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대구(15)임란 때 대구를 지킨 사람들은 누구
'사생취의’ 정신, 목숨보다 의로움 택한
315위 영남충의단서 의병의날 제향
영남의병, 한국 정신의 핵을 꽃피워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풍신수길)가 백년 계속된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뒤, 세계 최강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쳐들어왔지만 결국 "바다에서는 이순신, 육지에서는 의병들"의 활약 덕분에 참담한 실패를 겪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죽었고, 패전 이후 가문도 망했다. 도요토미가 "도대체 의병이 뭐냐? 내가 의병을 몰랐던 것이 실수"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는 임란의병 2만2천900명 중 절반 이상인 1만2천명이 영남의병들이다. 이 영남의병 가운데 315위가 대구 망우당공원 임란호국영남충의단에 모셔져 있다. 올해도 국가기념일인 의병의날(6월1일), 영남의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오늘에 이어받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결국 임란시기 대구를 지킨 이들은 누구일까. 우인수 경북대 명예교수(역사교육과)는 크게 △대구부사는 팔공산 동화사를 임시 거처로 하여 군사력 확보 유지 △낙재 서사원을 중심으로 의병 창의 △성주목 소속 화원현 우배선 의병부대의 활약 △현풍현 곽재우, 군위현 장사진, 의흥현 홍천뢰 의병의 활약 등을 꼽는다. 이 가운데 서사원의 의병 창의는 출발단계부터 관민협력체제가 잘 이루어진 점, 군역 대상이 아닌 양반과 천민 위주로 편성하여 관군과의 갈등 최소화하고, 면리를 기본단위로 장과 유사를 배치하여 대구부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을 통해 존재 자체만으로 일본군 견제효과와 함께 부민 생명과 재산보호에 효과적이었다고 판단했다.

◆동아시아를 넘어 16세기 가장 심각한 국제전, 임진왜란
일본은 당시 세계 최강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했으나 결국 패하면서 에도막부 시대로 넘어갔다. 중국은 조선원병으로 국력을 소진한 명나라를 대신한 청나라가 들어섰다. 조선은 종전 후 청나라와 불협화음으로 병자호란을 겪는 등 외침을 거듭 당하면서도 4백년 이상 더 이어갔다. 체제유지에 성공한 것이다. 광해군은 대동법 시행(1608년)으로 세금을 획기적으로 줄여 상공업 발전을 도모했고, 허준은 의학서적으로 첫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동의보감』(1610년)을 통해 민본주의를 실천했다. 영·정조는 임란 의병들이 목숨 걸고 지켜낸 이 땅에서 다시한번 문예부흥을 일으켰다.
1592년 4월13일(양력 5월23일, 이하 전부 음력)에 발발한 임진왜란 시 대구는 개전 8일만인 4월21일에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15만8천700명의 병력(선봉대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주장으로 하는 1번대 1만8천700명, 2번대는 가토오 기요마사를 주장으로 하는 2만2천800명, 3번대는 구로다 나가마사의 1만1천명, 수군 별도)으로 규슈에 집결한 일본군은 제1번대가 군선 700여척을 타고 부산포로 상륙하자말자 부산진과 동래성을 함락시켰다.
임란이 터진 다음해인 1593년에 훈련도감이 설치된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지만, 당시 조선군대는 상비군이 아니었다. "대부분 농사를 짓다가 당번이 되면 근무를 서던 방식"이라는 우 교수는 "경상도 지역의 방어 중책을 맡았던 이들은 창졸간에 당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워낙 대군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고 분석했다.

◆부산포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 장렬한 전사
관군은 유사시 각 고을 수령이 소속 군사를 이끌고 본진을 떠나 배정된 방어지역으로 가서 주둔하는 제승방략을 작동시켰다. 경상도 관찰사 김수는 4월15일 제승방략에 따라 경상도 군현 군사들을 대구로 집결시켰고, 다음날은 경상도 총동원령을 발령했다.

계명대 도서관 고문헌실에 보관된 낙재 서사원의 『낙재일기』 첫장을 보면 섬뜩하다. 대구 삼무회 회장 장인진 박사(문화재전문위원)는 "낙재일기 첫장, 12일 일기에 부산첨사의 상여가 뜰안에 놓이는 꿈을 꾸었다고 적혀있다"고 들려준다.
『낙재일기』는 1592년 4월12일에서 1595년 9월20일까지의 일기로 대구의병의 결성과정이 날짜별로 다음처럼 기록돼있다. 6월경 팔공산에서 창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6월27일에는 서사원, 류요신, 곽재명, 전사희, 서경익, 서사원의 집안 동생, 채응홍 등 대구의 유력 사족들이 모여 향병 모으는 일을 논의하고, 7월1일에는 격문 초고를 회람했다. 7월6일에는 부인사에서 향회가 열려 격문과 입약문을 확정하고, 18일에는 서사원을 향병대장으로 추대했다. 7월24일에는 대구의병의 격문을 경산으로 발송하는 등 창의소식을 널리 전했다.


