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그린 ‘아르데코의 여왕’···그 모순의 삶을 무대서 그려

노정연 기자 2026. 4. 30.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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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렘피카’
“내게 예술은 살아남는 것”뮤지컬 <렘피카>의 공연 장면. 놀유니버스 제공

폴란드 출신 실존 화가의 일대기
한국서 3월 초연, 6월까지 공연

“날 화산 속에 넣어줘. 난 다이아몬드가 되고 싶어!”

무대 위 붓을 든 여인의 외침이 서슬 퍼런 칼날처럼 객석을 파고든다. 삶의 회한과 집념을 담은 독백은 마치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이름 없이 사라지지 않겠다는 처절한 선언처럼 들린다.

지난 3월 한국 초연이자 아시아 첫 무대로 막을 올린 뮤지컬 <렘피카>는 20세기 초 아르데코 미술의 정점을 찍었던 폴란드 출신 화가 타마라 드 렘피카(1898~1980)의 삶을 조명한다. 2024년 브로드웨이 초연 당시 ‘문제작’으로 주목받은 이 작품은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의 일대기를 그렸지만 영웅담이나 위인극과는 거리가 멀다. 렘피카의 삶과 예술, 그리고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했던 주인공의 복잡한 욕망을 대담하고 강렬한 색채로 무대 위에 펼쳤다.

이야기는 1975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과거 자신의 결혼식 날을 회상하는 노년의 타마라로부터 시작된다. 1916년 제정 러시아, 부유한 상인 집안의 딸로 자란 타마라는 귀족 남편과 결혼식을 올리지만, 환희로 가득했던 시간은 이내 혁명의 불길에 휩싸인다. 감옥에 갇힌 남편을 구해내 파리로 망명한 그를 맞이하는 건 이방인으로서의 고단한 삶이었다. 무기력에 빠진 남편과 어린 딸을 부양해야 했던 타마라는 생존을 위해 붓을 든다.

작품은 타마라가 상류층의 욕망을 간파해 ‘렘피카’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얻는 여정을 강렬한 음악과 감각적인 무대 미학으로 그려낸다. 재즈와 팝, 전자음악과 테크노 비트를 오가며 질주하는 사운드는 낯설면서도 중독적이다.

장식을 덜어낸 아르데코풍 세트는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에펠탑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철제 구조물과 사방으로 뻗은 계단, 직선과 곡선이 교차하는 무대는 그 위를 가로지르는 인물들의 욕망과 불안을 한층 선명하게 부각한다. ‘녹색 부가티를 탄 자화상’ ‘아름다운 라파엘라’ 등 무대 전면에 투사되는 렘피카의 대표 작품들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20세기 초, 전쟁이 끝나고 격변의 시기를 맞이한 인물들은 기술과 기계, 속도의 미학을 외치며 내달리지만, 극의 중심에는 욕망과 사랑이 놓여 있다.

렘피카는 가정을 지키고 싶어 하면서도, 자신의 예술적 영감을 깨우는 뮤즈 라파엘라를 탐닉하며 도덕적 경계를 넘나든다. 고난과 역경을 딛고 집안을 일으킨 ‘굳센 여성’이라는 익숙한 서사를 비켜선 지점, 바로 그 모순과 균열이 인물을 더욱더 생생하게 만든다.

개막을 앞두고 내한했던 연출가 레이첼 차브킨은 브로드웨이 공연 당시 작품이 평단으로부터 엇갈린 평가를 받았던 것을 두고 “많은 비평가, 특히 남성 비평가들이 여성의 서사 안에서 남성이 특정 기능을 하지 않는 이야기를 낯설어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직 자신의 욕망과 예술만을 동력 삼아 전진하는 여성의 모습이 기성 평단에는 불편함으로 다가갔다는 해석이다.

렘피카 역의 김선영은 “평범했던 사람이 극한 상황 속에서 평범함을 거부하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며 “모순된 인물이지만 끝까지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김선영을 비롯해 박혜나·정선아(렘피카 역), 차지연·린아·손승연(라파엘라 역) 등 국내 정상급 배우들이 각기 다른 해석으로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렘피카에게 예술은 전쟁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도, 세상을 바꾸는 도구도 아니었다. 오직 바꿀 수 있는 건 네모난 캔버스뿐이라고 되뇌며 그 모든 시간을 살아낸 노년의 렘피카는 관객들을 향해 읊조린다. “내게 예술은 살아남는 것”이라고. 공연은 6월21일까지 코엑스아티움 우리은행홀에서 이어진다.

노정연 기자 dana_f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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