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스러운 침묵의 세계로… “손으로 마음의 문 열죠”
농인 배우 박지영·이소별

무대 위에서 오가는 것은 음성이 아닌 역동적인 손짓과 표정, 그리고 고유한 호흡. 소리가 비워진 자리를 ‘보는 언어’ 수어(手語)가 빚어낸 또 다른 감각이 채운다. 30일 서울 충정로 모두예술극장에서 개막한 국립어린이청소년극단의 ‘영지’는 익숙하게 여겨온 공연의 문법을 뒤집는 수어 연극이다.
지금까지의 ‘배리어프리(barrier-free) 공연’은 ‘청인(聽人·들을 수 있는 비장애인)’을 중심에 두고 장애인의 관람 장벽을 낮추는 방식. 하지만 ‘영지’의 주역은 온전히 농인(聾人·청각장애인) 배우들이다. 수어가 무대 위 주(主)언어이고, 청인 관객들을 배려해 소리꾼 한 명이 ‘게으른 해설사’로 무대에 오른다. 청인들을 농인의 세계로, 낯설지만 매혹적인 시각 언어의 ‘영지 유니버스’로 초대하는 셈이다.
개막을 앞두고 만난 이 세계의 두 주인공 박지영과 이소별 배우는 “농인 배우들이 같이할 수 있는 귀한 기회라 참여했는데, 열한 살 아이 역할을 맡게 될 줄은 몰랐다. ‘아뿔사!’ 생각했다”며 웃었다.
연극 ‘영지’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들만 있는 ‘병목안’이라 불리는 완벽한 세계에, 별난 아이 영지가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농인 문화 특유의 디테일은 무대 위 웃음 포인트가 됐다. 극 중 어른이 아이들을 혼내며 “어디 감히 어른 눈을 똑바로 봐!”라고 다그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청인 아이라면 고개를 푹 숙이겠지만, 농인들은 시선을 피하면 대화가 끊긴다. 박씨는 “그래서 시선을 살짝 피했다가 억울한 듯 다시 눈을 치켜뜨는 방식을 취해 농인만의 개그 코드로 바꿨다”며 웃었다.
박씨는 2022년 농인 배우 최초로 백상예술대상 연극 연기상 후보에 올랐던 베테랑 배우. 주인공 ‘영지’를 맡았다. 그는 “영지는 단 1분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체력이 엄청난 아이”라며 “열한 살 아이의 에너지를 감당하기 위해 배우들이 연습실에 모이면 일단 플랭크와 복근 운동부터 하며 체력을 다진다”며 또 웃었다. “어렸을 때의 자신, 혹은 내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영지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봐주셨으면 해요.”
이소별은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별이’ 역으로 얼굴을 알렸다. ‘영지’에선 마을의 마스코트 같은 아이 ‘효정’ 역을 맡았다. 순종적인 아이였던 효정은 영지를 만나며 변하기 시작한다. 그 역시 농인에 대한 편견을 깨고 자신만의 언어를 찾았던 경험이 있다.
“가족 중 저만 농인이었어요. 소심하고 말 없던 아이였는데, 뒤늦게 수어를 배우면서 거짓말처럼 말이 많아졌어요. 연극 속에서 물 밖으로 나온 어린 물고기가 ‘나에게도 투명 다리가 있었어!’라고 외치는 대목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어릴 적 주변 분들은 ‘쟤가 사회생활이나 할 수 있겠어?’ 하며 걱정하셨지만, 저는 이제 당당한 배우가 됐으니까요.”
청인 관객들에게 수어 연극의 무대 위 침묵은 낯설지 않을까. 두 사람은 “마음을 열고 낯섦 자체를 경험해보면 어떨까”하고 조심스레 제안했다.
“예전엔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이 화면을 가린다고 꺼렸지만, 요즘은 자막이 있는 동영상을 보는 게 자연스러워졌죠. 수어 연극이 처음엔 낯설 수 있지만, 농인들이 시각 언어로 뿜어내는 에너지를 새로운 연극의 형태로 경험해 주셨으면 합니다.”(이소별) “마음의 문을 열고 공감하려 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소리의 유무를 떠나 눈을 조금 더 크게 열고 시각적으로 몰입하다 보면, 언어가 달라도 분명 맞닿는 감각을 발견하실 거예요!”(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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