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범람하는 물, 쏟아지는 빛
크고 작은 고통에 빠진 인물 조명
엄마의 비극 속 아이의 용기·믿음
풀어보지 않은 ‘선물’이라는 희망
베로니크 오발데 ‘범람하는 물’(‘한낮의 불운’에 수록, 이세진 옮김, 다산책방)

운하에서 불어난 물이 도로 곳곳까지 범람하고 있다. 젤리는 차창 밖을 보며 생각한다. 이게 실개천이면 좋아할 수 있겠다고. 언젠가 할머니가 이런 말을 해주었다. 어떤 사나운 강물이라도 시작은 가느다란 실개천이라고, 너도 한 걸음으로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그런 실개천. 그러나 지금 범람하는 물은 그 정도가 아니다. 게다가 여느 때처럼 엄마는 친구의 생일 선물로 준비한 게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고 아침에 아기 아빠, 할머니와 싸운 일 때문인지 꺼이꺼이 울고 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엄마는 친구 엄마에게 아기까지 맡아달란 부탁을 하고는 차를 몰고 가버렸다.
오늘 하루를 잘 보낼 수 있을까. 젤리는 자신도 용기도 없다. 다행히 그 집에 모인 친구들, 엄마들에게 아기는 관심을 끌었다. 생일파티의 마스코트처럼.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사람들은 곧 아기에게 싫증이 났고 선물을 뜯어볼 시간이 되자 아기와 젤리 둘만 남았다. 젤리는 동생을 데리고 커다란 식탁 밑으로 들어가 앉았다.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식탁보가 자신을 보호해 주는 것 같아서. 젤리는 때로 아기를 보살피고 엄마를 보살피는데, 지금 이 격리실 같은 식탁 아래에선 아기를 달래고 자기 자신을 달랜다.
친구 엄마가 식탁보를 걷어 올렸을 때는 삶이 달라져 있었다. 잠에서 깬 젤리가 느끼기에 생일잔치의 분위기, 사람들이 자신과 동생을 보는 눈도 바뀌었다. 머뭇거리더니 친구 엄마가 말했다. 할머니가 너희들을 데리러 오실 거라고. 뭔가 잘못되었다고 젤리는 알아차린다. 할머니는 운전을 못 하니까. 젤리는 묻고 싶다. 엄마는요? 그날, 그 비 오는 날, 젤리는 처음으로 택시를 탔다. 그리고 오랫동안 자신이 하게 될 생각들이 머리와 가슴으로 범람하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미끄러지면서 물속으로 가라앉는 순간 엄마가 떠올린 건 무엇이었을까. 차에 젤리와 아이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여겼을까 아닐까. 너무 물이 많았고 “눈물이고 빗물이고 죄다 넘쳐흘렀고, 젤리의 마음마저” 그랬던 날.
젤리는 그 하루를, 그 고통과 불행을 어떻게 견디려고 했나. 시작은 이것이다. 그 일이 일어나는 순간, 엄마는 거기에 혼자 있어서 하느님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을 거라 믿기. 그리고 살아남은 젤리의 마음. 그건 그날 아직 풀어보지도 못했고 엄마가 친구 집에 내려줄 때 잊고 간 미지의 생일 선물과 비슷하다고 여기기. “소중하고 헤아릴 수 없는 그 무엇, 망가지지 않고 실망스럽지도 않은 그 무엇”과 같은 마음. 젤리는 살아야 한다고, 아마도 그렇게 자신을 보살피고 달랜 것은 아닐까. 불행을 풀어보지 않은 선물로 바꾸려는 노력. 받아들이기 어렵고 납득할 수도 없는 순간들을 이해하지 않으면 삶은 견딜 만해지지 않을 테니.
갑자기 찾아온 한 불행 앞에서 나도 문득 믿고 싶어진다. 삶에는 지금처럼 범람하는 물도 있고 쏟아지는 빛도 있을 거라고, 언젠가.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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