 영상들이 수십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화제다.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자율신경실조증 환자는 2020년 1만2365명에서 2022년 2만301명으로, 2년 새 64% 급증했다.
번아웃인 줄 알았는데…문제는 자율신경
문제는 이 균형이 깨질 때다. 브레이크 없이 액셀러레이터만 밟힌 차처럼 균형이 무너지면 증상은 한 기관에 머물지 않고 전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다.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속은 더부룩하고, 숨은 답답한데 소변도 시원치 않으며, 머리는 멍하고 잠은 오지 않는 상태. 이것이 자율신경 이상의 전형적인 양상이다.
그러나 자율신경 이상은 폐 컴퓨터단층촬영(CT), 심초음파, 위·대장 내시경을 받아도 뚜렷한 이상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장기 자체가 망가진 것이 아니라 그 장기들을 조율하는 신경계에 이상이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건물의 냉난방기와 조명은 멀쩡한데 중앙 제어실이 오작동하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다. 각각의 장기 문제로 접근하면 제대로 된 진단명을 받기 어려운 이유다.
번아웃 증상과 유사한 자율신경계 이상은 흔히 정신적 문제로 오인되기 쉽다. 실제로 진단 과정에서 환자들은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권유받거나 ‘신체화 증상’이라는 진단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누리병원 뇌신경센터 김호정 원장은 이런 접근 방식이 오히려 치료를 늦출 수 있다고 경고한다.
“명상이나 심리적 이완만으로 증상이 사라졌다면 처음부터 자율신경 기능 이상보다는 다른 형태의 신체화 문제였을 가능성도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자율신경 이상이 오래 지속되면 불안과 우울이 뒤따를 수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방향을 뒤집어서는 안 됩니다. 몸의 조절 시스템이 무너진 결과로 불안이 생기는 것을, 처음부터 마음의 문제로 환원해버리면 질환의 실체를 놓치고 치료의 실마리를 잡지 못할 수 있습니다.”
각성의 빛, 회복의 어둠…이 질서 교란된 결과
첫째는 호르몬 변화다. 특히 여성의 경우 40대 중후반부터 호르몬 변화가 급격히 일어난다. 갱년기는 폐경 이후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신경계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둘째는 과로와 수면 부족의 누적이다. 장기간 쌓인 부담이 한계점을 넘으면 자율신경계가 조절 능력을 잃게 된다. 셋째는 생활 루틴의 장기적 붕괴다. 블루라이트 노출, 야식, 불규칙한 수면이 수년간 반복되면 자동조절 시스템은 어느 순간 한꺼번에 무너질 수 있다.
특히 현대인의 생활리듬 파괴는 치명적이다. 자율신경에는 분명한 24시간 주기의 리듬, 이른바 서캐디언 리듬이 있다. 이 리듬은 빛으로 조율된다. 아침 햇빛은 각성 신호를, 어둠은 회복 신호를 보낸다. 문제는 현대인의 생활 방식이 이 리듬을 지속적으로 훼손한다는 점이다. 야간 스마트폰 사용이 대표적이다. 화면에서 방출되는 블루라이트는 뇌에 ‘아직 낮’이라는 거짓 신호를 보내 부교감신경의 작동을 방해한다. 몸은 회복하지 못한 채 다음날을 맞이하고, 이런 상태가 반복되면 에너지는 조금씩 고갈된다.

“생활리듬이 일정했던 농경사회에서는 이런 질병이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회가 복잡해지고 자연의 리듬과 어긋나는 생활을 하는 이가 늘어나면서 자율신경계 문제를 겪는 사람도 함께 늘고 있습니다.”
자율신경계 이상은 더 이상 중장년층만의 문제가 아니다. 10대는 사춘기 호르몬 변화와 스마트폰 과다 노출이 겹치는 시기다. 20~40대에서는 지식노동 중심의 생활자가 특히 취약하다. 온종일 뇌를 과도하게 쓰고, 퇴근 후 음주나 격한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풀며, 밤늦게 다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 잠드는 생활이 반복된다.
중장년층은 구조적으로 더 취약하다. 나이가 들수록 회복을 담당하는 부교감신경 기능이 저하되는 반면, 교감신경은 상대적으로 오래 유지된다. 액셀러레이터는 작동하는데 브레이크가 예전 같지 않은 상태다. 65살 이상에서는 자율신경계 이상이 더 중대한 신호일 수 있다. 수면 이상, 체온 조절 문제, 소화기 증상 등이 치매나 파킨슨병 같은 신경퇴행성 질환의 전조로 먼저 나타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아침 햇볕 5분 쬐기, 잠들기 전 스마트폰 놓기
‘역추적’도 중요하다. 증상이 갱년기 전후였는지, 극심한 과로 이후였는지, 만성 수면 부족이 선행했는지를 파악해야 치료의 출발점을 잡을 수 있다. 자율신경 이상은 증상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한 시점을 함께 읽어야 하는 질환이기 때문이다.
치료의 핵심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서캐디언 리듬을 되살리는 것, 즉 몸이 원래 설계된 대로 낮과 밤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다. 김 원장이 권하는 실천은 거창하지 않다. 아침 햇볕을 5분이라도 쬘 것, 밤 11시 전후에는 잠자리에 들 것, 잠들기 전 스마트폰을 멀리할 것. 야식을 줄이고, 걷기·스쾃·요가 같은 가벼운 움직임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극적인 변화가 아니라 무너진 리듬을 다시 세우는 일상의 반복이 핵심입니다. 자율신경은 의지로 밀어붙이는 기관이 아니라 생활의 질서 속에서 서서히 회복되는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윤은숙 기자 sug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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