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 공기청정기’로만 여겼는데… 식물이 어느 날 말을 걸어왔다
플랜테리어 전문가이자 '식물인문학자'
호흡기 약한 아들 위해 화분 들여왔지만
"열심히 살고 있어" 고무나무 목소리에
식물이 주는 배움과 통찰에 귀 기울여와
편집자주
내일은 오늘보다 맛있는 인생, 멋있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라이프스타일 담당 기자가 한 달에 한 번, 요즘의 맛과 멋을 찾아 전합니다.

작가, 초록생활연구소 대표, 식물인문학자, 창조성 코치, 플랜테리어(planterior·식물과 인테리어의 합성어) 전문가. 정재경(52) 작가가 쌓아온 수식어는 여러 개다. 본인을 가장 잘 설명하는 직함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선생님’인 것 같아요. 먼저 산(선생·先生) 사람이라는 뜻이잖아요. 저도 앞서 살아본 경험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법, 삶의 기술을 알려주는 전달자니까 선생님이 아닐까요.”
겸손하면서도 자부심이 서려 있는 소개였다. 식물 속에 둘러싸여 살아온 경험에서 나누고 싶은 삶의 방식을 배웠다는 ‘선생님’ 정 작가를 지난달 23일 경기 성남 분당구 초록생활연구소에서 만났다.
200개 화분과 살아가는 법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나무와 허브 향이 코끝에 감돌았다. 지하 1층에서 지상 2층까지 세 개의 층으로 이뤄진 초록생활연구소는 정 작가의 집이자 작업실이다. 그는 이곳에서 200여 개의 식물을 기르고 있다. 눈길 닿는 구석마다 크고 작은 화분이 놓여 있었다. 식물이 이렇게나 많이 배치돼 있는데 신기하게도 발에 채이거나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비결을 물었다.
“데드 스페이스(dead space·죽은 공간)를 활용하시면 동선과 겹치는 것을 피할 수 있어서 스트레스가 적어요. 예컨대 벽과 바닥이 만나는 귀퉁이, 벽과 벽이 만나는 모서리, 주방 후드 위, 양변기 뒤, 책상 맨 끝, 냉장고 위… 이런 공간에 화분을 배치하시면 먼지도 사라지고, 동선도 겹치지 않아 불편하지 않아요.”
햇빛이 잘 드는 창가가 아니면 기르기 어렵지는 않을까. 정 작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열대식물을 기르면 돼요. 겨울에도 보통 18도 이상인 실내는 열대기후예요. 열대 지역 숲속은 빼곡한 나무로 어두컴컴하기도 해서, 빛이 덜 들어도 열대식물들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요. 물론 장미나 과일나무처럼 커다란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우는 식물은 빛이 많이 필요하지만요.”

정 작가는 초심자에게는 스킨답서스, 스파티필름처럼 잘 자라고 튼튼한 식물을 추천한다. 식물이 쑥쑥 크는 기쁨부터 알려주기 위해서다. 초보의 가장 잦은 실수인 과습을 방지하기 위해 저면관수(화분을 물 담긴 용기에 넣어 식물 뿌리가 아래로부터 물을 빨아올리게 하는 방식)로 물을 주는 것을 권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면, 향기가 싱그럽고 요리에도 활용할 수 있는 허브로 넓히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정 작가는 2010년대 후반부터 식물을 활용한 인테리어를 알려온 플랜테리어 전문가이기도 하다. 눈이 즐거운 식물 배치 방법도 물어봤다. “디자인의 기본 요소인 통일, 비례, 균형, 대칭, 리듬감을 염두에 두는 것을 추천한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가령 화분의 색깔 또는 재질을 통일하거나, TV 등 큰 구조물을 중심으로 대칭이 되도록 식물을 놓으면 안정감 드는 풍경이 된다.
정 작가가 특히 좋아하는 요소는 리듬감이다. 식물의 크기와 종류, 모양 등에 ‘강약중강약’ 식으로 변주를 주는 방식이다. 일례로 보일러 버튼 앞에는 크기가 다른 화분이 높낮이가 다르게 배열돼 있고, 대신 화분의 질감과 색감은 비슷하게 맞췄다. 식물을 짝수보다는 3개, 5개 등 홀수로 들여놓는 것도 생동감 있는 인테리어에 도움이 된다.

