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낮에 오라니"… 직장 갑질 피해자 두 번 울린 '배짱 행정'

송주용 2026. 5. 1. 04:31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꽉 막힌 행정 탓 어려움 겪는 노동자들
행정만 유연해져도 노동자 어려움 경감
편집자주
직원 수가 채 5명이 안 되는 일터(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는 여전히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서 있다. 작은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2등 시민'이라고 자조한다. 노동단체 직장갑질119와 함께 노동자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당장 무엇을 바꿔야 할지 살펴봤다.
챗gpt 생성 이미지

정우진(가명)씨는 지난 2월 아내와 마주 앉았다. 입술은 떨렸고 마음은 무거웠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망설이기를 여러 번. 깊게 심호흡을 한 뒤 그동안 회사에서 겪은 일을 모두 털어놨다.

우진씨는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였다. 팀장에게 시달리다 못해 퇴사했다. 2024년 10월부터 지난 1월까지 약 1년 3개월을 다닌 전 직장은 지옥 같았다. 팀장은 크리스마스 이브 날 자신의 차를 자택으로 옮겨 놓으라고 지시했고 개인휴가 일정을 대신 짜도록 지시했다. 여기에 각종 수당 등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우진씨는 퇴사한 뒤 팀장과 회사를 직장 내 괴롭힘과 임금체불로 신고했다.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선 처음에는 회사가 근로기준법 적용을 안 받는 5인 미만 사업장이라는 이유로 접수조차 되지 않았지만, 이의신청을 통해 몇 건의 괴롭힘이 벌어진 시점에는 5인 이상 사업장이었다는 점이 인정됐다.

하지만 다른 난관이 있었다. 고용노동청이 "조사는 평일 낮 시간에만 할 수 있다"고 통보해왔기 때문이다. 운 좋게 새 직장에 취업한 우진씨로서는 입사 한 달도 안 돼 연차를 쓸 수 없는 노릇이었다. 퇴근 후 저녁이나 주말에 조사받거나 서면 조사를 할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결국 우진씨는 아내에게 그동안 겪은 모든 일을 설명한 뒤 대신 출석해 조사를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행정 방식만 바꿔도 노동자 삶 달라져"

30일 노동계에 따르면 상시 근로자가 5명이 채 안 되는 영세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한다. 이 탓에 부당해고 위협에 쉽게 노출되고 연차도 제대로 못 쓰며 직장 갑질에 시달리는 일이 적지 않다. 근로기준법을 개정해 모든 노동자가 법 적용 대상이 된다면 해결될 문제지만 현실적으로 법을 고치는 과정은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과 전문가들은 당장 꽉 막힌 행정 방식만 바꿔도 노동자의 고통을 줄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선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의 조사 방식을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부당해고, 직장 내 괴롭힘 등 피해를 입은 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해 비슷한 영세사업장에 바로 취업하는 사례가 많다. 하지만 사업장 측의 부당 행위를 조사하는 노동청이 '평일 낮 조사'를 원칙으로 하고 있기에 출석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장종수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재취업한 5인 미만 노동자에 대해선 화상·야간·휴일조사 제도를 도입해 내실 있게 피해 조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짜 5인 미만 사업장을 적발하기 위해 전담 노동감독관을 두자는 제안도 있다. 사업주 가운데 근로기준법 적용을 피하려고 사업장을 쪼개어 사업자등록하거나 직원을 정식 근로자가 아닌 프리랜서(사업소득자)로 위장 채용해 계약하는 방식 등을 악용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 모든 노동자가 사용자와 체결해야 하는 근로계약서를 입사 후 일주일 내 작성하지 않으면 사용자에게 벌금을 부과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아울러 정부 고용포털인 '고용24'를 통해 사업체의 상시근로자 수, 친족 근무자 수 등을 공개해 노동자에게 더 정확한 회사 정보를 제공하자는 주장도 있다.

현장에선 구직수당 수급 자격을 판단하는 방식도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서점에서 일하다 점주의 남편으로부터 욕설을 듣는 등 괴롭힘을 당한 박은진(가명·44)씨는 우울증을 앓다 회사를 그만뒀음에도 구직수당(실업급여)을 받을 수 없었다. 은진씨는 "회사를 다니던 시기 정신과 진료를 받은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우울증이 직장 내 괴롭힘 탓에 발병했다는 걸 인정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퇴사를 인정받지 못하면 자발적 퇴사가 돼 구직수당 자격도 얻기 어렵다. 은진씨는 "영세 사업장 직원이라는 이유로 직장 괴롭힘 진정도 못 넣는데 재직 기간 병원을 다니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구직수당까지 못 받게 하는 건 지나치다"고 호소했다.

장 노무사는 "근로기준법 및 시행령이 개정되기 전에도 노동청을 통해 가짜 5인 미만 사업장 등을 근로감독하고 행정지도할 필요가 있다"며 "행정 방식만 바뀌어도 노동자의 삶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노동부와 노동감독관 의지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대안들"이라고 강조했다.

송주용 기자 juyong@hankookilbo.com
강지수 기자 soo@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