대구부사는 흩어진 군졸 약 2천명을 모아서 거느리고 있었다. 6월17일에는 대구 관군이 경내로 들어온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적의 머리 17개를 취하고, 선달 박응성이 십여명을 죽인후 전사했다. 20일에는 관노 배개수와 문공이 사선을 뚫고 낙동강을 넘어 함양 순찰사에게 보고서를 전달했다. 당시 영리 이탁영은 "임란 3개월만에 경상좌도 사람 처음 보았다"고 한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대구부의 행정력이 작동하고 있었다고 우인수 교수는 판단했다.
7월8일 대구부사는 "하빈현 대장인 정여강과 도흥종은 왜적 11명을 사살하고, 승자총통과 왜총통을 각각 2자루, 환도 십여자루, 왜장의 철 투구와 안장 각 1부를 빼앗아 병사가 주둔하는 청송으로 보냈다. 왜선 8척이 하빈현에서 노략질하는 것을 정여강과 신영, 전 현감 박충후 등이 추격하였고, 수성현의 복병장 전계신·이윤의 등도 왜적5명을 사살하고 2명을 참수하였다"고 적고 있다.

서사원은 『낙재일기』에서 여러 가지 향병훈련, 군대점검, 부사와의 회동 등 의병활동을 적고 있으나 8월29일 조모가 사망하면서 의병장에서 물러났다. 낙재가 의병장에서 물러나자 모당 손처눌이 제2대 의병장이 되었다. 모당은 청호서원에 배향되고 있는데, 대구 연경서원에서 오래도록 강학한 대표적인 유림이다. 유림이 나라의 존망위기 앞에서 목숨 바쳐 나라살리기에 뛰어든 것이다. 대구 수성구 신천지 아파트 뒤편 일대 일직손씨 문중산에 묘소가 있는 모당 손처눌은 요충지 매복에 주력했다. 동생 손처약은 궁노수 70명을 이끌고 정현에 매복했다.


우배선은 1592년 5월 화원현에서 창의했는데 의병의 규모는 백여명 이상으로 커졌다.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1601년)되기 전이라 성주목 소속으로 독자 관사와 창고를 기반으로 화원현을 중심으로 낙동강, 금호강, 달천, 감물천, 비슬산, 최정산 등에서 맹약했다. 우배선은 지형지물에 익숙하여 기습·추격·야습·유인·복병 등 유격저술을 구사하면서 큰 공을 세워 합천군수, 김산군수, 경상좌수영 우후 등을 역임했고 선무원종 1등공신에 책록됐다.


◆선무공신 18인과 선무원종공신 9천60명

'단 18명'만 선무공신으로 정하고, 그외 기여자에게는 문을 닫아버리자 온나라가 시끄러워졌다. 그래서 다시 선무원종공신이 생겨났다. 선무원종공신은 임진왜란 때 전투에서 공을 세우거나 군수품 보급에 기여했으나 선무공신에 들지 못한 9천60명을 일컫는다. 1605년에 정해졌다. 임해군 등은 선무원종공신 1등, 첨사 황세득 등은 2등 공신, 관노 상경 등은 3등 공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무원종공신에는 종친부터 중앙관 · 지방관 · 허통(許通, 과거 응시를 허락받은 서얼) · 면역(免役, 군역이 면제된 양인) · 노비에 이르는 전 계층이 망라되어 있다.
침략 길목에 위치함으로서 무지막지한 피해를 입은 대구를 포함한 영남인들은 그대로 죽지않고, 절체절명의 시각에 의병으로 봉기했다. 의병은 왜군이 꿈에도 생각못한, 세계 독립전쟁사상 가장 자발적이고, 무력을 동원하여 직접 전쟁에 뛰어든 전무후무한 민족혼의 발로였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가 지하조직을 통한 첩보활동, 사보타쥬(파괴공작), 암살 등 비밀활동을 해왔다면 임란의병은 그보다 400여년이나 앞선 16세기에 향촌사회를 리더하던 유림들이 충의 정신으로 지역인력(군역이 면제된 양인인 면역, 노비 등)과 함께 손을 맞잡고 직접적인 무장투쟁을 했을 뿐만 아니라 관군과의 협력작전까지 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6월1일 의병의날, 오늘날 되살려야한 정신은
오는 6월1일은 국가기념일인 의병의 날이다. 6.3지방선거와는 상관없이 대구시는 이날 의병의날을 기념한다. 이날은 망우당 곽재우가 사재를 털어 경남 의령에서 첫 의병을 창의한 4월22일을 기념한 것이다. 임란호국영남충의단에 모셔져 있는 315위 영남의병들도 이날 시민들을 만난다. 임란의병이 존귀한 것은 군역의 의무가 없던 이들이 '사생취의'(捨生取義) 곧 목숨을 버려 의로움을 취한 그 정신이 구한말 의병으로 이어지고 광복군으로 계승되고 세계독립운동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오랜 독립전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임란의병의 정신은 대한민국의 존치와 성장의 '숨은 핵'이다.
최미화 기자 cklala@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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