‘식물인문학자’가 되기까지
식물이 처음부터 교감의 대상은 아니었다. 10년 전 화분 수백 개를 들였던 것은 오로지 열 살 난 아들을 위해서였다. 이른둥이 아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몇 달 내내 기침을 할 만큼 호흡기가 약했다. 그해에는 더욱 심해져, 매주 휴지를 흠뻑 적실 정도로 코피가 났다. 정 작가는 위기감을 느꼈다. 부쩍 심해진 미세먼지가 의심됐다. 어떻게 하면 집 안의 공기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떠올린 것이 식물이었다. 정 작가는 화분을 잔뜩 데려오기 시작했다.
“그때는 식물이 살아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냥 전기코드를 꽂지 않아도 되는 공기청정기, 그 정도의 의미에 불과했어요.”
변화는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평소처럼 물을 주던 어느 날, 고무나무가 새잎을 내민 것이 보였다. 식물이 ‘살아 있음’을 스스로 말한 순간이었다. “그 고무나무가 저한테 물어보더라고요. ‘나는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너는 뭐 하니’라고요.” 그 즈음부터 식물이 하는 얘기가 들려왔다. 수많은 화분과 부대끼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자연과 교감하는 감수성이 싹튼 것을 그때 깨달았다.

이제 그는 ‘식집사’를 넘어 ‘식물인문학자’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여긴다. 조경, 원예, 생명과학 등 식물에 관한 학문은 기술과 기능 일색이다. 하지만 정 작가의 궁금증은 항상 식물과 인간의 관계로 기울어졌다.
“계속 커지는 질문은 ‘식물과 인간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까’였어요. 인간과 인간의 삶, 문화와 가치를 탐구하는 학문은 인문학이잖아요. 내가 관심이 있는 건 식물을 통한 인문학이니, 식물 인문학자라고 이야기하자 생각했죠. 관련 학위는 없지만, 식물과 24시간 생활해본 경험이 10년이고,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으니까요.”
자연을 살피고 탐구하는 능력에 주목한 것이 정 작가만은 아니다. 하버드대 교육심리학 교수인 하워드 가드너는 ‘다중지능 이론’을 통해 인간이 독립적인 8가지 핵심 지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론 발표 당시에는 언어·논리수학 등 7가지 지능만 짚었다가, 이후 자연친화지능을 추가했다. 자연친화지능은 자연의 패턴을 인식하고 동식물의 종을 식별하는 등, 자연을 이해하는 민감성이다. 식물의 질서를 포착하고, 인간의 삶에도 적용하려는 정 작가의 화두와도 맞닿아 있다.
글쓰기와 식물

정 작가는 9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써온 글쟁이이기도 하다. 2018년 플랜테리어 에세이 ‘우리 집이 숲이 된다면’을 시작으로 ‘있는 힘껏 산다’, ‘커리어 가드닝’ 등 6권의 책을 펴냈다.
“열두 살에 거울을 보면서, 마흔일곱쯤이면 나도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기억이 있어요. 그때쯤 되면 글을 쓸 만한 경험이 생길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예감이 꼭 들어맞진 않았지만, 크게 빗나가지도 않았다. 정 작가는 마흔넷이 되던 2017년부터 매일 아침 첫 일과로 세 쪽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1년간 매일 글을 쓰면 책 한 권을 낼 수 있다’는 말에 반신반의하며 시작한 작업이었는데, 이제는 글부터 쓰지 않으면 종일 신발끈을 풀고 걸어 다니는 것처럼 찜찜하다고 한다. 글을 쓰기 한 해 전 마음을 붙이기 시작한 취미, 식물 기르기는 그의 글 속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다.

첫 저서 ‘우리 집이 숲이 된다면’에서 “내가 식물을 키우는 목적은 실내 공기 정화”라고 못 박았던 정 작가는, 이제 식물을 단순한 공기청정기로 생각할 수 없게 됐다. 정 작가에게 식물은 영감과 통찰의 원천이 되는 자연이다. 살아가는 기술 역시 200여 개의 식물로부터 배웠다.
“저는 식물적 삶의 방식이 가장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식물은 에너지를 딱 맞게 소모해요. 낭비가 많은 동물의 대사 과정, 도시적인 삶과 달라요. 그러니 저는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은 소비를 덜어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극단적으로 절약하자는 의미는 아니에요. 정말 가치 있는 곳에 비용과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한다는 생각이죠.“
이어 말했다. “살아있는 것들로 둘러싸인 삶도 그럴 가치가 있는 것 중 하나예요. 생명력과 충전되는 느낌을 경험하고 나면, 화분을 하나만 키우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김나연 기자 is2n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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