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로맨스 표준, '집돌이 너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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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센스] 날카로운 전문성, 퇴근 후엔 철저한 고립. 최근 대중문화 속 남주인공의 키워드는 '집돌이 너드남(nerd+男, 지적이지만 어딘가 서툰 매력을 지닌 인물)'이다. <유미의 세포들3>의 신순록(김재원 분), <월간남친>의 박경남(서인국 분), <만약의 우리>의 이은호(구교환 분), <그 해 우리는>의 최웅(최우식 분)이 그 주인공. 이제 남성 캐릭터의 매력은 구원이 아니라, 결핍과 일상의 결에서 만들어진다.
집돌이 너드남에게는 전문성과 빈틈이 공존한다. 대표적 특징은 특정 분야에서만 능력을 발휘하고 사교성이나 연애의 기술은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이다. <유미의 세포들3>의 신순록은 편집자로서 날카로운 전문성을 발휘하지만 퇴근과 동시에 모든 사회적 에너지를 차단한다. 그는 호감을 감추고 업무상의 이유인 척 "영화를 함께 보자"는 김유미(김고은 분)의 제안에 "영화는 혼자 보는 것을 좋아한다"며 거절한다. 이는 무례함이 아니라 스스로 정서적 에너지를 관리하는 너드남 특유의 솔직함이다.
또 다른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의 최웅은 사회생활이나 대인관계에 무력한 모습을 보이지만 작업실 안에서 펜을 쥐었을 땐 건물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압도적인 전문성을 발휘한다. <월간남친>의 박경남은 커리어로 혼란을 겪는 서미래(지수 분)의 문제를 대신 해결하는 대신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때가지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집돌이 너드남에게는 상대의 영역을 존중하는 배려, 여주인공의 삶을 방해하지 않는 수평적 파트너십이 존재한다.

이상형 계보 '백마탄 왕자ㆍ나쁜남자ㆍ엄친아로'
대중문화 속 로맨스에서는 이상형 계보가 있다. 90년대 백마 탄 왕자가 고도 성장기의 계층 이동 판타지였다면, 2000년대 나쁜남자는 여성의 심리적 정복 서사였다. 이후 등장한 '엄친아'는 무한 경쟁 사회 속 완벽한 인간에 대한 동경이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에는 '백마탄 왕자'가 인기였다. 여전히 회자되는 KBS2 드라마 <가을동화> 속 원빈의 "얼마면 돼?"라는 대사는 당시 여성들의 판타지를 자극한 한 마디였다. 재벌 2~3세인 남자주인공이 절대적 자본으로 가난한 여주인공을 구원하는 것은 경제적 급성장을 이룬 시기에 로맨스로 계층 이동이 가능하다는 판타지의 실현이었다.
흐름은 '나쁜남자'로 이동했다. 배우 김태희의 남편으로 가정적 면모를 드러내는 가수 비는 2005년 스스로 "나쁜남자"라고 노래하며, 인기 가수 반열에 올랐다. 또 같은 해 최고 시청률 50%를 기록한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은 30세에 불과한 김삼순(김선아 분)에게 "노처녀"라고 구박하지만 내면의 상처가 깊은 현진헌 역의 현빈을 초대박 스타로 만들었다. 권위적이지만 결핍이 있는 까칠한 재벌남이 여주인공과 로맨스로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보는 이들의 보살핌 본능을 자극했다.

'까칠한 재벌남'의 출발점으로 꼽히는 현진헌은 무례함 뒤에 결핍을 숨긴 인물로, 이후 '차도남' 캐릭터로 이어졌다. 겉으로는 완벽한 능력과 철저한 자기관리를 갖췄지만, 사적인 영역에서는 감정적으로 결핍된 인물이다. 당시 대중은 이를 단순한 무례함이 아니라 능력과 성공의 또 다른 표현으로 받아들였다. 고급 슈트와 외제차 같은 요소들도 이러한 이미지를 강화했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현빈 분)이 남긴 "이탈리아 장인이 한땀한땀 정성스럽게 만든 트레이닝복"이라는 대사는 당시 '성공한 남성상'에 대한 욕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학벌과 재력이 계층 이동의 핵심 조건으로 작동하던 시기,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의 준말)'가 이상형으로 떠올랐다. 무한 경쟁 속에서 완성형 인간으로 소비된 '엄친아'는 학벌, 재력, 매너를 모두 갖춘 인물로,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을 대리 충족시키는 동시에 가족의 기대까지 만족시키는 존재였다. 자본주의적 성공과 전통적 효의 가치가 결합된 캐릭터인 셈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완벽한 설정은 거리감과 피로를 낳았고, 오히려 빈틈을 드러내는 인물이 더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바로 너드남이다.

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다만 내 곁을 지켜주세요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연애의 기준도 달라졌다. 고용과 소득의 불안정, 치솟는 주거비,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 같은 현실적 압박 속에서 감정을 강하게 소모하는 관계보다, 부담 없이 오래 유지되는 관계가 더 선호된다. 사랑이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면서, 안정감과 거리 조절이 중요한 요소가 됐다.
이 흐름에서 '집돌이 너드남'은 장점이 분명하다. 생활 반경이 단순하고, 타인의 삶에 과하게 개입하지 않는다. 예측 가능하고 조용한 리듬을 유지하는 관계를 만들기 쉽다. '따로 또 같이'를 지향하는 현대인의 개인주의적 가치관과도 맞닿아 있다.
결국 2026년 너드남의 인기 이유는 단순하다. 덜 피곤한 관계. 서로를 바꾸기보다 각자의 생활을 유지하는 방식. 지금의 로맨스는 감정보다 균형에 가깝다. 구원 서사가 사라진 자리에서, 방해하지 않는 사랑이 새로운 표준이 되고 있다.
김지은 기자 a051903@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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