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대구(15)임란 때 대구를 지킨 사람들은 누구

최미화 기자 2026. 5. 1.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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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재 서사원, 모당 손처눌, 우배선 등
'사생취의’ 정신, 목숨보다 의로움 택한
315위 영남충의단서 의병의날 제향
영남의병, 한국 정신의 핵을 꽃피워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킨 영남의병 315위가 모셔져 있는 대구 망우당공원 임란호국영남충의단. 최미화 기자
영남이 호국의 성지가 된 역사는 이미 444년 전 임진왜란 때 시작됐다. 임진왜란은 조선·일본·명나라 등 동아시아 3국의 총력전을 넘어 16세기에 가장 심각한 국제전으로 조선에 엄청난 인적·물적·문화적 파괴를 몰고온 '7년 전쟁'(정유재란 포함)이다. 이 임란 와중에 세계전쟁사에서 듣도 보도 못하던 '의병'들이 출현, 조선을 구하고 민족혼을 살렸다.
조선의병의 무기. 병역의 의무가 없는 유림과 천민 등이 나라를 살리겠다는 거룩한 마음으로 목숨을 내걸며 기꺼이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임란호국영남충의단 전시관 중 일부 재촬영.
◆도대체 의병이 뭐야?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미치게 만든 의병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풍신수길)가 백년 계속된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뒤, 세계 최강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쳐들어왔지만 결국 "바다에서는 이순신, 육지에서는 의병들"의 활약 덕분에 참담한 실패를 겪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죽었고, 패전 이후 가문도 망했다. 도요토미가 "도대체 의병이 뭐냐? 내가 의병을 몰랐던 것이 실수"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는 임란의병 2만2천900명 중 절반 이상인 1만2천명이 영남의병들이다. 이 영남의병 가운데 315위가 대구 망우당공원 임란호국영남충의단에 모셔져 있다. 올해도 국가기념일인 의병의날(6월1일), 영남의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오늘에 이어받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임란호국영남충의단 전시관에는 임진왜란 발발 요인, 전쟁경로, 의병 창의,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 활약상 등이 그려져 있다. 최미화 기자
◆임란시기 대구를 지킨 서사원, 우배선, 곽재우, 장사진, 홍천뢰
결국 임란시기 대구를 지킨 이들은 누구일까. 우인수 경북대 명예교수(역사교육과)는 크게 △대구부사는 팔공산 동화사를 임시 거처로 하여 군사력 확보 유지 △낙재 서사원을 중심으로 의병 창의 △성주목 소속 화원현 우배선 의병부대의 활약 △현풍현 곽재우, 군위현 장사진, 의흥현 홍천뢰 의병의 활약 등을 꼽는다. 이 가운데 서사원의 의병 창의는 출발단계부터 관민협력체제가 잘 이루어진 점, 군역 대상이 아닌 양반과 천민 위주로 편성하여 관군과의 갈등 최소화하고, 면리를 기본단위로 장과 유사를 배치하여 대구부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을 통해 존재 자체만으로 일본군 견제효과와 함께 부민 생명과 재산보호에 효과적이었다고 판단했다.
망우당 공원에 들어선 홍의장군 곽재우 동상.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령에서 첫 의병을 창의했고, 정암진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곡창지대인 호남지역 보호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최미화 기자

◆동아시아를 넘어 16세기 가장 심각한 국제전, 임진왜란
일본은 당시 세계 최강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했으나 결국 패하면서 에도막부 시대로 넘어갔다. 중국은 조선원병으로 국력을 소진한 명나라를 대신한 청나라가 들어섰다. 조선은 종전 후 청나라와 불협화음으로 병자호란을 겪는 등 외침을 거듭 당하면서도 4백년 이상 더 이어갔다. 체제유지에 성공한 것이다. 광해군은 대동법 시행(1608년)으로 세금을 획기적으로 줄여 상공업 발전을 도모했고, 허준은 의학서적으로 첫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동의보감』(1610년)을 통해 민본주의를 실천했다. 영·정조는 임란 의병들이 목숨 걸고 지켜낸 이 땅에서 다시한번 문예부흥을 일으켰다.

