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같은 한류가 아니다…가까울수록 멀어지는 '한류의 역설' [더 라이프이스트-홍재화의 매트릭스로 보는 세상]

2026. 4. 30.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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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지난달 21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정규 5집 '아리랑'(ARIRANG) 발매를 기념해 무료 공연 'BTS 컴백 라이브: 아리랑'(BTS THE COMEBACK LIVE|ARIRANG)을 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한류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다 같은 한류가 아니다. 유럽과 미국에서 한류는 '신선한 동아시아 문화'로 단순하게 소비된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역사·정치·민족감정과 얽혀 훨씬 복잡하게 작동한다. 'K뷰티 수입 1위'와 '혐한 시위'가 공존하는 일본이 있고, 9년간의 '한한령(限韓令)'이 풀리자마자 '한일령(限日令)'이 들어서는 중국도 있다. 베트남에서는 한류 1위 자리와 반한류 담론이 같은 신문 지면에 실린다. 한류 산업이 다음 단계로 가려면 이 '비대칭'을 이해해야 한다.

한류를 둘러싼 가장 흔한 오해는 "한류는 어디서나 통한다"는 것이다. 빌보드 1위, 넷플릭스 글로벌 차트, 아카데미 시상식 같은 통계만 보면 그럴듯하다. 그러나 같은 방탄소년단(BTS) 음반이 미국에서는 그저 좋은 팝이고, 일본에서는 정치 사안이며, 중국에서는 외교 카드가 된다. 이 차이가 가장 또렷한 곳이 동아시아다. 거리상 가장 가깝고 문화적으로 가장 닮은 이웃들이, 정작 한류에 대해서는 가장 어긋나는 반응을 보내는 것이다.

2024년 일본향 한국 화장품 수출은 8억4000만달러를 기록하며 프랑스를 제치고 일본 화장품 수입 시장 1위에 올랐다. 한국 라면은 도쿄 편의점의 고정 상품이 됐다. '칸비니(韓ビニ)'라는 한국 편의점 체인은 24개 매장으로 확장했다. 동시에 도쿄 시내에서 정기적으로 혐한 시위가 열리는가 하면 일본 보수 매체는 K팝을 '문화 침공'으로 규정한다.

이 모순은 일본 사회의 분열이 아니라 일본 사회 자체의 구조다. 정치·역사 영역과 일상 소비 영역이 분리돼 있고, 두 영역의 한국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 일본의 청년 세대는 한국 콘텐츠를 자국 콘텐츠와 거의 차이를 두지 않고 소비하면서도 독도·위안부 이슈에 대해선 부모 세대와 비슷한 입장을 유지한다. 한류가 만든 친근감이 정치적 화해로 이어지진 않는다.

중국은 더 극적으로 변화한다. 2016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 배치에 반발해 시작된 한한령(限韓令)은 9년 동안 K팝 가수들의 중국 단독 공연을 전면 차단했다. 그러다 지난해 4월 이펙스가 푸저우에서 9년 만의 단독 콘서트를 열었고, 올 2월에는 홍콩에서 열리는 드림콘서트가 후난위성TV로 송출됐다. 한한령이 풀리고 있다.

그런데 같은 시기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시 개입' 발언 이후 중국이 일본 콘텐츠를 막기 시작한 것이다. K팝 그룹 중 일본 국적 멤버가 있는 경우 행사가 줄줄이 취소됐다. 르세라핌의 상하이 팬사인회는 이틀 전 취소됐고, 클로즈유어아이즈의 일본인 멤버 켄신은 항저우 팬미팅에 참여하지 못했다. 한·중 관계에서는 풀리고 있고, 동시에 중·일 관계에서는 발목이 잡혔다. 중국에서 K팝은 음악이 아니라 외교 카드다. 한국 가수가 노래 한 곡을 부르려면 한·중·일 삼각관계가 동시에 평온해야 한다.

동남아에선 풍경이 또 달라진다. 베트남에서 한국 콘텐츠는 드라마, 뷰티, 음악, 웹툰, 출판물, 음식 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1위다. 2위 국가와의 격차도 압도적이다. 태국에서는 K팝 그룹에 태국인 멤버를 두는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팬덤의 적극성에서 한국 본토를 능가한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반(反)한류 담론은 존재한다. 한국 아이돌에 대한 청소년의 과몰입을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기사가 정기적으로 실리고, V팝을 키워야 한다는 자국 문화 자존감 담론이 함께 자란다. 압도적 수용과 자기방어가 동시에 진행된다. 단 일본·중국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도 있다. 동남아의 반한류는 한국에 대한 적대감보다는 한국과 같은 자리에 자국도 서고 싶다는 경쟁심에서 나온다. 적의가 아니라 부러움에 가까운 감정이다.

이 세 가지 풍경은 왜 이렇게 다른가. 답은 단순하다. 동아시아에서 한류는 그 나라가 한국에 대해 가진 감정의 깊이만큼 복잡해진다. 일본은 식민지배 기억이 있고, 중국은 사드와 동북공정으로 충돌이 있었고, 베트남은 베트남전 한국군 파병이라는 짐이 있다. 가까운 이웃일수록 짐도 무겁다. 반면 미국·유럽은 한국에 대해 가진 역사적 짐이 거의 없기 때문에 한국 콘텐츠를 그저 '재미있는 동아시아 문화'로 가볍게 받아들인다. 거리가 멀수록 한류가 단순해지는 역설이다.

이것이 한류 산업이 마주한 까다로운 현실이다. 한류는 멀리 갈수록 잘 통하고, 가까이 올수록 정치에 발목이 잡힌다. 그러나 시장 규모는 정반대다. 일본·중국 두 시장의 합계는 미국·유럽 시장 전체와 맞먹는다. 한류가 진짜 큰 산업이 되려면 정치적으로 가장 까다로운 시장에서 가장 잘 작동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길은 단순하지 않다. 정치 변수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콘텐츠가 정치보다 더 강해져야 하고, 외교 카드가 되지 않으려면 산업 구조가 외교보다 더 단단해져야 한다. 9년 한한령을 견디고 살아남은 한류, 혐한 속에서도 일본 화장품 시장 1위를 만든 한류라면 그 길로 갈 수 있다. 한류의 진짜 시험대는 멀리 뉴욕과 파리가 아니라, 가까이 있는 도쿄와 베이징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홍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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