◆침략의 길목, 대구는 8일만에 적의 수중에
1592년 4월13일(양력 5월23일, 이하 전부 음력)에 발발한 임진왜란 시 대구는 개전 8일만인 4월21일에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15만8천700명의 병력(선봉대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주장으로 하는 1번대 1만8천700명, 2번대는 가토오 기요마사를 주장으로 하는 2만2천800명, 3번대는 구로다 나가마사의 1만1천명, 수군 별도)으로 규슈에 집결한 일본군은 제1번대가 군선 700여척을 타고 부산포로 상륙하자말자 부산진과 동래성을 함락시켰다.
임란이 터진 다음해인 1593년에 훈련도감이 설치된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지만, 당시 조선군대는 상비군이 아니었다. "대부분 농사를 짓다가 당번이 되면 근무를 서던 방식"이라는 우 교수는 "경상도 지역의 방어 중책을 맡았던 이들은 창졸간에 당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워낙 대군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고 분석했다.
영남의병이 활동한 곳은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의 정암진 대첩, 권응수 의병장의 지휘로 왜군에 점령당했던 영천성을 탈환한 영천성 수복, 박진이 이끄는 관군과 정세아 최인제 등 의병이 연합하여 왜군을 물리친 경주성 수복, 김면 의병군이 지례에 있던 왜군을 소탕한 지례 전투, 전라도로 넘어가려던 왜군 2만여명을 김시민 등 의병과 관군이 격퇴한 진주성 대첩 등이 있다. 전시관 촬영.

◆부산포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 장렬한 전사

"다만 최전방의 부산포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이 끝까지 항전하다가 성의 함락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는 우 교수는 이후 일본군 1번대는 동래에서 양산을 거쳐 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를 짓밟고 조령을 넘어 충주 여주 양근을 거쳐 경성으로, 2번대가 동래에서 울산을 거쳐 경주-영천-신녕-의흥-군위-비안-용궁을 제압한 뒤 조령을 거쳐 충주 죽산 용인 경성으로 올라갔다. 마지막 3번대는 동래에서 김해를 거쳐 성주-무계-지례-김산을 제압한 뒤, 추풍령을 거쳐 영동 청주 경기도로 진격했다.
관군은 유사시 각 고을 수령이 소속 군사를 이끌고 본진을 떠나 배정된 방어지역으로 가서 주둔하는 제승방략을 작동시켰다. 경상도 관찰사 김수는 4월15일 제승방략에 따라 경상도 군현 군사들을 대구로 집결시켰고, 다음날은 경상도 총동원령을 발령했다.
의병의날, 임란호국영남충의단에서 315위 영남의병에 대해 예를 갖추고 있다. 충의단전시관 홍보팜플렛 재촬영
◆낙재 서사원의 창의와 대구의병 결성과정 기록
계명대 도서관 고문헌실에 보관된 낙재 서사원의 『낙재일기』 첫장을 보면 섬뜩하다. 대구 삼무회 회장 장인진 박사(문화재전문위원)는 "낙재일기 첫장, 12일 일기에 부산첨사의 상여가 뜰안에 놓이는 꿈을 꾸었다고 적혀있다"고 들려준다.
『낙재일기』는 1592년 4월12일에서 1595년 9월20일까지의 일기로 대구의병의 결성과정이 날짜별로 다음처럼 기록돼있다. 6월경 팔공산에서 창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6월27일에는 서사원, 류요신, 곽재명, 전사희, 서경익, 서사원의 집안 동생, 채응홍 등 대구의 유력 사족들이 모여 향병 모으는 일을 논의하고, 7월1일에는 격문 초고를 회람했다. 7월6일에는 부인사에서 향회가 열려 격문과 입약문을 확정하고, 18일에는 서사원을 향병대장으로 추대했다. 7월24일에는 대구의병의 격문을 경산으로 발송하는 등 창의소식을 널리 전했다.
계명대 도서관 고문헌실에 보관된 『낙재일기』. 장인진 박사(대구 삼무회 회장, 문화재전문위원) 제공.
대구부 향병장 및 유사분정기에 따르면 대구의병 대장은 서사원, 공사원 이주, 유사 이경원·채선행이었다. 수성현 대장은 손처눌, 해안현 오면도대장은 곽재겸, 하빈현 대장(겸 서면)은 이종문, 읍내는 하자호(용덕리)·김우형(북산리)·여빈주(무태리)·서득겸(달지리)·서사술(초동리)·배익수와 채응홍(이동리)·설번(신서촌) 등이 나누어 맡았다. 대구부 의병진은 면리별로 이장과 유사(有司)를 편성한 체제였다.
부산포첨사 정발의 상여가 들어오는 것을 꿈에 봤다고 적혀있는 낙재 서사원의 낙재일기 1592년 4월12일자 부분. 장인진 박사 제공.
◆대구 관군의 활동
대구부사는 흩어진 군졸 약 2천명을 모아서 거느리고 있었다. 6월17일에는 대구 관군이 경내로 들어온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적의 머리 17개를 취하고, 선달 박응성이 십여명을 죽인후 전사했다. 20일에는 관노 배개수와 문공이 사선을 뚫고 낙동강을 넘어 함양 순찰사에게 보고서를 전달했다. 당시 영리 이탁영은 "임란 3개월만에 경상좌도 사람 처음 보았다"고 한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대구부의 행정력이 작동하고 있었다고 우인수 교수는 판단했다.
7월8일 대구부사는 "하빈현 대장인 정여강과 도흥종은 왜적 11명을 사살하고, 승자총통과 왜총통을 각각 2자루, 환도 십여자루, 왜장의 철 투구와 안장 각 1부를 빼앗아 병사가 주둔하는 청송으로 보냈다. 왜선 8척이 하빈현에서 노략질하는 것을 정여강과 신영, 전 현감 박충후 등이 추격하였고, 수성현의 복병장 전계신·이윤의 등도 왜적5명을 사살하고 2명을 참수하였다"고 적고 있다.
사생취의의 정신으로 목숨을 버리고 의로움을 택해 나라를 살린 영남의병 315분 위패가 모셔져 있는 임란호국영남충의단. 최미화 기자
◆대구 제2대 의병장은 모당 손처눌
서사원은 『낙재일기』에서 여러 가지 향병훈련, 군대점검, 부사와의 회동 등 의병활동을 적고 있으나 8월29일 조모가 사망하면서 의병장에서 물러났다. 낙재가 의병장에서 물러나자 모당 손처눌이 제2대 의병장이 되었다. 모당은 청호서원에 배향되고 있는데, 대구 연경서원에서 오래도록 강학한 대표적인 유림이다. 유림이 나라의 존망위기 앞에서 목숨 바쳐 나라살리기에 뛰어든 것이다. 대구 수성구 신천지 아파트 뒤편 일대 일직손씨 문중산에 묘소가 있는 모당 손처눌은 요충지 매복에 주력했다. 동생 손처약은 궁노수 70명을 이끌고 정현에 매복했다.
대구의 제2대 의병장 모당 손처눌의 묘소는 대구시 수성구 무학산에 있다. 최미화 기자
동절기에는 병기 제조를 독려했다. 모당은 일본군을 직접 공격하여 소탕할 수 없는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대구지역 면리장을 달성에 모아 복병에 대한 일을 논의했다. 모당 역시 1593년 2월 부친상을 당하여 의병장을 내려놓았다.
모당 손처눌 유적기념비. 모당에 대한 행장은 일헌 이완재 영남대 명예교수가 썼다. 최미화 기자.
◆우배선 의병부대의 활약
우배선은 1592년 5월 화원현에서 창의했는데 의병의 규모는 백여명 이상으로 커졌다.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1601년)되기 전이라 성주목 소속으로 독자 관사와 창고를 기반으로 화원현을 중심으로 낙동강, 금호강, 달천, 감물천, 비슬산, 최정산 등에서 맹약했다. 우배선은 지형지물에 익숙하여 기습·추격·야습·유인·복병 등 유격저술을 구사하면서 큰 공을 세워 합천군수, 김산군수, 경상좌수영 우후 등을 역임했고 선무원종 1등공신에 책록됐다.
월곡역사박물관 마당에서 만날 수 있는 월곡 우배선 장군상. 우배선은 가는 곳마다 큰 전과를 올려 선무원종일등공신에 올랐다. 최미화 기자
『성주화원의병군공책』에 따르면 총 89명의 군공 전투시기와 전투지까지 자세하게 기록되고 있는데, 참살 63명, 사살 604명, 작살 110명 등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우배선 의병부대는 △비슬산 복병 설치 수십명 참살(1592년 6월) △낙동강 여울 수십명 참살 또는 사살(1592년 7월) △조암에서 적 격파, 대구에 복병 설치(1592년 10월) △현풍현 쌍산역에서 적 대파, 화원에서 접전 △대구 주둔 일본군의 화원 분탕에 달성에서 접전(1592년 12월) △팔조령에서 접전, 곽재우와 화원현에서 회동(1593년 1월) △대구의 적 야습(1593년 2월) △조암에서 대접전(1593년 3월) △명군 남하 군량 마초 마련, 대구향교 적 야습(1593년 4월) △대구의 적 야습(1593년 5월) 등이 있다.
대구시 동구 망우당공원에 있는 망우당기념관에 평일에도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최미화 기자

◆선무공신 18인과 선무원종공신 9천60명

임진란 내내 왕으로서의 위엄이나 지략 솔선수범을 보이지 않았던 선조는 공색책록에서도 꽤 쪼잔하게 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각 방면에서 공을 세운 딱 18명에 대해서만 선무공신으로 1604년에 결정했다. 공신으로 결정하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고, 세세대대 기려주는 보훈조차 제대로 하지 않으면 누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질 것인가? 선무공신 중 1등은 이순신(李舜臣)·권율·원균 등 3인, 2등은 신점·권응수·김시민·이정암·이억기 등 5인, 3등은 정기원·권협·유사원·고언백·이광악·조경·권준·이순신(李純信)·기효근·이운룡 등 10인이다.
선무원종공신 9천60명을 기록하고 있는 『선무원종공신녹권』.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단 18명'만 선무공신으로 정하고, 그외 기여자에게는 문을 닫아버리자 온나라가 시끄러워졌다. 그래서 다시 선무원종공신이 생겨났다. 선무원종공신은 임진왜란 때 전투에서 공을 세우거나 군수품 보급에 기여했으나 선무공신에 들지 못한 9천60명을 일컫는다. 1605년에 정해졌다. 임해군 등은 선무원종공신 1등, 첨사 황세득 등은 2등 공신, 관노 상경 등은 3등 공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무원종공신에는 종친부터 중앙관 · 지방관 · 허통(許通, 과거 응시를 허락받은 서얼) · 면역(免役, 군역이 면제된 양인) · 노비에 이르는 전 계층이 망라되어 있다.

◆임란의병, 한말의병과 독립군,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침략 길목에 위치함으로서 무지막지한 피해를 입은 대구를 포함한 영남인들은 그대로 죽지않고, 절체절명의 시각에 의병으로 봉기했다. 의병은 왜군이 꿈에도 생각못한, 세계 독립전쟁사상 가장 자발적이고, 무력을 동원하여 직접 전쟁에 뛰어든 전무후무한 민족혼의 발로였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가 지하조직을 통한 첩보활동, 사보타쥬(파괴공작), 암살 등 비밀활동을 해왔다면 임란의병은 그보다 400여년이나 앞선 16세기에 향촌사회를 리더하던 유림들이 충의 정신으로 지역인력(군역이 면제된 양인인 면역, 노비 등)과 함께 손을 맞잡고 직접적인 무장투쟁을 했을 뿐만 아니라 관군과의 협력작전까지 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월곡역사박물관은 월곡 우배선 의병장에 관한 수많은 유물과 유적을 수장, 전시하고 있다. 최미화 기자

◆6월1일 의병의날, 오늘날 되살려야한 정신은
오는 6월1일은 국가기념일인 의병의 날이다. 6.3지방선거와는 상관없이 대구시는 이날 의병의날을 기념한다. 이날은 망우당 곽재우가 사재를 털어 경남 의령에서 첫 의병을 창의한 4월22일을 기념한 것이다. 임란호국영남충의단에 모셔져 있는 315위 영남의병들도 이날 시민들을 만난다. 임란의병이 존귀한 것은 군역의 의무가 없던 이들이 '사생취의'(捨生取義) 곧 목숨을 버려 의로움을 취한 그 정신이 구한말 의병으로 이어지고 광복군으로 계승되고 세계독립운동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오랜 독립전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임란의병의 정신은 대한민국의 존치와 성장의 '숨은 핵'이다.

최미화 기자 cklala@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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